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봄여름 134호 - 그들의 투쟁이 우리의 대의를 일깨우고 있다
그들의 투쟁이 우리의 대의를 일깨우고 있다
*편집자 주: 국내의 진보적 연구자들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의 지하철 행동을 지지하는 선언문을 지난 4월 19일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문화사회연구소-공유공간 물질,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사)지식공유 연구자의집, 캣츠랩, 현대정치철학연구회 등 8개 단체가 결성한 ‘장애인권리예산 투쟁에 연대하는 마포-신촌 학술단체모임(아래 마포-신촌학술단체모임)’이 주도했다. 마포-신촌학술단체모임은 지난 4월 15일 오후 1시, 서울시 종로구 노들장애인야학 교육장에서 ‘역량으로서의 장애’(Disability as Capability)란 제목으로 학술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아래는 선언문 전문과 선언문 연명자 명단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탑승 투쟁에 함께 연대한다”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의 투쟁이 우리에게 오랫동안 잃어버린 대의를 일깨워주고 있고, 우리는 그들 덕분에 우리가 직면해 있는 문제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으며, 우리가 어떤 대의를 추구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지 깨달아가고 있다.
○ 전장연 투쟁 바로 보기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투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투쟁을 보는 관점을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울시와 정부, 그리고 보수 언론은 연일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투쟁을 선량한 시민들을 볼모로 삼는 이기적인 투쟁으로 몰아가면서, 계속 이런 불법 시위가 지속될 경우 법에 따라 엄단할 것이며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인과관계를 뒤집는 것이다. 전장연은 지난 20년 동안 이동권 투쟁 등의 권리 투쟁을 전개해오면서 정부, 국회, 지자체와 지속적인 대화와 협상을 진행해왔으며, 그 결과 작년 국회 상임위 차원에서는 여야 합의로 장애인권리예산 6600여억 원이 증액된 바 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의 거부에 의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2023년도 예산안에서는 단지 106억 원의 증액에 그쳤다. 이는 전장연 요구안 대비 0.8%에 불과하다.
가스비 인상으로 시민들의 불만이 속출하자 정부와 여당은 수조 원이 넘는 긴급 난방 지원비를 편성하겠다고 하면서도, 장애인들이 수십 년 동안 요구해온 장애인권리예산에 대해서는 무시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 정부에는 장애인의 권리, 더 나아가 사회적 약소자들(minorities)의 권리에 대한 고려가 전적으로 부재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 누가 비폭력적이고 누가 폭력적인가
이러한 무시와 약속 불이행에 대해 전장연이 저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전장연은 권력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그러면서도 아주 평화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들은 서울시, 서울교통공사, 경찰의 집요한 방해에 굴하지 않고, 불법 시위를 중단하라는 권력의 커다란 소음에 맞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힘껏 자신들의 요구를 외치고 있다. 시민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요구하면서 온몸으로 평화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전장연의 투쟁과 이에 대한 탄압은, 오늘날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폭력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물리적 구타와 같은 형태로 전개되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해 필수적인 공동체 성원들 사이의 긴밀한 연대를 파괴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집합적 주체로서의 시민들을 서로 상이한 이익 추구를 위해 끝없이 경쟁하는 신자유주의적 행위자들로 변모시킨다. 시민의 연대 없이 민주주의적인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으며, 약소자 시민들의 권리가 침해되고 무시될 때 시민의 연대는 허물어진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 통치는 강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약소자 시민들의 권리를 짓밟고 외면함으로써 민주주의 공동체의 기초를 파괴하고 있다. 전장연은 가장 약소자들 가운데 하나인 장애인들의 권리를 스스로 요구하고 지켜냄으로써 파괴되고 있는 시민들의 연대를 복원하기 위한 싸움의 최전선에 나서고 있다.
