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겨울 140호 - [특집_2024년 파리 패럴림픽 특사단] 파리패럴림픽을 권리림픽으로! 장애인권리약탈자 고발하러 간다! - 노들야학 파리 패럴림픽 특사단 집담회 / 임당, 영희, 호범
[특집] 2024년 파리 패럴림픽 특사단
파리패럴림픽을 권리림픽으로! 장애인권리약탈자 고발하러 간다!
- 노들야학 파리 패럴림픽 특사단 집담회
대담, 기록, 정리 임당, 영희, 호범
2024년 8월 한여름, 한 눈에 보아도 꽤나 수상쩍은 무리가 오슬로, 베를린, 파리 유럽의 도시들 한복판에 등장했다. 머나먼 나라에서 온 전동휠체어와 수동휠체어를 탄 40여 명의 각양각색 장애 당사자들과 비장애인들.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모두 프랑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이 그려진 검은색 조끼를 입고 있다는 점이었을까. 이들은 어느 날은 지하철 바닥을 기어다녔고, 또 어떤 날은 광장과 박물관 바닥에 죽은 사람들처럼 누워 있었으며, 때로는 현지의 시민들 그리고 장애인 당사자들과 함께 영화를 보기도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결연한 표정과 단호한 목소리를 한 이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의 정체는 바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가 파견한 ‘파리 패럴림픽 특사단’. 40여 명의 장애인과 비장애인 활동가로 구성된 특사단은 8월 17일부터 31일까지 노르웨이 오슬로,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를 순회하며 한국 오세훈 서울시장의 ‘장애인권리 약탈’ 행태를 전 세계에 알렸다. 장애계의 오랜 투쟁으로 쟁취한 서울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공공일자리)의 일방적인 폐지 및 그에 따른 400여 명의 장애인 노동자 해고, 서울시 장애인 탈시설 지원조례 폐지로 대표되는 장애인 탈시설 자립생활 권리 약탈 등 오세훈 시장 취임 이후 벌어지고 있는 각종 장애인권리 약탈 현실을 알리고 바로잡기 위한 여정이었다. 특사단은 14박 15일 동안 매일 아침 오슬로, 베를린, 파리의 지하철 바닥을 기며 ‘stop 오세훈’, ‘against ableism(비장애인중심주의 철폐)’을 외쳤다. 또 도시 곳곳의 지하철 승강장에서 광장에서 다이인 행동을 했고, 각국의 한국대사관 앞에서 농성과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유럽 각국의 장애인 단체 및 기관 활동가, 전문가들과 만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이야기하고 연대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처럼 머나먼 낯선 유럽 도시들에서 벌어졌던, 매일매일의 일상이 투쟁이었던 이 험난한 여정에 노들야학의 임당, 영희, 호범도 함께 했다. 이들은 왜 익숙한 야학을 잠시 떠나 낯선 유럽행을 택했을까. 어떤 일들을 경험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왔을까. 그리고 이 투쟁은 각자에게 어떤 의미로 남게 되었을까. 이번 ‘파리 패럴림픽 특사단’ 여정의 이모저모에 대해 지난 12월 임당, 영희, 호범이 모여 나눈 이야기들을 노들바람에 남기며 보다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어 본다.
<가는 길>
임당 : 우리는 항공편부터 이야기해야 하지않을까, 영희?
영희 : 가는길부터 쉽지 않았다..
임당 : 중증장애인과 함께 해외 비행기 타기. 많은 사연이 있었는데요.
영희 : 호이스트 투쟁! 처음에는 공항에서 우리를 패럴림픽 선수단인 줄 알았어요.
임당 : 호이스트에는 어떤 일이 있었죠?
영희 : 거기에 들어가는 건전지의 재료가 쓰여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급하게 검색도 하고, 어찌저찌 하다가 보장구센터 같은데에 전화해서 물어봤어요. “같은 모델이 아니어서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지만, 항공사에서 말하는 폭발 위험이 있는 리튬은 아니다” 라고 해서 드디어 항공사에서도 승인해 줄 것 같은 말을 했어요. 그렇게 마무리가 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너무 위험해 보인다고 “포장해와라” 해서 공항 안에 있는 화물 택배사에 가서 박스 포장을 했어요. 그것도 무료는 아니고 개인 부담이더라구요. 화가 나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것이니, 가지고 가는 것이 중요하니, 했어요. 그러고나니 갑자기 “박스 바깥으로 손잡이가 튀어나온 부분을 감싸볼 수 있냐” 해서 그걸 또 뽁뽁이로 감싸오고. 그게 한두 시간 걸린 것 같네요.
호이스트 포장!
드디어 출발!
임당 : 들어가서 여유있게 커피도 한잔 하고 면세점 구경도 하나 했는데, 다들 호이스트를 끌고 계속 뛰어다녔어요. 들어가니 탑승 임박! 비행기 안에서는 어땠죠?
영희 : 김포장애인야학 학생인 중증장애인 이은혜님과 같이 비행기를 탔는데, 비행기 통로가 너무 좁아서 기내 이동용 휠체어가 너무 작기도 하고, 좌석은 맨 뒤쪽이어서 들어가는 길이 쉽지 않았어요.
