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가을 116호 - 박종필 감독 1주기, 그를 기억하는 우리의 방법 /조한진희
박종필 감독 1주기, 그를 기억하는 우리의 방법
조한진희(반다) │2005년부터 다큐인에서 활동했었다.
건강 때문에 휴직을 했고, 수전증이 생긴 이후 영상언어 대신 문자언어로 말하고 있다.
“추모제에서 포럼을 해요?”
몇 차례 신기하다는 눈빛을 마주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눈빛이 조금 낯설었습니다. 박종필 감독 1주기 추모제를 준비하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포럼이 가장 먼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많은 활동가들이 그렇듯 함께하던 가까운 동지, 벗들을 앞서 보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손가락이 부족할 만큼 반복된 그 경험 속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텅 빈 공간으로 남는다는 것을요.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므로, 죽음 이후 존재의 공간은 텅 비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채워야 하는 건 살아 있는 자들에게 숙제로 남겨지더군요. 흔히 죽음은 존재의 끝이고 관계와의 단절이라고 말해집니다. 죽음은 뒤돌아보지 않지요. 살아 있는 자들만이 떠나보낸 자의 죽음을 돌아 볼 뿐. 그리고 그 죽음을 어떻게 정리 할 것인지는 남아 있는 자들의 선택입니다. 단절로 끝낼 수도 있지요. 그게 꼭 나쁜 것도 아니고요. 잊혀 질 권리를 이야기하며, 완전한 소멸을 소망하는 이들도 가끔 봅니다. 그러나 저는 활동가들의 죽음은 좀 달라야 한다고 여기게 됐습니다.
활동가의 경험과 고민은 공공재
한 명의 활동가가 불현듯 떠난 자리, 그가 해왔던 활동의 경험과 어렵게 진전시킨 고민들도 무심히 사라지는 것을 반복해서 목격했습니다. 한줌도 안 되는 운동 사회에서 활동가 한 명 한 명은 얼마나 소중한지요. 특히 10년, 20년 오랫동안 함께 한 활동가가 여러 현장 속에서 길어 올리고 성장시킨 살아 있는 고민들은 운동사회의 자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기록되고 누적되지 못한 채, 육신과 함께 먼지처럼 소멸되어 버렸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뒤에 오는 이들은 다시 똑같은 고민을 ‘0’부터 다시 시작하게 됐습니다. 똑같은 탄식, 좌절, 희열을 반복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활동가의 운동 경험과 고민은 공공재이고, 공공재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알다시피 박종필 감독은 20년 동안 장애인, 홈리스, 세월호 등의 현장을 온 몸으로 관통했습니다. 몸의 일부가 된 카메라와 함께요. 그리고 그의 몸에는 카메라만큼의 무게로 쌓인 경험과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가 여러 현장과 동료로부터 배우고 얻은 것들입니다. ‘투쟁 현장에서 카메라는 어떤 위치여야 하는가, 카메라의 피사체가 되기도 하는 존재들과 평소 동료로서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다큐멘터리로 사회를 기억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속 가능한 활동의 조건은 무엇인가, 영상활동가 재생산을 위한 구조는 무엇인가, 변화하는 미디어 운동과 배급환경 속에서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고민을 진전시키며 조금 더 나은 답을 만들어낸 것도 있고, 고민을 머금고 있었을 뿐 적당한 혜안을 찾지 못한 것도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그의 경험과 고민도 여느 활동가들처럼, 여러 과정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을 겁니다. 다양한 현장 투쟁에서 승리나 좌절을 맛보면서, 동료들과 토론 속에서 깨지면서, 선배들로부터 조언을 겸연쩍은 표정으로 들으면서 차곡차곡 나아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몸을 관통하며 채우고 발전시킨 것들은 영상, 장애, 홈리스, 세월호운동 등에서 여전히 유효한 혹은 치열한 고민들입니다. 공유재화하는 시간으로서의 포럼 1주기 추모포럼 ‘박종필의 카메라, 이것이 액티비즘이다!’는 그의 활동을 공유재화하는 시작이었습니다. 포럼은 크게 보면 두 가지 줄기로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는 박종필 감독의 활동을 기록하는 것과 또 하나는 그가 풀지 못했으나 현재까지 유효한 고민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우선 포럼은 올해가 첫해였던 만큼 박종필 감독의 활동을 기록하고 의미화하는 것에 꽤 많은 비중을 두었습니다. 주로 동료 활동가로 구성된 발표자들은 운동의 흐름 안에서 그의 활동을 꼼꼼히 밝혀주거나, 변화하는 사회나 영상 환경 속에서 새롭게 적응하지 못하거나 흔들리는 모습까지 정리해주었습니다. 