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봄 141호 - [노들은 사랑을 싣고] 공부파 학생에서 싸움꾼이 된 - 문애린 인터뷰 / 김명학, 이예진
노들은 사랑을 싣고
공부파 학생에서 싸움꾼이 된
문애린 인터뷰
진행 김명학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정리 이예진
노들장애인야학 4년차 활동가 (엥? 벌써?)
야학 활동을 처음 시작하던 즈음, 당시 투쟁 현장에는 누구보다도 격렬히 몸부림치고 크게 소리치는 문애린 동지가 항상 함께 있었습니다. 제가 장판은 커녕 야학 사람들 이름도 아직 다 외우지 못하던 시기에도 애린 동지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런 그도 노들야학의 동문이라는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웠습니다. 장판의 수많은 활동가를 키워냈다는 노들야학이 또 한 건 했구나!
하지만 인터뷰 일정 잡는 데에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명학 형이 처음 애린 동지에게 동문 인터뷰를 제안했던 게 작년 10월 무렵인데, 각자의 조직에서 한 번씩 상을 겪으며 인터뷰 일정은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했고, 세번째인지 네번째인지 일정을 새로 잡을 때는 괜한 불안까지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듬해 2월이 되어서야 드디어 만난 애린 동지는 명랑한 모습으로 명학 형과 옛날 이야기도 나누고, 제가 잘 모르는 옛날 사람들 이야기도 잔뜩 하며, 걱정과 달리 별탈없이 인터뷰에 함께 해주었습니다.

▶ 자기소개 부탁해요.
안녕하세요. 저는 한 20년 전에 노들야학 다녔던 문애린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 노들야학은 언제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나요?
대학 공부를 하고 싶었거든요. 저는 초중고 졸업을 집에서 검정고시로 다 했는데요. 남들은 12년 학교 다니며 공부해도 대학에 갈까 말까 하는데 저는 고작 3, 4년 검정고시로 공부해서 대학에 간다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그때는 지금보다 접근권이나 이동권이 훨씬 열악해서 제가 다닐 만한 대입 학원도 없었고, 무슨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가끔 다니던 복지관에서 만난 사람이 노들야학을 소개해줘서 다니게 됐죠. 그때가 2000년대 초반이었고, 그때부터 1년 반인가 2년 정도 노들야학을 다녔어요. 그렇게 잠깐 다닌 건데, 요즘의 야학 교사들도 신입교사 교육자료 영상에 제가 나온다고 알아봐주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저는 대입 공부를 하려고 온 건데, 야학은 순 공부를 안 하는 거예요. 맨날 어디 집회하러 다니고. 처음에는 되게 싫었거든요. 왜 사람들을 자꾸 선동할까 이런 생각이 들고 거부감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도 다 같이 나가는 게 재밌기도 했어요. 그때 저랑 같이 야학 다니던 학생에 이규식, 박현, 강현정, 문명동이 있었어요. 아, 기룡 형, 김기룡도 있었고, 또 지금은 장애여성공감 대표로 계시는 이진희, 진희 언니도 교사로 있었죠. 그 사람들이랑 낮에는 열심히 데모하러 다니고 저녁에는 공부를 했어요. 그때 노래 수업 중 하나가 투쟁가 배우는 거였던 게 기억나요.
그때는 야학에 초록색 봉고차가 있었어요. 야학 교사들이 봉고를 운전해서 학생들 등하교를 같이 했어요. 학생이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중에서도 쉽게 돌아다니기 힘든 중증장애인 학생들을 위주로 등하교 지원을 했죠. 만약에 학생들이 저녁 6시에 등교를 해야 한다고 하면 야학 봉고는 1시, 2시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서울 전역을 다니면서 학생들을 태워야 했으니까요. 그 봉고차에 많게는 7~8명까지도, 보통은 6명 정도 태워서 다녔어요.
▶ 노들야학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뭔가요?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야학 학생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싸운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고요. 그때 한창 이동권 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기였고, 야학에서도 봉고차 등하교를 하면서 이동권에 대한 생각을 많이 나눴거든요. 그러다보니 학생들도 열심히 투쟁을 한 것 같아요. 저는 당시엔 투쟁에 거부감이 컸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야학 활동 중에 투쟁이 가장 기억에 남은 것 같아요.
수업의 경우엔, 솔직히 제가 야학 졸업한 지 진짜 오래됐거든요. 한소리반이었던 건 기억나는데, 수업 내용은 정말 거의 기억나지 않아요.(웃음) 다만 저는 실제로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랑 같은 교실에 모여 수업을 듣는다거나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는데, 학교 다니는 게 이렇게 재밌을 수 있구나 그때 처음 알게 된 것 같아요. 물론 혼자서 배우나 학교에서 배우나, 수학이나 영어처럼 제가 싫어하던 과목들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들하고 형들하고 다 같이 공부하던 것 자체가 재밌었어요. 모르는 게 있으면 서로 물어보기도 하고 서로 막 장난도 치고 했던, 그때의 분위기가 기억이 나네요.