임당 : 항공사들도 지원해 본 경험이 별로 없고, 장애인을 어떻게 대하고 지원해야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어떤 항공편은 장애인 우선 탑승, 어떤 항공편은 나중에 탑승하라고 하고 이를 우리가 하나하나 다 확인해야하는 불편함이 있었어요.
영희 : 기내용 휠체어도 하나여서 중증장애인이 2명 이상 탑승하면, 한명이 탑승을 마칠때까지 다른 사람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임당 : 그래서 장애인이 마지막에 탑승하게 될 경우, 마치 우리가 늦어서 이륙시간이 지체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죠. 승객들의 따가운 시선, 서양인들의 엄한 꾸짖음의 눈빛을 일정 내내 비행기에서 겪어야 했어요. 그리고 중증장애인 이동 지원에 따르는 신체 지원 등의 모습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 보이게 된다는 것들도 있어서, 비행기를 탈 때마다 우리 일행들은 화가 많이 났었습니다.
<노르웨이 오슬로>
임당 : 오슬로는 남호범으로 열어보죠.
호범 : 선발대로 전장연의 철균, 부모연대의 형덕과 전날에 먼저 도착해서 이동하는 경로와 접근성 등을 미리 같이 봤는데, 전체적으로 잘 되어 있다는 인상이었어요. 다만, 공항에서 역까지 오고 가는 기차에는 단차가 좀 있었는데요. 그래도 기차 안에 아예 리프트가 내장이 되어 있어서 승하차시 요청하면 직원이 와서 리프트를 작동해주었어요. 시내 교통은 대부분의 트램이 계단이 없었고 정류장 단차가 거의 없어서 휠체어 이용자가 다닐 때 크게 무리 없이 다닐 수 있었어요. 지하철역에도 엘레베이터가 필요 없을 만큼 경사로로 지상에서 승강장까지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었구요. 한편 개인적으로는 8월이었는데도 가을처럼 선선했던 날씨 그리고 아담하고 평화로운 오슬로의 도시 분위기도 많이 좋았던 것 같아요.
임당 : 영희는요?
영희 : 우선 호범이 우리를 데리러 올 때 반가웠어요. ‘드디어 누군가를 만나는구나.’ 계속 호이스트 투쟁 이런 것 때문에 너무 힘들었는데, ‘다른 일행들을 만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고. 사실 뭔가 어떤 준비를 잘 하고 간 것이 아니었잖아요. 오슬로는 주로 뭘 타는지도 몰랐고. 호범이 길 안내를 해줘서 잘 왔던 것 같아요.
임당 : 오슬로에서 우리가 해외 첫 지하철 선전전을 했잖아요. 사실 엄청 쫄아있는 상태로 시작을 했고. 잡혀가지 않을까. 해외에서 잡혀가면 어떻게 되는걸까 많이 움츠러들었던 것 같아요. 선전전 외에 포체투지도 계획되어 있었지만 모두가 긴장한 상태에서 시작했는데, 의외로 시민들이 환영하는 분위기로 우리를 맞아주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의 설움을 여기서 치유받는것 같기도 했고, 또 도시의 다른 특성들이 있으니 한국에서 시민들의 짜증과 오슬로 시민들의 여유가 다른 여러 이유들이 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어쨌건 시민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 맞다 라는 증거같은 것을 발견한 것 같기도 했어요.
영희 : 우리나라는 누가 투쟁하러 왔다 하면 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경찰이나 서울교통공사 직원 같은 사람들이 막으러 오는데. 거기서는 단 2명이 와서 우리를 살피고 상황을 파악하는 정도로 지켜보더라구요. 그러다가 밀양센터 박상호 소장님이 오슬로 경찰들 앞에서 갑자기 포체투지를 하셔서 전장연 활동가들이 “사진만 잠깐 찍을 수 있게 시야를 차단해라”고 해서 우리는 “알겠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은 보아도 별 반응이 없고, 이동의 한 모습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충격과 짜릿함이 있었어요.
역 광장에서 선전전 및 발언을 한 후, 지하철 내부로 들어가 선전전을 진행 했다. 처음엔 형숙과 빵빵이가 포체투지를 했고, 밀양의 박상호 소장님이 대범하게 포체투지를 크게 진행했다.
호범 : 며칠 뒤에 우리로 따지면 서울교통공사인 루터(RUTER)를 갔었잖아요. 면담에 앞서서 우리가 며칠 동안 오슬로 곳곳에서 진행했던 지하철 선전전 등에 대해 별 얘기를 안 한 것도 신기했어요. 아무튼 루터에 갔을 때 기억에 남는 것은 루터에서 중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서 진행하고 있는 장애인 접근성 프로젝트였어요. 담당 직원도 시각장애 당사자였던 점도 인상적이었는데, 담당 직원이 이러한 프로젝트가 단순히 서비스나 복지정책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의 조문들을 근거로 진행하고 있다고 이야기 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단순히 본인들의 성과를 보여준다기 보다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 기준에 따르면 여전히 오슬로 역시 시내 중앙을 제외하고는 오슬로 광역권의 80~90%가 장애인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고백했던 점이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오슬로에서도 장애인들한테 계속 대중교통 이용료를 받고있지 않았는데, 이것이 단순히 복지적 측면보다도 자기들이 정당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데 돈을 받는게 더 불평등한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그런 관점을 공사 직원들이 하는게 꽤나 신기했어요.