폭넓은 기록이었고, 여러 의미를 새롭게 짚어내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그의 활동은 운동사회 안에서 쌓아온 여러 경험과 고민의 산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활동을 기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단순히 박종필이라는 존재 한 명을 기록하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포럼을 통해 박종필 감독이 풀지 못했던 고민의 바통을 이어받아 머리를 맞대고 하나씩 풀어보자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미디어 운동’이나 ‘다큐멘터리 배급환경’에 대한 주제들은 영상인이 아닌 참여자들이 이해하기에 다소 낯설고 어려운 주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보다 직접적으로 미디어 운동 맥락 속에서의 박종필 감독의 활동을 조망하는 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장애, 홈리스, 세월호 이외에 또 다른 의미로서 ‘영상 현장’에서는 어떤 활동과 고민이 있는지, 다양한 영역 활동가들이 함께 듣는 게 의미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영상활동가들에게 영상을 요청하는 것 이외에, 그들의 고민을 얼마나 함께 했는지도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전달 받았던지, 일부 참여자와 발표자들은 이런 소감을 전해주었습니다. “영상활동가들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처음으로 알게됐다”, “영상활동가를 카메라처럼 대했던 것을 반성해야겠다”, “영상 운동하는 사람들끼리만 고민해서는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인데, 처음으로 영상 운동 밖 활동가들 앞에서 발표해서 시원했다”, “술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주제들이, 드디어 수면위로 올라오는 것 같다”. 운동이 결국 연대라면, 계속해서 서로에게 잘 의존하면서 힘을 주고받으며 나아가길 바란다면, 서로가 어떤 고민과 조건 위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최소한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연대가 소진과 소모의 과정이 아니려면, 각자가 발 딛고 선 ‘투쟁’을 두루 살펴보는 폭넓음이 필요합니다.
‘관계의 장’으로서의 추모제
포럼을 준비하면서 사람이 얼마나 올까 걱정했습니다. 포럼이라는 것 자체가 낯설고 지루한 자리로 여겨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포럼 공간이 썰렁하게 느껴질까 봐 50석 남짓한 자리만 남기고 의자를 구석에 접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포럼이 시작되기도 전에 꽉차버린 좌석 때문에 수십 개의 의자를 다시 펼쳐야 했습니다. 추모문화제도 무대를 보며 준비된 막걸리와 전을 삼삼오오 앉아 먹기에 딱 알맞을 만큼, 마로니에 광장이 채워졌습니다. 장례식도 아닌 1주기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모인 것에 놀라움을 표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박종필 감독이 생전에 이렇게 인간관계가 좋았냐며 유쾌하게 웃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겨우 1년 사이 박종필 감독의 괴팍한 성격을 잊었거나, 그의 수많았던 적들이 기억을 잃어버리고 이곳에 모인 것 같다는 농담을 하는 이도 여러 명이었습니다. 아마 다 맞는 말이겠지요. 알다시피 한국에서 장례식이나 추모제 같은 행사는 추모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관계의 장’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박종필 감독을 매개로 홈리스운동과 연결되어 있거나 장애 운동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박종필감독이 떠났다고 그 운동과 연대하던 관계와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아서 발걸음 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평소엔 각자의 현장이 바빠서 자주 못 보지만, 이렇게라도 박종필 추모제에 와서 홈리스운동에 대해 잠시라도 듣고,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을 만나고, 세월호에 대한 기억을 다시 한 번 가다듬는 시간이었습니다. 추모제에 와서 관계를 확장하고, 연대의 끈을 조금씩이라도 엮는 데 손 보태고 연루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추모사업회가 어떤 개인이 얼마나 훌륭한 활동을 했는가에 많은 초점이 맞춰지는 게 꼭 좋은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추모제의 목적은 한 개인의 삶을 박제하는 게 아니라, 현재화 하는 것일 테니까요. 제가 아는 한 박종필 감독은 잊히는 것보다 좋은 영상활동가로 기억되지 못하는 게 더 두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좋은 영상활동가로 기억되지 못하는 것 보다 더 싫다며, 얼굴을 찡그리는 건 어떤 것일까 짐작해 봅니다. 아마도 본인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소환하다가 마무리되는 추모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추모제는 자신에게 무용하다며, 안했으면 좋겠다고 조금 냉랭하게 말할 것만 같습니다.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이견 속에서 연대의 힘을 가꿔가는 자리. 까칠하고 괴팍했던 박종필 감독에게 어울리는 추모제 모습입니다.
박종필 감독의 동료들이 폭넓게 기록한 1주기 포럼 자료집 『박종필의 카메라, 이것이 액티비즘이다!』는 노들야학 홈페이지 [자료실 - 정책자료실] 게시판에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