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여름 131호 - 오체투지! 다시 시작이다 / 조상지
오체투지!
다시 시작이다
조상지
노들야학 학생. 중증장애인 권리중심 맞춤형 공공일자리 노들야학 노동자
<장애인 왜 배워야 하나> 다큐 감독. 제 1회 박종필 감독상 수상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단지 노들야학 수요일 지하철 집회에 홍기형이 삭발 투쟁하는 날이라 노들야학 부총학생회장으로, 홍기형의 동료로 함께하기 위해 그날 집회에 참석한 것이였다
집회 장소에 도착한지 10분쯤 후에 집행부에서 '오체투지'를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활동지원사를 통해 들었다. 시간이 멈춰졌다. 내 작은 눈도 커졌을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 했던 오체투지
오체투지는 박경석, 이형숙 등등 대단한 활동가들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내가? 오체투지를? 하지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삭발한 홍기 형이 오체투지를 해야 했으니 그날은 나여야만 했다.
손목과 팔꿈치, 무릎에 보호대를 했다. 휠체어에서 내려와 바닥에 엎드려 지하철을 바라봤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서 비장애인들의 발이 쏟아져 나왔다. 밤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자동차들의 빛 같이 어지러웠고, 발자국 소리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나의 모든 감각이 바쁘게 움직이는 비장애인들 발에 집중 됐다. 시간이 되어 숨을 고르고 이동하는 순간 나는 최선을 다해 팔과 다리를 바둥거리며 배를 밀고 앞으로 나갔다.
솔직히 앞으로 나가진 못한 것 같다. 옆에서 활동지원사와 온술 쌤이 팔을 잡고 앞으로 당겨줘서 움직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내 오체투지는 한 살배기 아가의 배밀이보다도 못했다. 온전히 혼자 기었다면 지하철을 올라타는것만 반나절은 걸렸을 것이다.
‘혼자 기었으면 지하철 연착 투쟁이 제대로 됐겠구나’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가급적이면 꺼내보지 않고, 깊게 묻어두고 싶었던 지난 기억들이 지하철에 앉아 있는 비장애인들의 발등 하나하나에 얹혀져 있었다. 장애인은 장애인들끼리 모여 살아야 한다고 반복했던 아버지 말들. 차에 태워져 시설이 있는 강원도 철원으로 가는 길. 시설에서 물을 주지 않아 욕실로 기어가서 대야에 받아 있는 물을 더위 먹은 개처럼 핥아먹은 후 누워서 쳐다봤던 시설 천장. 올라갈 방법이 없어 떨어져 죽지 못했던 2층 창문. 3층 창문에서 떨어질 때 들렸던 장애인의 비명소리.
하늘나라에서는 비장애인으로 살라고 죽은 그를 위해 빌었던 명복. 그렇게 죽을 수 있기를 소망했던 매 순간들.
기억들을 뿌리째 뽑아내듯 움켜잡으며 기를 쓰고 앞으로 나갔다. 수많은 생각과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 해질 쯤 잠시 멈춰서 숨을 골랐다.
몸을 일으켜 앉았는데 누리 선생님이 기대라고 했다. 선생님 다리에 몸을 기대고 앞을 보니 활동지원사와 온술 선생님이 나를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뒤에서 천성호 교장선생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왜 삭발과 오체투지를 하는지, 지하철에서 이동권 투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을 말씀하시고 계셨다. 그 순간 눈물이 쏟아지는 걸 지하철에 앉아 있는 비장애인들의 얼굴을 보면서 참았다. 약해 보일까봐. 내가 힘들어서 우는 걸로 생각할까봐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내 편들이 있었다. 내 편에게 힘든 몸을 기댈 수 있고, 내 편이 투쟁의 이유에 대해 얘기해주고 있고, 나를 바라보면서 응원해주는 내 편들이 있었다.
1년 전 오늘, 상황은 다르지만 같은 느낌이였던 적이 있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구리시 인창동 성일장 철거민 투쟁 막바지였다. 조합측에서 성일장으로 들어오는 모든 진입로를 펜스로 막고, 깡패 용역을 고용하고 강제집행을 하기 위해 스카이차와 포크레인이 들어올 곳에 건물을 허물고, 땅을 다지고 있는 정말 죽느냐 사느냐 하는 순간이였다. 집회 신고하러 갔던 나의 활동지원사가 철거민들과 공범이라고 긴급체포 되었을 때 내 몸 하나 보호하지 못하는 중증장애인인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있었다.
그때 노들야학 천성호 교장선생님이 오셨고, 노들야학과 장애인단체들이 구리시청에서, 구리경찰서에서 활동지원사 석방과 철거민들의 주거권 보장을 요구했다. 내 편들이 갇혀있는 나를 위해 구리에 와줬고, 말을 못하는 나를 대신해 외쳐주었다. 그렇게 나는 내 편들의 힘으로 철거 투쟁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살아남은 나는 계속되는 발달장애인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국가가 나를 죽이려 할 때 느꼈던 분노와, 사회가 나를 죽이려 할 때 느끼는 공포감이 어떤지 나는 안다.
장애가 있어서 죽어야 했던 그들이 느껴야 했던 분노와 공포를 더 이상 느끼지 않게 할 것이다.
장애인들을 죽이는 이 사회를 바꿔내야 하는 게 살아남은 나의 몫이다.
나는 노들야학으로 돌아왔다. 1년 후 오늘, 다시 살아난 나는 더 이상 우리들을 죽이지 못하게,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오체투지 마지막 장소 혜화역에 지하철이 도착해 문이 열렸다.
기어 나오다 힘이 들어 지하철과 역내에 몸을 반씩 걸쳐 엎드렸다. 숨쉬기가 힘이 들었다. 힘이 든 만큼 이를 악물었다.
비장애인들은 생애 주기에 맞게 학교 교육을 받고, 노동을 하고, 이동을 한다. 그것이 너무 당연해서 그들은 권리를 권리라고 느끼지도 못한다.
그 권리를 우리 장애인들은 온 몸을 내던지며 요구해도 돌아오는 건 ‘병신들이’라는 욕이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내일의 장애 해방을 위해 오늘은 투쟁해야 한다. 차별받고, 배제되어 왔던 장애인들이 교육을 받고, 노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갖춰져야 하는 이동권을 나는,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집과 시설에 갇혀 죽기만을 기다리는 마지막 한 명의 장애인이 지역사회로 나오는 그날까지 지치지 않고 나는 끝까지 그들의 편이 될 것이다.
오체투지를 끝내고 휠체어에 앉아 주변을 보니 많은 동지들이 내 옆에 있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장애 해방을 위한 투쟁의 길에 조그만 힘이라도 보탤 수 있어 행복했다. 동지들과 함께 투쟁의 의지를 다짐했다.
오체투지는 다시 시작이다.
조상지 활동가가 지하철에서 오체투지를 준비하고 있다. 뒤로는 노들야학 활동가들이 판넬을 들고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