영희 : 우리나라는 잘한 것만 말할텐데…
호범 : 접근성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장애인 당사자 그룹과 소통하면서 진행을 하는 등 이런 것들이 서울교통공사와 비교가 많이 되었어요. 지하철역이 엘리베이터가 거의 없이 경사로였잖아요. 어째서 그렇게 오슬로 지하철역들이 설계된 것인지도 이야기해 줬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래요. 엘리베이터는 고장이 많이 나서 아예 6~70년대에 모든 지하철역을 리모델링해버렸다고.
임당 : 땅이 넓고, 땅에 비해 인구수가 현저히 적은 것도 그런 경사로 위주로 세팅할 수 있는 이유였던 것 같기도 해요. 아무튼 서울이 굉장히 밀집된 도시다 라는 것을 이번에 큰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계속 확인했던 것 같아요.
엘리베이터가 아닌, 경사로로 되어 있던 오슬로 지하철 내부
임당 : 그리고 농성 얘기와 스태피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영희 : 노르웨이 한국대사관 앞에 텐트 10개를 치는 게 우리의 유럽투쟁 농성의 시작이었는데요.
호범 : 우아한 저택가들 사이에 텐트를 쳐버렸죠. 심지어 왕궁 앞이었는데.
영희 : 거기도 구역이 중요해서, 도로는 절대 안되고, 대사관 건너편 인도만 된다고 해서 열동을 다 못쳤던 것 같아요. 다섯동 정도 치고. 야간사수와 주간사수가 있었고, 매일 저녁 식사를 그곳에 모여서 당번들이 사온 간편식 저녁을 먹으며 투쟁 총화의 시간을 가졌어요. 생각해보면 노르웨이 때 제일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총화나 그런 것들이요. 첫날엔 투쟁 기획을 하고, 단체 방문할 때 질문도 같이 만들고 이런 것들 역시 첫 방문 국가였던 노르웨이에서 가장 잘됐던 것 같아요.
호범 : 그쵸. 노르웨이 땐 아예 대사를 봤죠. 도망치는 대사를…
임당 : 그리고 그 농성을 반겨주던 동네 시민들. 6시 전에 시끄러운 것이 끝나면 뭘해도 괜찮다고 했다고 하고. 지나가다가 눈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고 응원해주는 동네 주민들이 있었어요. 한국 대사관만 우리를 반기지 않았던.
호범 :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현지 교민분들도 응원하러 몇분 오시기도 했어요.
노르웨이 한국대사관 앞, 농성장 모습과 매일 저녁 총화하는 모습
보좌관에게 서안을 전달하는 규식 대표님
차 안에서 특사단원들을 보고 도망가는 한국 대사
임당 : 그리고 특수교육기관인 스태피드가 방문했던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호범 : 우리로 치면 국립특수교육원 같은 데서 운영하는 특수학교였죠. 그런데 단순히 특수학교가 아니라 청각, 시각, 발달 중복장애인 학생들. 즉, 최중증 중복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곳으로 국가에서 운영하고 지원하는 곳이었어요.
영희 : 그때 이야기했던 것들 중에 하나는, 특수학교가 점점 줄어들고 있고. 한국과 다른 점이라고 하면 한국은 학령기에만 집중되어 있는데, 노르웨이에서는 전 생에에 걸쳐서 삶을 함께 계획해본다는 점이 좋았어요. 그렇지만 결국 똑같았던 것은 장애인의 취업률은 낮다는 부분이었지만. 거기도 굉장히 산에 있었잖아요. 찾아가는 것이 진짜 힘들었는데. 이런 것은 다 똑같구나 했어요. 찾기 어려운 곳에 있는 특수학교.
호범 : 설비나, 학생 한 명에 교사 두세 명씩 지원되는 이런 것이 한국의 야학이랑 비교하긴 어렵지만 한국 특수교육 상황과 비교했을 때 말 뿐인 개별 지원화 계획이 아니라 정말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특수교육이 실현가능한 것을 본 것 같아서 인상 깊었어요. 또 복도 한 복판에 있던 클라이밍 수업과 도구가 있는 것이 기억에 남아요. 클라이밍을 같이 조력자랑 하면서 학생들이 어떤 것을 경험하고 또 느끼게 한다고 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장애 특성상 촉각으로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을 하는데,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또 누군가 뒤에서 받쳐줄 수 있다는 그런 감각과 경험들이 여기선 중요하게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영희 : 그게 한 끗 차이인 것 같아요. 장애극복과 시도의 한 끗 차이. 그걸 어떻게 구별할지는, 그리고 주변에 있는 조력자나 사회 인식인 것 같은데. 장애극복 차원이 아닌, 장애인이기에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해보는 것을 강조했던 것. 그것이 우리나라와 다른 한 끗이었다고 생각해요.
