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겨울 125호 - [노들아 안녕] ‘무용(無用)’한 것을 고민하는 사람들 /김윤교
노들아 안녕
‘무용(無用)’한 것을
고민하는 사람들
김윤교
무용(無用)하다는 말은 가히 폭력적입니다.
‘쓸모없다’는 표현을 無用, 이렇게 한자어로 표현하더라도,
그 폭력성은 은폐되지 않습니다.
무용하다는 타인의 평가 아래에서는 어느 누구도 당당할 수 없습니다. 무용하다는 평가는 개인으로 하여금, 언제나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보며, 조금 더 ‘유용’해질 것을 다짐케 만듭니다. 삶을 바치는 투쟁이 힘을 잃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무용한 것을 참 좋아합니다.
집에 틀어박혀서 소설을 읽는 것, 그것을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
요즘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입니다. 무용한 고민들은 언제나 저를 즐겁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취업 걱정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타인의 우려는 제가 좋아하는 일들이 쓸모없다는 그들의 생각을 정제해 표현한 것에 해당합니다. 사회의 모순은 외면한 채 취업을 걱정하는 소시민으로 전락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유용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타인의 충고는 모든 이를 소시민으로 만들어냅니다. 보다 사회에 적합한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감정표현을 최대한 자제하는 것, 최대한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 무용한 것에는 하등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이 되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사람보다는 인간이 되기를 종용받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개인의 특수성은 모두 경시되고,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타협적인 말만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하등 신경 쓰지 않는 현대사회는 이미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노들은 조금 달랐습니다.
노들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 귀 기울였고,
또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노들에서 저는 세상의 입장에서 무용해 보이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따뜻한 섬세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노들 음악대 수업을 참관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제가 수업을 참관하며 느꼈던 것은, 노들은 정말 어느 사람의 생각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업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수업 중 한 분이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저와 달리 학생과 선생님은 박수를 치며 호응을 했고, 노래가 끝난 후에, ‘수업이 진행 중이니 나중에 수업 끝나고 시간이 남으면 노래를 부르도록 하자’라며 학생 분이 자리에 앉도록 독려하였습니다.
사람들 각각의 생각이 자연스레 행동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 사람들의 생각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체계적으로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제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노들의 모습은 흡사 ‘좌충우돌’이라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언제나 정확하게 수립된 것은 변경되고,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며 진행됩니다. 사람들의 사정에 따라 노들의 수업, 행사 그 모든 것은 상호적으로 변경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혼란스러운 것과는 다릅니다. 이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 나아가 계획대로 되지 않음을 즐기는 것, 노들의 좌충우돌은 즐겁고 또 새롭습니다.
노들에서 무용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로 쉽게 넘어가지도 않습니다. 사소한 문제들은 노들에서는 중요한 시발점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귀 기울이면서도 노들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지금의 모습은 현대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무용한 것에 신경 쓰다가는 나라가 망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지금껏 무용한 것에 신경을 써보긴 했는가.
그렇게 해보지 않아 모르는 것 아닌가.
좌충우돌 넘어지면서도 진행되는 노들에서의 삶은 바로 그 해답을 제공하는 듯합니다.
노들이라는 공간에서 무용한 것들을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들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 귀 기울였고,
또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노들에서 저는 세상의 입장에서 무용해 보이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따뜻한 섬세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