2018년 가을 116호 - 1842번의 하루를 새기다 광화문 농성 기념 현판식 / 진수
1842번의 하루를 새기다 광화문 농성 기념 현판식
진수│낮엔 따뜻하고 밤엔 쌀쌀한 요즘.
환절기라고 하는데, 계절이 바뀌는 거라고 하는데,
이 즈음의 날씨가 전 정말 좋아요.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자기준 장애인수용시설 폐지 광화문 농성을 중단한 지 1년이 됐다. 다들 알다시피 농성을 중단했던 이유는 그들(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농성장으로 와 3대 적폐 완전 폐지를 공식적으로 약속했기 때문이다.(복지부와 3대적폐 폐지 공동행동은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장애인수용시설 폐지에 관한 민관협의체 구성에 협의했다) 여기에 더해서 하나의 약속이 있는데, 그것은 1842일의 농성을 기념하는 현판을 광화문 지하도에 달기로 한 것이다.(박원순 시장과 약속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그 어떤 약속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3대적폐 공동행동은 청와대 앞에 농성장을 다시 차렸고 농성 중단 1주년을 기념하여 광화문으로 현판을 직접 달러 갔다. 현판식은 2018년 8월 21일 광화문 농성장 옛터에서 진행 됐고, 예상했던 대로 순조롭게 진행 되지 않았다. 현판을 달려 하자 서울교통공사 보안관과 직원들이 달려들어 막으려 했고, 주위의 활동가들은 그들을 막아섰고 ‘서울 시장이 약속했다’라고 외쳤다. 나는 그날 현판을 벽에 다는 역할을 맡았는데, 다행히도 주위의 많은 동지들의 힘으로 현판을 무사히 달 수 있었다. 아무튼 그 덕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덕이라 하면, 현판을 달았으니 그날 현판식과 그 후의 이야기들을 써보면 좋을 것 같다는 청탁을 받은 것이다.
무엇을 써야 하나 고민 끝에, 문득 1842일의 첫 날. 그 하루가 궁금했다.
“이들은 2012년 8월 21일, 광화문역사 지하차도에서 10시간이 넘는 경찰과의 사투 끝에 은박 스티로폼 깔개 한 장을 깔고서 농성을 시작했다”(출처: 비마이너)
‘10시간의 싸움과 한 장의 은박깔개.’ 2012년 8월 21일. 그 날 나는 그곳에 없었지만, 그 하루를 애써 그려 본다면,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과 하얗게 빛나는 은박 스티로폼일 것이다. 나에게 농성 첫날의 마지막은 바닥에 깔린 빛나는 은박스티로폼의 이미지 위에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치열했던 하루를 은빛 잉크 삼아, 우리의 몸을 못 삼아, 그 날의 하루를 그곳에 깊게 새기는 일인 것 같다. 그 날 이후로 광화문엔 농성장이 세워졌고, 저마다의 하루가 그곳에 보태졌다. 그리고 그렇게 1842번의 하루가 쌓였다. 현판은 아마 그 날부터 시작 됐는지 모른다. ‘1842일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자기준 장애인수용시설 폐지를 외치다’ 광화문 현판의 문구다.
그곳에 1842번의 하루가 있고 그 안에 당신의 하루가 있다. 그날의 하루는 나쁜 제도로 인해 죽어간 영정들 앞에서, 장애등급제 폐지하라 부양의무제 폐지하라 장애인 수용시설 폐지하라를 외치는 날이고 그런 외침들이 모여 세상에 없는 말을 만드는 날이다. 그렇게 당신의 하루가 만든 말은 힘을 갖고 세상에 퍼져 약속이 된다. 당신의 하루는 세상에 없는 말을 만든다. 당신의 외침과 하루가 만든 말과 약속, 그것은 잘 지켜지고 있는가? 3대 적폐는 폐지되고 있는가? 없애는 것은 달라지는 것이다.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하고 장애인수용시설을 폐지하는 것은, 장애인의 삶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다. 삶이 바뀌지 않는 한 폐지는 폐지가 아니다. 지금까지 민관협의체 회의를 통해 드러난 그들이 주장하는 폐지에는 장애인의 삶을 변화 시킬 어떤 것도 없다. 장애등급제는 중경이라는, 등급에서 정도의 말로 바뀌었을 뿐이고, 부양의무기준의 의료급여와 생계급여 폐지에 관한 계획은 나온 것이 없다. 장애인 수용시설 폐지를 위한 탈시설 관련 예산에 관한 얘기 또한 어디에도 없다.
광화문 농성장을 지킨 당신의 하루가 세상에 없는 말을 만들었다면 그 후에 이어지는 청와대 농성장을 지킨 당신의 하루는 세상에 있어야 할 것들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장애인이 완전하게 지역사회에 통합돼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고 그런 환경 속에 살기 위한 예산을 만드는 일이다. 폐지 후의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세상은 장애인의 삶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다. 1842번의 하루가 새겨진 현판이 광화문에 있다. 그리고 3대적폐의 완전한 폐지를 위한 예산을 요구하는 청와대 농성장엔 우리의 하루가 쌓여 가고 있다. 앞으로 몇 번의 하루가 그곳에 새겨질 것인가? 횟수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의 하루가 이제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