스태피드 복도 한복판에서 진행하는 클라이밍 수업
스태피드 외부에서 기념사진
<독일 베를린>
호범 : 베를린 공항에 도착해서. 우리 셋은 비행기에서 다 내렸었고.
영희 : 김포팀과 희은이 비행기에 있었죠. 항상 이동할 때마다 쉽지 않았던.
호범 : 첫인상부터 안좋긴 했어요.
“8월 21일 오후 파리 패럴림픽 특사단(아래 특사단) 소속 중증장애인들이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공항에서 비행기 하차 중 강제로 활동지원사들로부터 분리를 당하는 장애인 차별을 겪었다. 노르웨이항공사와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 측은 비행기에서 공항으로 이동하기 위해 탑승해야 하는 리프트 및 차량의 공간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온 활동지원사들의 지원을 제한했다. 특사단은 비장애인 2명이 5명의 중증장애인을 하차 지원하라는 항공사와 공항 측에 항의했지만, 공항 직원은 경찰을 불렀다. 출동한 공항 경찰들이 비행기로 들어왔고 출동한 공항 경찰들은 비장애인들의 신체를 밀거나 위협하며 강제로 하차시켰고 여권을 수거해가기도 했다. 경찰은 “장애인 때문에 항공기가 지연되어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했다.결국 한 명의 장애인의 활동지원사를 제외한 모든 비장애인들이 비행기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 후 항공사 측이 특사단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경찰이 쫓아낸 비장애인을 비행기로 다시 탑승시키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장애당사자들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해 목 톡증을 호소하기도 했다.”
출처 : 비마이너 <베를린 공항, 중증장애인 활동지원사 강제 분리… 특사단 “명백한 장애인 차별”>
베를린 공항, 노르웨이 항공 소동
긴 비행기 내부에 갇혀 있다가 나온 특사단원들
영희 : 우여곡절 끝에 다음날 첫 선전전에서 새롭게 합류한 쌩쌩한 박경석 고장샘과 명희를 만나니 온도가 너무 달랐어요. 베를린 첫 선전전은 점점 피로가 다 쌓여서요. 그날 밤에 공항에서 나오고 각자 숙소에 가니까 새벽이었는데 그렇게 피로가 쌓인 채 소통에 오류가 나고 갈등이 나고 했던 것이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장애인 객실이 있는 숙소에 있었는데, 거기에 모든 짐이 다 있어서 이걸 다 어떻게 지고 가나 했는데, 어찌저찌 겨우겨우 지고 갔더니 “이걸 왜 다 가지고 왔냐” 라고 하더라구요. 그러다가 서로 갈등이 생겨나고, 또 중재가 되고…
임당 : 힘든 하루였죠. 그날 그래도 T4지역에도 방문하고.
호범 : 그곳에서 처음으로 영희가 사회를 봤죠.
영희 : 갑자기 두 곳에서 사회를 봐야 한다고 해서. 어찌어찌 봤는데, 뭔가 독일시민들의 민감한 이야기들이 있어서 그런 이야기를 피해가며 사회를 봐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리고 갑자기 독일 한국 대사관 앞에서도 농성이 시작되고. 농성 선포 기자회견을 했고. 거기 안에서도 어디에 농성을 치는지가 관건이었어요. 점점 공권력의 개입 강도가 빡세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임당 : T4 지역에 가서 함께 다이인도 했었는데.
호범 : 기억에 남는 것은, T4라는 것이 결국 장애인 집단 안락사를 주도했던 연구소 주소잖아요. 지금은 그런 건물 흔적이나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투명한 파란색 유리창처럼 생긴 공공미술 작품과 앞에 설명들 써있는 것들을 읽으면서 실감이 났던 것 같아요. 거기에 자세히 보면 희생자들 몇분 이야기가 소개가 되어있었거든요. 그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우리가 매일매일 투쟁 현장과 집회에서 T4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들이 떠오르면서 연결되기도 했구요. 실제로 그런 참혹한 역사적 현장에서 기자회견이랑 다이인 행동 했던 것이 여러모로 저한테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흔적이 이렇게라도 남겨져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쌩쌩한 명희와 고장샘. 베를린에서의 첫 지하철 행동
T4 위령비 앞에서 기자회견 및 다이인 행동
독일 한국 대사관 맞은 편 농성장 및 야학 교사들
임당 : 저는 두 분 다 못 왔지만 브란덴브루크문 앞에서의 기자회견이 기억에 남고요. 제가 유럽 투쟁 중 발언을 한번 했던 곳이기도 하고, 정말 관광객과 시민들이 많은 광장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자회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려고 시선을 주고 멈추고 이야기를 듣고 박수와 응원을 보내주고 했던 곳이었어요. 거기서 서울에서 오세훈 시장의 탄압으로 권리중심일자리 없어지고 해고복직투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서울의 이야기를 왜 유럽에서 해야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나름대로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국제적으로 지탄받아야 하는 장애인 권리 탄압의 나쁜 정권을 알린다! 그러면서 그가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려고 하는 국제적인 활동에 개입한다는 의미.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권리중심 일자리가 없어지고, 제 활동의 중요한 기반을 잃은 채로 2024년 한해를 어렵게 보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여기까지 와서 또 이야기를 나누고 호소한다라는 것이 저에게 굉장히 필요하고 중요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기자회견 끝나고 다이인을 했는데, 누워서 보는 브란덴브루크문의 힘찬 말들의 모습이 다들 좋았다고 이야기도 나눴어요.
