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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비마이너

지은이 이규식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 저런 책을 써왔다.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으며, 읽기의집 집사이기도 하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후마니타스). 지난봄에 출간된 이 책은 하나의 사건이자 문제제기이다. 무엇보다 ‘지은이 이규식’이 그렇다. 서울지하철 혜화역 2번 출구 앞에는 그의 이름을 새긴 동판이 있다. “장애인 이동권 요구 현장. 1999. 6. 28. 혜화역 장애인(이동권연대 투쟁국장 이규식) 휠체어 추락사고 이후, 여기서 이동권을 외치다.” 그는 지하철역 리프트 추락사고 피해 당사자이자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해 싸워온 투사이다. 우리 사회에서 지난 20여 년간 계속되고 있는 이동권 투쟁의 출발점에 그의 이름이 있다.

 

  그런데 내가 ‘지은이 이규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사건은 조금 다른 것이다. 나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아니라 ‘지은이 이규식’이라는 사건에 대해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지은이 이규식’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다. 이 책의 ‘집필활동지원사’로 참여한 배경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중증 뇌병변장애인의 생애사이다”. 사실 이 말만으로는 사건의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 ‘중증장애인이 자기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고? 대단하다!’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지은이 이규식’은 책과 관련해서 더 깊은 차원에 일어난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철학자 미셸 푸코의 문구를 빌리자면 ‘지은이 이규식’에는 ‘저자란 무엇인가’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제기가 담겨 있다.

 

  “이규식은 손을 거의 움직이지 못한다. 왼손을 간신히 움직여 전동 휠체어의 기어를 조작하고 숟가락을 들거나 한다. 그런 그가 혼자서 컴퓨터 자판을 하나하나 두드려 가며 책을 집필하기란 매우 어렵다.” 대부분 구술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언어장애가 있다. 말을 해야 할 경우 온몸을 비틀어 몇 마디를 짜낸다. 그런데 이 몇 마디 말도 붙잡기가 쉽지 않다. 들었다고 해서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지하철 선로 점거 시위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을 때 “물어보는 대로 정직하게 대답”했는데도 경찰이 작성한 조서는 “완전 소설”이었다. 경찰이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매끄러운 문장과 탁월한 표현, 감동적 내용이 가득한 이 책의 정체는 무엇인가. 세 사람의 집필활동지원사가 달라붙었다고 한다. 이규식과 9년간 함께 생활한 활동지원사 김형진,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함께 일한 김소영, 오랜 지인이자 그와 깊은 이야기를 나눈 인권활동가 배경내. 이들은 이규식의 이야기를 받아쓰기도 하고 되묻기도 하고 심지어는 다른 표현을 제안하며 문장을 함께 만들었다. 이들은 이규식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두고 이규식과 토론까지 벌였다고 한다.

 

  이규식은 저자인가. 호주의 뇌병변장애인 애니 맥도널드가 『애니의 커밍아웃』이라는 책을 펴냈을 때 이것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애니는 의사소통 조력을 받아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이 애니의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소송으로까지 이어졌다. 호주 대법원은 의사소통 조력을 받은 애니의 말을 애니의 것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조력자의 개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애니의 말을 애니의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규식은 힘들지만 필요한 말을 하는 사람이고, 느리지만 컴퓨터 자판으로 글도 쓸 수 있다. 집회에서 자주 연설도 한다. 한마디로 애니와 같은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집필활동 지원을 받지 않았다면 그도 이런 책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가 살아온 삶의 성격이기도 하다. 이 책에 소개된 그의 삶은 온통 의존투성이다. 대소변조차 혼자 처리할 수 없기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타인에게 엉덩이를 까보이며 살아왔다. 그가 세상 속으로 뛰어들기 위해 해야 했던 일, 그가 탁월하게 잘해낸 일은 ‘의존하기’였다. 여러 존재들에 대한 의존 속에서 그는 장애운동가가 되었고, 전동휠체어 튜닝전문가가 되었고, 바다 수영을 즐기고 스쿠버다이빙을 꿈꾸는 자가 되었으며, 비인간동물을 돌보는 사람이 되었다.

 

  이규식은 저자인가. 하지만 저자란 무엇인가. ‘지은이 이규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물음이다. 자립성과 독립성, 개인성으로 이루어진 저자라는 신화에 대한 문제제기다. 세상의 검문소에서 그는 혼자서 할 수 있느냐는 물음을 숱하게 받아왔다.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는지, 혼자 옷을 입을 수 있는지. 마치 의존 없는 삶이 세상살이의 자격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이야기는 당신 혼자 지은 것인가. 이 삶은 당신 혼자 살아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은이 이규식’은 이규식 혼자서는 불가능했던 삶, 그가 다른 이들에게 의존함으로써 만들어낸 눈부신 삶, 그리고 그것에 관한 세상에 하나뿐인 이야기에 붙여놓은 고유명사일 따름이다.

 

고병권1_사진제공후마니타스.jpg

사진제공: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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