○ 시민 모두가 잠재적 장애인
지난 20여 년 동안 전장연은 장애라는 것이 개인들의 불운이 아니라 사회적 속성을 지닌 것임을 눈부시게 입증해온 바 있다. 우리들 각자는 인생의 상이한 시기에 저마다 각자의 이유로 일정한 장애를 겪을 수밖에 없다.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은 다양한 형태의 장애를 지니게 되며, 상처 받기 쉬운 신체를 지닌 인간에게 그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따라서 장애인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전장연의 투쟁은 특정한 집단의 이익과 관련된 투쟁이 아니라, 잠재적인 장애인들로서 시민들 전체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다. 그들의 투쟁 덕분에 연로한 시민들을 비롯한 교통약자들이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좀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정의로운 사회의 토대로서 돌봄 연대
더 나아가 전장연의 투쟁은 돌봄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활동이라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장애인들에게만 돌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한 부모의 끊임없는 손길이 필요한 어린 시절이나 보호자의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한 노년의 시기에만 돌봄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며, 또한 스스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속적으로 돌봐야 한다. 그것이 관계 속의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돌보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자 각자가 누려야 할 권리이며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전장연의 투쟁은 정부와 서울시,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러한 돌봄의 중요성과 공적인 의무를 외면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역으로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 사회가 사람답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돌봄의 연대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집는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적 연대를
그렇다면 전장연의 시위가 선량한 시민들을 볼모로 삼는 이기적인 소수 집단의 불법적인 시위라는 정부와 서울시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임이 자명하다. 이는 사실 우연이 아니다. 권위주의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정부일수록 자신들의 잘못을 뒤집어 피해자를 가해자로 변모시키고, 이들을 탄압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전장연 시위는 민주주의적 통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싸움이다. 갖은 협박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전장연의 비폭력 직접행동은 민주주의적 시민들이 권위주의적인 억압에 맞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감동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우리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싸움에 연대함으로써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고 확장하는 길 이외에 다른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로에 가깝게 줄어들 수도 있고 무한대로 팽창할 수도 있는 권력이다. 전장연 시위를 지지하고 그에 동참함으로써 우리 평범한 시민들이 민주주의 정치체의 주권자임을 입증하기로 하자. 우리의 민주주의적인 권력을 무한히 증대시켜 보자.
- 정부와 여당, 서울시는 전장연의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시민으로서 장애인들의 권리를 박탈해 온 지난 시간에 대해 즉각 사과해야 한다.
- 기획재정부는 주권자인 국민의 대표자들이 합의를 통해 결정한 예산안을 대폭 삭감한 것에 대해 반성하고, 전장연과 적극적인 대화에 나서야 한다.
- 정부와 국회는 전장연이 요구해 온 정당한 장애인권리예산을 2024년 예산안에 전액 반영해야 한다.
- 시민들과 연구자들은 전장연의 투쟁에 동참하고 시민들의 정당한 권리를 성취하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장애인권리예산 투쟁을 지지하는 연구자 208명 일동〉
강경희, 강도희, 강병호, 강세윤, 강신규, 강윤택, 고태은, 고해종, 구승우, 권범철, 권순욱, 권우정, 권창규, 권혁주, 금성룡, 길혜민, 김규혜, 김기성, 김나연, 김나영, 김동규, 김동희, 김두래, 김란영, 김미정, 김민아, 김민환, 김상규, 김상민, 김상운, 김상혁, 김상현, 김선기, 김선우, 김선해, 김선화, 김소연, 김수경, 김승윤, 김연호, 김영욱, 김우리, 김운영, 김은정, 김은정, 김익균, 김일림, 김정인, 김정한, 김정환, 김종진, 김주희, 김지수, 김지우, 김현준, 김형용, 김혜원, 김호수, 김호준, 류태광, 문성욱, 문진영, 박관성, 박기형, 박배균, 박상현, 박서영, 박서현, 박숙경, 박승일, 박은선, 박자영, 박종주, 박치현, 박현선, 박현아, 반명진, 배경진, 배주연, 배채연, 백선우, 변재원, 서우빈, 서정연, 선재원, 성상민, 성석용, 성정숙, 성정혜, 소수연, 송용한, 송은영, 신나리, 신솔아, 신지연, 신현아, 심소미, 심은희, 안소연, 안유진, 양선미, 양우혁, 엄은희, 여미애, 오근창, 오은정, 오은혜, 오창환, 우새롬, 위대현, 위효정, 유기훈, 유영룡, 유이지운, 윤상원, 윤성준, 윤수정, 윤영광, 윤인로, 윤자호, 윤제원, 이나은, 이도연, 이미애, 이민희, 이보경, 이상희, 이선우, 이세형, 이숙희, 이승빈, 이승원, 이승한, 이영미, 이영은, 이우용, 이은솔, 이인목, 이재환, 이종현, 이주영, 이주원, 이준형, 이지훈, 이채현, 이태준, 이해수, 이현정, 이현지, 임명규, 임소정, 임수영, 임진영, 임태훈, 임혜민, 임홍열, 장원, 장인하, 장정연, 장주연, 장현애, 전근배, 전인선, 전주희, 정다은, 정아람, 정연옥, 정용택, 정원옥, 정정훈, 정제기, 정지영, 정창조, 정해국, 정혜진, 조가빈, 조문순, 조문영, 조소연, 조수미, 조윤희, 조지훈, 주정립, 주훈, 진영준, 진태원, 채푸름, 채희숙, 천정환, 최갑수, 최바름, 최성용, 최정은, 최종하, 최지원, 최지원, 최한별, 최호랑, 최희선, 하승우, 한상원, 한승지, 한혁규, 한희정, 홍성훈, 황용연, 황재민, 황준서 (이상 총 208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