브란덴브루크문 앞 기자회견 및 다이인 행동
영희 : 레벤스힐페 방문 이야기도 해보면, 독일의 굉장히 유명한 발달장애인 관련 기관이었고. 그런데 가서 만나보니 대규모의 보호작업장과 장애인시설을 같이 운영하는 곳이었어요. 당사자분이 수용시설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여쭤봤는데, “자기가 누구와 살지를 결정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설이 아니다”라는 답을 했지만. 이후에 현지 통역으로 자원해주신 진헌님이 되게 유명한 시설이고 홍수나 폭우가 쏟아졌을 때 인명사고가 일어났던 곳이어서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지만, 산 높은 곳 등으로 시설을 옮겼다고 전해주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관련한 다큐를 준비하고 있다고도 이야기를 해주셔서 충격적이었어요.
호범 : 여기가 부모 당사자 조직이었는데, 한국에서도 부모회 단체들에서 시설과 작업장을 운영하는 곳들도 있긴 해서. 일자리나 이런 것 이야기할 때 간극이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권리중심일자리 이야기를 하고 탈시설 이야기를 할 때.
영희 : 비장애인 중심의 노동시장에 장애인이 들어가는 이야기를 계속 했어요. 그리고 또 놀라웠던 것은 T4사건을 겪어 1세대 정도는 장애인 없는 시절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충격적이었어요.
레벤스힐페 방문
임당 : 독일장애인인권영화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마르크스가 동문으로 있는, 훔볼트대학 대학원생 분들이 도와주셔서 유서 깊은 장소에서 열 수 있었고, 거기서 <시민여러분 반갑습니다>, 노들노래공장 다큐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 상영도 하고. 영희가 사회도 봤었잖아요.
영희 : 우선 너무 더웠고, 독일은 에어컨이 정말 없었어요. 에어컨이 정말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부채질을 하며 끝까지 영화를 봤어요. 뭔가 우리의 영화를 해외에서 튼 첫 영화였잖아요. 그런 부분이 좋았던 것 같고. 한국 사람들인데 유학을 오셨거나 이민을 오셨던 분들이 많이 오셔서 본 것이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 이러한 일들이 있다. 사회를 볼 때 좀 아쉬웠던 것은 브릿지 멘트들을 많이 하고 싶었는데, 통역이 있다보니까 써드렸던 대본에 있던 말만 했던 것들이 아쉬웠던 것 같아요.
호범 : 전반적으로 한번 거친다는 것이 쉽지 않았죠.
영희 : 그리고 사실 노노공에 나오는 영화를 또 되게 궁금해하셨는데. 그 일자리 자체나 현재 해고 상황에서의 투쟁 내용 등. 그때 노노공 당사자들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임당 : 노노공 노래집을 많이 팔았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가져갔어요.
호범 : 교민 몇분이 사주신 것 같고.
임당 : 영화제 끝나고 루스트정원 잔디밭에 누워, 한인 유학생 분이 만들어주신 비건 대구가 들어간 도시락을 먹었어요. 거의 유일하게 다같이 여유롭게 쉬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영희 : 그때 한식으로 김치찌개가 나온다고 해서 다들 기대했는데, 솥밥? 자카메에 가까운 음식이 나와서 놀랐어요.
호범 : 한식은 프랑스에서만 먹은 것 같아요.
임당 : 그때 사진이 윈도우 배경화면처럼 나왔어요.
노노공 노래집 구매
잔디밭에서
호범 : 그리고 다음 날 소녀상도 다녀왔어요. 그래서 영화제에 오신 교민 분들도 소녀상 앞에 간다고 하니, 같이 오셨어요. 소녀상이 철거된다고 해서 갔어요.
영희 : 그때 소녀상 앞에 일찍 도착했는데, 도착한 사람들은 휴식을 즐기면서 맥주를 사먹었어요. 이윤아 국장님이 너무 싸다면서 마트에서 다 사주셨어요. 소녀상 앞에서 구호도 외치고, 주민들도 막 나오셔서 같이 사진도 찍고.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오시더라구요. 그게 주택가 쪽 무슨 공원 옆에 있었는데, 그래서 찾아가는 사람은 쉽지 않지만, 소녀상이 주민들 속에 있는 느낌이었어요.
소녀상 앞에 모인 사람들
<프랑스 파리>
호범 : 파리에 도착하자 마자 공항에 고립되었어요. 테러신고가 있어서.
임당 : 폭발물이 발견 되었다고, 오를리 공항에 고립이 되어서.
호범 : 거의 2시간 동안 고립이 되었어요. 고장샘 샤워 휠체어도 짱박혀서 어디로 나왔는지 직원들이 모르고 그걸 또 찾고 그랬어요.
