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여름 131호 - 6월 30일 삼각지역 62차 삭발결의자 / 조재범
2022.6.30.
삼각지역
62차 삭발결의자
조재범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 활동가
5살 때 신촌세브란스병원 부설 연세재활원에 입원해 수술과 재활치료를 받고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재활원에 입원했을 때 가장 싫었던 건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재활원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부모님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고 절 재활원에 입원시켰습니다. 매일 밤 가족이 보고 싶어 많이 울었습니다. 혹시라도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실까 봐 불안과 걱정에 시달렸습니다.
재활원 생활에서 또 제일 싫었던 건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나고, 똑같은 메뉴로 밥 먹고, 정해진 날에 목욕하고, 집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재활원은 저녁 8시에 자서 아침 6시에 일어나 오전 7시, 낮 12시, 오후 5시에 아침, 점심, 저녁을 먹어야 했습니다. 가장 많이 나온 반찬은 멸치를 넣고 끓인 김치찌개입니다. 또한 매주 화요일 아침에 목욕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토요일에 부모님이 미리 외출증을 써야 집에 갈 수 있었고 외출증이 없으면 집에 갈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라 신촌 대학가에서 데모를 많이 해서 데모가 시작되면 차량통제로 집에 못 갈까 봐 걱정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이런 삶이 시설에서의 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30~40년이 지난 지금도 시설에 사는 장애인은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인권유린 사건이 일어나고 장애인이 죽어갑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일반 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이동권이라는 말도 없던 시절이라 등교는 아버지가 출근길에 차로 시켜주셨고 하교는 같은 반 친구의 도움을 받아 택시로 했습니다.
이런 생활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이나마도 그때는 목발로 보행해서 가능했습니다. 그 시절에 장애인 이동권이 잘 갖춰져 있었다면 택시를 탈 필요는 없었겠지요.
지하철을 처음 타본 건 2001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때도 전장연은 정부에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투쟁했고 지금도 여전히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하철 타기 투쟁을 해서 시민에게 불편을 주는 건 분명히 잘못된 일이고 죄송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민에게 불편을 주고 그로 인해 욕먹으면서까지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건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이 나라의 모든 정부는 선거 때 우리에게 수없이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선거 끝나고 정권을 잡으면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기다리라고만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경찰은 우리가 지하철 타기 투쟁을 하는 게 불법이라며 처벌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처벌하면서, 법을 지키지 않은 정부는 왜 처벌하지 않나요?
우리는 돈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법이 보장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장애인권리예산은 우리에게 목숨이고 생명입니다. 지하철 타기 투쟁은 처절한 절박함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당연한 권리가 보장될 때까지 동지와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 투쟁!
조재범 활동가가 삭발식 중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