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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아 안녕]

돌아보면 참 귀한 인연들 

 

 

 

 정은희

노들장애인야학 활동가

 

 

 

 

정은희.jpg

 

  안녕하세요. 노들야학에서 2년 동안 회계 언니를 맡았던 정은희입니다. 간단히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걷는 걸 참 좋아하고 영화와 문학을 사랑해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솔직하게 욕망하고, 정직하게 불화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와 코미디를 좋아합니다. 13년 전, 대안교육과 생태적인 삶을 고민하며 불교 명상에 빠져 지내던 중,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즘을 만나며 활동가의 길에 들어섰고, 그렇게 흘러흘러 노들야학까지 오게 됐습니다. 노들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건 그저 흘러들어온 결과 같지만, 지금 돌아보면 참 귀한 인연이에요. 그래서 한번 써봅니다. 노들에서 함께한 학생 관찰일지! 학생 이모저모! 두둥.

 

 

  장기

 

  장기형에게 내 이름은 ‘사무실 선생님’이다. 2년을 함께했어도 내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더니, 어느 날 5층 신입 활동가 선생님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장기형이 기억하는 이름은, 오래 활동하거나 자주 보는 선생님인 경우라는데. 어째서 그럴 수 있는지 참 신기했다. 혹시 내 이름이 어려운가 싶어, “그럼 ‘정 선생님’이라고 하면 기억하기 쉽지 않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본다. 대답 없이 딴소리하는 장기형. 오늘도 사무실에 앉아 복도에서 울려 퍼지는 그의 노랫가락을 들으며, 언젠가 장기형이 그려준 초상화를 본다. 처음엔 다른 사람을 그려놓고 나라며 슬쩍 준 것 같았는데, 계속 보다 보니 동글동글 묘하게 나와 닮은 것도 같다. 그는 언젠가 이런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저기 있잖아, 가지 나무도 그릴 거고, 버스랑 지하철도 그릴 거야.”

 

 

  호연

 

  호연 언니는 시를 쓰고, 뜨개질을 하고, 수학 문제를 푼다. 외로울 때 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녀가 예전에 자기가 썼다며 보여준 시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간결하고 담백하면서도 훅이 있는 시. 직설적이고 솔직한 언니의 말투를 닮았고, 일본 하이쿠 같기도 했다. 그녀를 닮아 더 좋았다. 물론 모든 시가 그런 건 아니다. 감정이 넘칠 때도 있지만, 그녀의 오래된 우울과 깊은 슬픔은 그녀를 매일매일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멋지게 자립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호연 언니는 사무실에 있는 나에게 자주 말을 걸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다 올해 자리를 안쪽으로 바꾸고 나서부터는, 잘 안 보인다며(!) 내게 말을 잘 걸지 않는 언니의 마음. 너무 황당해서 웃어버렸다.

 

 

  정윤

 

  내 수학 수업이 너무 쉽다며, 나보고 다른 수업을 맡으라고 하는 정윤형. 그럼 다른 학생들과 진도를 맞춰야 하니 형이 한소리반으로 가라고 했더니, 자기는 불수레반이 좋다고 한다. 불수레 친구들이 잘 맞는다나. 수업시간에 정윤형이 한 얘기를 다른 학생들에게 일렀더니 영애언니가 “농담이었겠죠” 위로해줬다. “진담도 섞여있는 거 같은데요?”라고 하니, 그가 씨익 웃는다. 그는 수업시간에 주로 핸드폰으로 스도쿠를 하거나 졸고 있다. “정윤형, 너무 쉬워요? 너무한 거 아니에요?” 하면 웃음 반장 호영 님이 허허 웃는다. 졸고 있는 걸 콕 집어 “눈 감고 계신 유정윤 씨~” 하고 부르면, 또 씨익 웃는 것이다. 그렇게 졸다가도, 수학 퍼즐 문제에서는 누구보다 먼저 답을 외쳐 열정맨 홍기, 동운 님을 제치고 1등을 한다. 다른 학생들이 “에이~” 하며 야유를 보내도 꿋꿋하다. 그가 불수레반에 있고 싶어하는 이유를 어쩐지 알 것만 같다.

 

 

  만순

 

  노들에 처음 왔을 때, 만순·경남·희자 이 세 언니는 유독 누가 누군지 헷갈렸다. 왠지 모르게 세자매 같은 느낌이랄까. 맏언니 포스의 만순, 다소곳한 공주 둘째 경남, 호쾌한 막내 희자. 너무 다른 성격인데도 자매 같기도 하고, 자매라 생각하니 또 닮아 보이기도 했다. 그중 만순 언니는 맏이답게 처음 본 내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하이파이브로 인사했다. 그녀와 손을 맞잡고 나면, 말 한마디 없어도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이젠 언니를 보면 나도 모르게 손을 먼저 내밀게 된다. 나보다 훨씬 연상인데도, 나를 “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엥? 내가 언니라고? 이상했지만, 또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언니. 언니. 그녀는 그렇게, 조용히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나도 언니의 마음에 스며든 걸까?

 

 

  홍기

 

  홍기형은 수업 시간에 늘 맨 앞자리에 앉아 활동지원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수업을 방해(?)하고, 동시에 가장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도전을 즐기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엄청난 에너지의 소유자다. 그의 프로젝트 중 하나는 ‘김홍기 생애사 쓰기’. 그래서 그런지, 글쓰기 지원교사 ‘남’과 ‘박’을 항상 찾는다. 그 두 사람이 어딨냐고 내게 물어본 것만 백 번은 넘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복도를 지나가는데 그가 나를 불러 세우더니, “어디 갔었어?” 하고 말을 건넸다. 아니, 남과 박이 소식만 궁금해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깜짝 놀라 “내가 없어진 걸 알았어?”라고 물었더니, “응, 한 달 동안 안 보였어.” 하며 정확히 말해줬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다가, “홍기형, 나 보고 싶었구나!” 하고 농담을 건네자 그가 껄껄 웃는다.

 

 

  명학

 

  그는 때때로, 내가 이곳에서 버틸 수 있게 해준 사람이었다. 노들의 가장 오래된 학생이자 교장 선생님, 김명학. 카페에서 수다 떨던 동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나와 명학 형만 남은 어느 날. 그가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뜻밖에 질문에 나는 당황하다,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표정이 평소보다 어두웠어.” 아, 명학형은 그걸 놓치지 않는구나. 명학 형 앞에서 나는 울보가 된다. 원래도 눈물이 많은 편이지만, 명학 형 앞에서는 더 그렇다. 자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서로 힘든 점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됐던 걸까. 그가 슬며시 또 내게 물었다. “그때 서운했지?” 툭, 내 마음을 건드렸던 말. 그동안 누구에게도 꺼낼 수 없었던 말이었는데,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명학형은 자신이 말주변이 없다며 늘 아쉬워했지만, 백 마디 말보다 꽂히는 그의 한 마디는 나에게 산처럼, 바위처럼 큰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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