영희 : 은혜님 조는 또 호이스트 붙이기 투쟁이..
임당 : 그래서 상현님이 손가락도 다치고 피가 뚝뚝. 피 자국을 따라서 상현님을 찾으러 갔는데, 공항에 응급 조치를 받을 곳이 없어서 대충 약국에서 밴드를 감고 비행기를 탔어요. 그러면서 호이스트가 정말 위험한 물건이라고 공항 직원들이 부치지 않는 것이 있었어요. 직원끼리도 싸우고, 우리끼리도 싸우고 그랬어요. 우리 항공사 직원이 와서 보증을 해줄 때까지 1시간 정도 대기를 해서 보딩 타임이 빡빡해 달리기를 해야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또 늦게 와서 우긴다고. 아시안 설움이 있었고, 언어의 한계로 조금만 말하면 경찰을 부르는 공항의 분위기가 있었어요. 은별도 아기물 반입으로 싸우고.. 그래서 경찰을 호출하고..
임당 : 우리가 항상 선전전에 우드락 사이즈의 선전물을 사용하는데, 이걸 어떻게 가지고 갈까 생각을 했는데, 가운데를 접어서 가지고 온 전장연 활동가들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다양한 선전물을 가지고 가서 우리도, 한국에 있는 사람들도 놀랐지. 그리고 우리가 아침선전전을 하고 에펠탑을 보러 갔죠. 저는 사실 프랑스의 낭만에 오글거리는 사람인데, 에펠탑은 아름다워서 이것이 파리구나, 프랑스구나 생각했어요.
영희 : 호범은 어땠어요?
호범 : 저도 파리 센강 걸을 때가 좋았어요
영희 : 그땐 좋았는데..
임당 : 사진 봐. 호범도 건강하고. 이때 많이 걸었죠.
독일에서 프랑스 가기 위한 호이스트 투쟁
이때까진 행복했던 자유시간
호범 : 프랑스 혁명 등 유명한 곳, 책으로만 보던 곳을 볼 수 있었어요. 치안 걱정을 많이 했는데, 올림픽 주간이라서 괜찮았어요. 가기 전에 찾아보니 프랑스 정부의 거리 청산 등의 것도 있어서 좋으면서 씁쓸한.. 날씨가 좋았어요.
임당 : 유럽의 햇살이 달랐어요. 건조하고 쨍하고.
호범 : 그러고 아마 한국대사관에 간 것 같아요.
임당 : 아니야. 우리 아침 선전전하고 간 분수에 갔어
호범 : 갔다가 간 것 같아요.
영희 : 사진을 보면 대사관을 갔던 것 같아요
호범 : 버스기사가 우리도 알고 있다, 전장연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 윤석열, 오세훈 나쁘다고 하면서 버스 정류장도 아닌데도 우릴 데려다 주었고.
임당 : 대사관 중에 우릴 유일하게 실내로 들여보내주고, 우리의 서안도 받아준 곳.
임당 : 일정이 분수에서 기자회견하고, 다음 날 대사관을 간 일정.
영희 : 저는 기자회견 때 사실 너무 졸려서 잠을 잤고..
호범 : 텐트 10분을 치고
임당 : 다이인도 하고
영희 : 갑자기 분수에 올라가라고
임당 : 이노상 분수 틀에 올라가라고
영희 : 그래서 경찰들이 한국처럼 제지를 많이하고, 우리는 사진을 남기는 사람. 그래서 사실 매일 아침 선전전을 하고 그 분수에 가서 총화를 하고 각자 일정을 다녀오는 루틴이었어요. 그 분수가 유명하다고? 혁명이 있었다고? 해서 갔던 것으로 기억이 나요. 사실 너무 작은 분수라고 생각을 했는데, 파리에서는 큰 분수에 속한다고 달님이 이야기 해주셨던 것 같아요. 달님과 원우님, 그 파리남성
임당 : 올림픽 반대운동하는 활동가
영희 : 맞아요. 그들이 발언하고 그날 그 기자회견에 함께 해줘서 좋았던 것 같아요.
파리 한국대사관 가는 길
파리 한국대사관에 서안 전달
영희 : 대사관 갔다가 면담 장소 가는 길에 페르라세즈 묘지에 갔어요
임당 : 유럽의 전통적인 묘지. 꽤나 유명한 사람들이 많았고 한국의 방식과 달랐어요. 밥을 먹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도 있었고, 앞에서 묘지 지도를 나눠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면담은 파리 구청에서 이루어졌는데 번역하면 ‘자폐인의 열쇠’라는 이름의 단체였어요. CLE단체. 이때 사람들이 되게 흥미로웠던 부분은 우리나라에서 자폐를 스펙트럼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협소하게 지원이 되고 등록이 되는게 있는데, 유럽을 돌면서 유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자폐가 스펙트럼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지원을 하는 것.
호범 : 자신에게 필요한 지원을 하고. 등록되었냐 아니냐는 기준이 아니라 개인의 지원, 필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있었어요.