▶ 노들야학을 다니면서 가장 기뻤던 일, 슬프거나 화났던 일은 뭔가요?
시설 생활을 한 적은 없지만 시설이나 다름없는 집구석 생활만 쭉 해왔었기 때문에, 집에서는 혼자 심심하게 지내는 게 전부였어요. 그런데 야학을 다니면서부터 사람들과 어울려 수업도 듣고 이런저런 활동도 하러 다니고 그 자체가 가장 기쁜 일이었던 것 같아요.
슬프거나 화가 크게 나는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다만 아까도 얘기했지만 당시에 야학에 두 파벌이 있었거든요. 공부파랑 투쟁파. 그때는 그 둘이 너무나 너무나 치열하게 대립해서 날이면 날마다 학생들하고 교사들하고 논쟁을 했어요. 저도 공부파로서 논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화났던 일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게 기억에 남네요.
▶ 노들야학에 와서 삶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싸움꾼이 됐죠. 그러게요. 어쩌다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웃음) 어쨌든 야학을 다니면서 사람들이랑 어울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의 기본적인 권리가 어떤 현실에 놓여 있는지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야학을 오래 다니진 않았지만, 야학에서의 경험을 다시 생각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있는데요. 제가 야학 다니며 수능을 보고 어찌어찌해서 대학에 들어갔어요. 그때 들어간 대학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통합해서 다닐 수 있는 전문대학을 새로 만들었다며 크게 홍보하던 곳이거든요. 제가 1기생이었어요. 아마 지금도 평택에 있을 거예요, 한국재활복지대학이라고. 근데 그 학교가 기본적인 시설이나 조건은 장애인들도 큰 무리 없이 수업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라며 조성이 됐지만, 실상은 다르더라고요. 보통 한 학과 정원이 20명이었는데 제가 다니던 과는 그 중 절반은 청각장애인, 나머지 절반은 비장애인이었어요.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은 저 하나.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은 뭔가를 만들거나 수행하는 게 어렵지 않게 가능했는데 저는 잘 안 되더라고요.
당시 과가 10개밖에 없었고 거의 다 컴퓨터공학 아니면 기계공학, 이런 기술 쪽이었어요. 문과 쪽으로는 사회복지과도 있었는데, 저는 일부러 사회복지과를 안 가고 실내디자인과를 갔어요. 알고 보니 그 과가 건축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포토샵, 일러스트, 캐드 이런 정밀한 컴퓨터 프로그램들을 잘 다루어야 했어요. 그런데 저는 대학에 가기 전까지 그런 걸 한 번도 배워본 적 없었고, 팔에 장애도 있다 보니 컴퓨터를 다루는 게 원활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그 과는 뭔가 계속해서 창작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곳이었거든요. 그 속도를 제가 따라가지 못했어요. 계속 제 장애에 대해 교수진들에게 어필을 했는데, 잘 먹히진 않았어요. 학교도 경쟁사회다 보니까. 학교에 실제로 다니면서 이런 현실을 알게 되었어요. 말이 통합학교지 수업 내용이나 커리큘럼은 장애인들에게 맞춰지지 않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제가 제 발등을 찍었죠. (쓴웃음) 내가 왜 이 과를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그런 생각도 들고.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다 필요한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야학에서 활동했던 것들을 좀 더 곱씹게 된 것 같아요.
▶ 애린이 생각하기에 노들야학이 투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살아야 하니까. 장애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이동하고, 공부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아프면 병원 가서 검사도 받아야 되고, 돈도 벌어야 하고, 그런 기본적인 삶이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아직까지도 그게 잘 안 되니까요. 무엇보다 노들야학은 장애 학생들이 같이 서로의 삶을 만들어가는 공간이기도 하잖아요. 그 안에 함께 하는 학생들도 그렇고 교사들도 그렇고 서로를 위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들이 모이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우리 모두가 투쟁하는 이유가 서로 다르지 않다, 모두가 서로 잘 살기 위해 싸우는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 지금은 뭐 하고 지내나요?
백수로 지내고 있습니다! 작년까지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을 하다가 정리를 하고, 지금은 쉬면서 천천히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노들에 전하고 싶은 한 마디가 있다면?
노들야학의 역사가 되게 깊어요. 공간도 여러 번 옮겼고요. 처음에 정립회관에 있다가 쫓겨나고, 여기 마로니에 공원에 천막 치고 수업을 하기도 했잖아요. 그러다 마침내 여기에 공간을 얻어서 굳건하게 지키고 있죠. 이 공간을 이용하는 여러 사람들이 그런 역사를, 이 공간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내가 왜 야학을 다니고 있는지, 내가 왜 야학을 선택하게 됐는지 하는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활동을 하다 보면 너무 지치고 때려치우고 싶다, 그만두고 싶다, 내가 무슨 영광을 보자고 이렇게 하고 있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하잖아요. 저도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그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내가 이 공간을 놓을 수 없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그런 처음의 마음을 계속 가지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