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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격당한 우리를 위한 초상화

 

 

박은영 │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다 백수가 되었을 때

장애여성 친구들을 만나 장애학에 맛을 들인 뇌성마비 장애여성.

장애학 연구를 더 하고 싶어서 다신 안 돌아가겠다던 대학원에 들어와

오늘도 칙칙한 연구실에서 단조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노들책꽂이_홍은전.jpg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아래 <변론>)은 개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항상 집단을 대표하는 기호로만 소비되는 ‘실격당한 자들’의 복잡다단한 일상을 한 폭의 ‘초상화’처럼 그려낸다. 저자는 시간을 농축시켜 덧칠하듯 한 존재를 표현하는 초상화처럼, 사람도 긴 시간과 다양한 각도를 통해 인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73쪽).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단순한 기호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만저만 피곤한 일이 아니다. 드러난 면만 파악하기도 바쁜 세상에서, 고운 붓으로 수십 번 덧칠한 ‘한 길 사람 속’을 읽는 일은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가.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내 속에 숨어 있다가 예고도 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단층들조차 낯설 때가 많다. 내 안에는 아직도 언어화되기를 기다리며 잠영 중인 수많은 결들이 꿈틀대고 있다. 그런데 김원영은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초상화를 그려보겠다는 듯, 거의 모든 순간 세밀하게 붓끝을 놀린다. 나 하나만 도 다독이며 가기도 벅찬 인생에서 이 무슨 무모한 ‘허세’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이 ‘허세 가득한’ 분홍색 책의 모든 페이지를 한 땀 한 땀 공들여 읽었다. 그가 그려낸 우리의 초상화와 내 속에서 잠영하던 얼굴들이 만나 새로운 오름들로 융기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축적되어있는 단층들은 먼저 수면 위로 올라온 다른 사람의 단층에 의지하여 모습을 드러낸다. ‘장애여성’이라는 단어를 마주치고 장애여성들이 세밀하게 묘사해놓은 삶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장애여성으로서의 내가 비로소 첫 숨결을 내뱉었다. 장애로 인한 신체적 고통을 공개적으로 발설해준 사람들 덕분에, 나의 고통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김원영의 글 또한 정곡을 찌르며 나의 속 깊은 부분들을 언어화시킨다.


나의 단층과 최초로 만난 <변론>의 언어는 ‘우아함’이었다. 저자는 ‘우아한 품격’을 지키려는 장애인들의 전략을 책 전반에 알알이 박아놓았다. 사실 ‘우아한 장애인’이란 말은 ‘소리 없는 아우성’만큼이나 역설적인 표현이다. 저자는 우아하게 한 손에 커피잔을 들고 1.8초 간격으로 휠체어를 민다. 나는 원피스를 차려입고 의사가 금지령을 내릴 수도 있는 샌들을 신고는, 발목 한두 번 휘어지는 것쯤은 아랑곳 않고 ‘내 나름대로는’사뿐사뿐 걷는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 모습을 우아하다고 생각할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언제든 어디엔가 걸려 균형을 잃을 수 있고, 그 순간 우리의 자세는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아함을 완성하는 순간은 바로 그다음 순간이다.


우리의 품격은 휠체어가 배수로에 걸려 고꾸라질 때 잽싸게 손으로 짚고 올라오며 “방금 각도 좋았음?”이라고 허세를 부릴 때, 보도블록 틈에 걸려 휘청일 때 잽싸게 친구 어깨를 움켜쥐며 “방금 내가 잠 깨워줬지? 졸다 넘어지면 큰일 나!”라고 능청을 떨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다. 우리가 부리는 이러한 허세는 우리의 우아함과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사수하는 전략이자, 한순간이라도 ‘장애인’이라는 뻣뻣한 기호에 갇히지 않기 위해 부리는 묘기이다. 우리는 묘기로 생계를 잇는 프로 곡예사라도 되는 듯, 웬만해서는 그 묘기를 생략하거나 포기할 줄 모른다.저자는 “스타일의 추구는 자신을 ‘무엇이 아님’이라는 결여가 아니라 ‘무엇임’이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할수 있을 때 가능하다(124~125쪽)”고 말한다.

 

내 장애는 사회에서 분리되기엔 너무 경증이었고 무시되기엔 가시적이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나의 목표는, 나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비장애인으로 구성된 집단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살아남기였다. 나는 ‘약간의 도움만 제공하면 같이 다니기 그리 나쁘지 않은’ 장애인이 되기 위해, 각 활동에 대한 내 참여 수위와 필요 수위를 조절하는 법을 연마했다. 그러므로 ‘사랑과 정의를 부정하’거나 “그럼 너도 다리 잘라”라고 외칠 배짱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내가 무슨 화려한 말로 포장을 하든, 실질적으로 나의 꿈은 ‘장애를 가진 것 빼고는 모든 것이 완벽한’ 장애인과 ‘장애 때문에 이 정도밖에 되지않는’ 장애인, 양쪽 다가 ‘되지 않는 것’ 정도였다.

 

실생활에서는 이런 편견과 저런 오해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 바빴지만, 부정형이 아닌 계획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언젠가는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했다. 희한하게도 이 계획만큼은 어떤 모욕이나 어떤 사고에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지금도 이 책은 여전히 ‘미래에 나올 책’이다.) 김원영변호사는 현대 입헌 민주주의 국가들이 명시하는 ‘인간의 존엄’을 자신 인생의 내러티브에 대한 각 개인의 고유한 저작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설한다(185~186쪽). 나는 그동안 아직 미출간인 나의 책을 쓰며, 나의 내러티브 즉 나의 인간됨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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