영희 : 그때 사실 큰 단체, 뭔가 지원을 많이 받는 곳만 면담을 했는데, 정말 비영리 단체를 만나서 뭔가 더 자신들의 하고 싶은 운동을 비교적 많이 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거기 상근 활동가가 생긴지 얼마 안되었고, 그런 것들이 많이 있었던.
임당 : 그리고 14호선만 있던 지하철. 파리의 새로 생긴 14호선 이외에는 휠체어 장애인이 탈 수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14호선 근처에서만 시위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지하철도 올림픽을 앞두고 급하게 만든 지하철이었어요.
호범 : 그래서 다른 이동을 할 때는 버스를 탔어요. 고장샘은 중간에 그냥 사람들이 들어서 탔던 것 같아요. 유람선은 휠체어가 탈 수 있게 되었으나 1층에만 있어서 관광을 할 수 없었고, 그리고 휠체어 광고, 접근성 등을 홍보했지만 실제론 접근이 어려웠어요
임당 : 아침 선전전에서 포체투지도 계속 진행했고 주로 지하철 안에서 칸 별로 사람을 나눠서 진행을 했어요. 중간에 봉이 있어서 건너가기가 어려웠던 상황.
CLE 방문
파리패럴림픽 때문에 만들어진 14호선 안에는 봉이 중간중간 설치되어 있어, 포체투지하기 좋지 않았다
최근에 만든 14호선을 제외하고 파리 지하철에는 높은 단차로 인해, 경사로를 필수로 깔아야 한다
임당 : 루브르 박물관. 원래는 모나리자 그림 앞에서 다이인을 하기로 했는데, 인기가 많아서 통제가 심했고 그래서 바로 바꿔서 ‘민중을 이끄는 여신’ 그림 앞에서 다이인을 하게 되었는데요. 저는 처음 들었을 때 ‘왜 모나리자?’라는 설득이 안된 것이 있었는데, 바뀐 것이 잘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공간도 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적합한 곳이었다고 생각해요.
영희 : 다이인을 할 때, 그 엄청 많은 사람을 짧은 시간에 다 내보내고 뭔가 막는 직원들이 있었는데, 테러 같은 것이 많은 나라라서 그런가? 이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나라는 그 사람들을 내쫓는 데, 여기는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 내쫓고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놓고 고립시키는 것이 같은 고립인데도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호범 : 매뉴얼화가 돼 있던 것 같았어요. 당황하지 않고. 유럽은 환경운동가들이 작품에 던지기도 하고, 테러도 있고 그래서 그런 것 같고. 카메라도 막고 굉장히 위협적이었어요. 안에 사람은 괜찮은지 걱정도 되고. 한국인 직원이 와서 나라 망신 시킨다는 식으로 말한 것도 이상했고.. 안에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고립되었던 것 같아요.
임당 : 젠틀하게 우릴 보낸 것 같으나, 그 이후 경찰이 계속 우리를 쫓아 다니면서 괴롭혔어.
영희 : 그래서 에펠탑을 정말 질리도록 봤어요. 평생 볼 에펠탑을 다 본 것 같아요. 그때 활보로 한 명씩 붙어서 들어오라고 해서 갔는데, 무슨 화물 엘리베이터에 우리를 태우더라구요. 그래서 타고 직원 쪽문 같은 곳으로 우릴 내보냈는데, 그러고 흡연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다른 동지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경찰이 저희 바로 앞에 내리더라구요. 그래서 나는 담배를 피우면 안되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박물관에서 테러를 하지 않았냐는 식으로 물어보고 그때부터 약 2시간 정도 따라다니고 여권도 다 달라고 하고, 센강에서 계속 우리를 붙잡고, 스티커도 붙이면 안된다, 자기들 따라서 와라, 화장실도 못 간다, 핸드폰으로 사진도 찍지 말라 등의 통제가 있었어요.
호범 : 마지막에 패럴림픽 개막식 앞 버스정류장 까지는 왔는데, 군인들이 총을 들고 와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러고
영희 : 가방 검사도 하고
호범 : 자유와 혁명의 나라가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루브르 박물관 다이인 행동
경찰과 대치 및 가방 검사
질리도록 에펠탑을 보았다
임당 : 저는 같은 시간대에 파리한국장애인인권영화제를 했어요. ‘일로 만난 사이’ 상영하고 호경 감독님과 이야기 손님을 하고. 전날 면담을 한 CLE에서 자폐 당사자 분이 참석을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작은 인연을 소중히 해주신 것 같아요. 같이 특사단 지원을 해주던 한인 분이 엄청 맛있는 시그니처 빵을 사와주셔서. 크로와상, 뼁오쇼콜라를 잔득 사오셔서. 점심을 먹지 못하고 갔는데 맛있게 나눠먹은 기억이 있어요. 통역을 도와주신 사회학 전공을 한 분도 영화제에 오셨다가 식사도 같이 하시고. 어딜 가거나 면담에서 만난 분들이 환대해주시고, 간식도 많이 챙겨주시고 이후 행사에도 참여해주시고. 통역하신 분들도 많이 함께 해주시고 그런 것들이 많이 고마웠어요. 야학에도 많은 분들이 찾아오고 그러는데 같이 간식을 챙겨먹고 작은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배웠던 것 같아요.
임당 : 그리고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마지막 문화제! 노들노래공장 객원 보컬 남호범과 함께 노노공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노래를 너무 많이 준비해서 사람들이 힘들었던 것 같은데, 개인 단위로 여행을 간다면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우리가 만든 노래를 부르고 한 것이 좋았는데 우리만 누린 것이 많이 미안했던. 객원 보컬 호범은 어땠나요?
호범 : 노래들의 임팩트가 다 강해서. 파리의 택시운전사, 형덕의 나는 나비
임당 : 만수 피셜 최고의 커버
호범 : 아기자기하고 좋았던 것 같아요
임당 : 우리끼리 일정을 보내고 마무리하는 것도 중요하니깐. 보는 사람이 많진 않았고.
영희 : 저는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았고, 뭔가 진짜 문화제 느낌이 있었고, 그 지나가던 아기가 와서 춤추는 것이 뭔가 정말 마무리 느낌이 있었어요. 그리고 끝나고 갑자기 그린라이트도 하고 식당에도 갔는데, 많은 분들이 울었던 것 같아요. 달님도 울고, 어진님은 울진 않았지만 입술이 터질 때까지 독일에서부터 일정을 같이 했는데, 한국을 떠나서 한국에 있는 이슈들, 활동들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는게 있는데, 그런 이들이 이곳에 온다고 하니 그 기간동안 같이 하고 싶었다고 하시더라구요. 제가 ‘힘들어 보이는데 왜 이렇게 쉬지 않고 계속 오시냐’고 하니 하신 말씀이었어요. 그래서 자기는 우리가 온 2주가 너무 좋았다, 또 왔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저도 피곤함이 많이 날라가는 기분이었어요.
호범 : 입술이 다 트고 수포가 올라온 것이 기억에 남아요. 어진님의 모습이. 몸과 마음이 달랐던. 사람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아요. 그들이 다 도와줬고, 세상에 참 멋있는 사람이 많다고 느꼈어요.
영희 : 맞아요. 상현님도 캐나다에서 여기까지 오시고, 손도 다쳤는데 알아서 해결하고 싶어하고 그런 것들이 우리를 더 열심히 투쟁하게 하는 것 같고, 저는 파리 다녀와서 항상 한국에서 기계처럼 외치던 것들이 더 와닿더라구요. 연대가 중요하다, 장애인에게 권리를 달라 이런 오랫동안 외친 문구들이 ‘정말 경험에서 만든 문구구나’를 생각했어요.
임당 : 마무리 멘트를 하자면 영희가 이야기 한 것과 비슷한데, 처음에 특사단을 가고 싶다고 했을 때는 유럽의 많은 것들을 배워와야지 생각을 했는데, 한국의 장애인 운동의 맥락에서 하고 있는 권리중심 일자리나 전장연의 끈기있고 직접적인 투쟁이나 이런 것들을 알리고 같이 하자는 것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는 나 개인을 장애운동으로 조직하는 상황이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당시에 지지 받지 못한 지하철 투쟁들에 대한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하는 것들의 단서들을 찾기도 했고, 포체투지를 하는 장애인 당사자들이 멋있다고 생각을 했으나 나에게 닿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파리에서 형숙소장님이 포체투지를 하는 걸 지원했는데, 그때 활동가들의 깊숙함을 느끼면서 눈물을 많이 참으려고 했어요. 연수의 개념도 있지만 우리의 활동을 다시 점검하고 느끼기 위해서 필요한 것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보내준 조직에 고마운, 미안한 마음을 느꼈어요.
광장에서 노노공 공연을 7곡이나 했다!
<다녀와서 각자 생각나는 에피소드 하나씩-**>
호범 : 한국 공항에 도착했는데, 호범의 배낭이 파리에서 오지 않은 것.
임당 : 이번 첫 해외투쟁을 통해서 한국 장애인 운동의 세계관 확장이 중요한 순간들. 상현님이 캐나다에서 장애인권영화제 상영, 달님이 파리에서 전장연과 노들야학을 연결해서 전시를 하신 것. 내년에도 이 인연으로 해외 영화제 상영, 이후 일본 특사단 참여 등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기대가 됩니다!
영희 : 고장샘이 독일에서 포체투쟁 중, 주머니에서 터진 요거트.
소중한 인연들
*사진 출처는 2024파리패럴림픽특사단 경석, 형숙, 규식, 상호, 가영, 선희, 성주, 금문, 희은, 형덕, 정한, 혜인, 지원, 혜란, 재민, 주누, 철균, 푸름, 혜민, 민혜, 은별, 은혜, 한두, 동재, 주영, 하윤, 대영, 윤아, 임당, 영희, 호범, 호경, 아영, 소영, 형진, 일, 남휘, 윤지, 조운, 명희. 총 40명의 활동가의 기록입니다. 특히 사진기록자 소영과 영상기록자 호경, 아영의 기록물이 많이 사용 되었습니다.
**더불어, 특사단 일정 동안 통역 및 현지 도움으로 상현, 어진, 진현, 달, 원우, 윤경, 노아 등 많은 연대자들 덕분에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