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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 책꽂이

깨지는 말들

 정용준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이지훈

국문학 연구자. 대학원에서 한국소설을 공부하고 있다. 장애를 재현하는 소설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중요성과 문제성을 고민한다. 고민을 이어가던 중 노들장애인야학을 만났다. 이곳에서 비상근 신입 교사로 활동하면서 큰 힘을 얻고 있다.

 

 

 

 노들책꽂이_내가말하고있잖아.jpg

 

 

 

대화의 현장엔 얼마간의 멈춤이 있다. 멈춤의 순간은 대화를 풍성하게 만든다. 각별한 주의를 끌고 섬세한 관심을 요청한다. 고요함을 신중함으로 응답해나가는 과정에서 차츰 움트는 싹이 바로 ‘이해’라는 감각일 것이다. 대화에 새겨지는 쉼표가 이해의 장을 마련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쉽게 지나친다. 노력을 기울여 잘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을 부단히 멈춰 세우는 소설, 정용준의 『내가 말하고 있잖아』가 소중한 이유이다.

 

열네 살 소년 ‘나’는 말을 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폭탄처럼 터지면서 발음되는 몇몇 단어를 제외하고는, 말을 쉼 없이 꺼내기 어렵다. 그런데 세계는 주저하는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말더듬증이라는 진단명을 앞세워 삶을 옥죈다. 또래들은 ‘나’를 장난감과 놀림감으로만 여기고, 교사들은 악의로 가득 찬 호기심으로만 대한다. 이에 ‘나’는 어떤 결심을 벼려왔다. “아무것도 누구에게도 기대하지도 말고 기대지도 말자.”

 

사람과 사물은 모두 고유한 이름을 갖는다. 그것은 단단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단, ‘나’는 예외이다. ‘병신’으로, 어떤 때엔 ‘더듬이’로 불린다. ‘나’의 이름은 부르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 복수의 멸칭들이 곧 이름이다. 하지만 정작 ‘나’는 사람과 사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호명할 것을 강요받는다. “적혀 있는 대로 읽어야 하고 정해진 대로 발음해야 한다.” 아무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까닭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나’의 힘듦과 머뭇거림을 잘못된 것으로 속단할 뿐이다. 사람들은 가지런한 발화만을 요구하고,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소통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말을 못 하는 사람은 할 말도 없는 줄” 알며 대화의 통로를 차단한다. ‘나’의 앞에 장벽(barrier)을 세운다.

 

‘나’의 말은 잇달아 깨진다. 조각나는 단어들만큼이나, 자기 삶도 점차 허물어짐을 느낀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않음을 일러주는 이들이 있다. 힘을 안겨주는 사람들, 바로 ‘스프링 언어 교정원’의 구성원들이다. ‘나’는 스프링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오래도록 품어왔던 인간에 대한 불신을 차츰 내려놓는다. 이곳 사람들은 좀처럼 간추릴 수 없어 흩어지는 ‘나’의 말들을 오롯이 듣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한 달에 한 차례씩 “최근 가장 말하기 어려운 단어”로 이름을 새로 짓는다. 말을 할 때마다 깨지는 단어들을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된다. 바뀌는 이름들로 저마다 맞닥뜨리는 어려움을 짐작하고, 침묵도 말 걸기의 또 다른 방식임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이해한다. ‘나’는 스프링을 처음 방문했을 때, “말을 하게 해주는 곳”으로 소개받은 바 있다. 이제 이 소개말을 다음과 같이 옮겨적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형태의 말이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곳.

 

‘나’는 더는 혼자가 아니다. 스프링 사람들이 곁에 있다. 함께 비밀을 주고받으며, ‘나’를 모욕했던 사람들에게 복수를 꾀하기도 한다. 주위의 장벽에 선명한 균열을 새길 수 있기를 같이 꿈꾼다. 그렇게 ‘나’는 자신의 쓸모를 의심하고 스스로를 무가치한 존재로 믿었던 과거로부터 조금씩 멀어진다. 그리고 ‘나’는 기록한다. 부서지는 말들을 꾹꾹 눌러 담으며, 쉽게 깨지지 않는 새로운 언어를 고안한다. 경험한 일들을 빠짐없이 적으면서 스프링 사람들과의 추억을 간직한다. 매일매일 쌓이는 이 기록들은 ‘나’를 살게 만든다.

 

이처럼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자기 자신을 껴안는 방법을 알아가는 ‘나’의 삶을 그린다. 아울러 그것이 오로지 혼자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음을 짚는다. 깨지는 말들을 함께 모으는 사람들이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다. 다른 한편 소설은 ‘나’ 또한 직접 깨뜨려야 할 것이 남아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몰이해’가 있다.

 

어느 날 ‘나’는 계속 말더듬이로 사느니, 차라리 벙어리나 장애인이 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생각이 한없이 다채로울 이들의 삶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재단한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버리면 차라리 편하지 않을까”라는 불평이, 누군가에게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를 입힐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 만일 이와 같은 몰이해가 깨지지 않는다면, ‘나’ 역시 타인 앞에 또 다른 장벽을 세우는 공모자가 될 수 있다는 것. ‘나’를 향한 소설의 준엄한 경고일 테다.

 

지금 이곳, 한국 사회로 시선을 옮겨본다. 소설이 발신하는 경고음을 피해갈 수 없다. 스프링 너머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장벽의 존재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소설 밖엔 여전히 많다. ‘나’의 삶의 변화를 지켜보며 안도할 수만은 없는 이유이다. 스프링의 구성원들이 깨지는 ‘나’의 말들을 자원 삼아 공동체를 꾸리는 것처럼 하루빨리 숱한 장벽들이 무너지기를, 그리고 그곳에 모두가 제약 없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세계가 만들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듣는 사람의 몫이 중요한 때이다. 번번이 장벽들에 가로막혀왔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언한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 사실 장벽을 거부하는 말들의 발화는 일찍이 시작되었다. 글을 마치면서, 그 현장에 늦게 도착한 사람들을 위해 소개하고 싶다. 2022년 3월 30일부터 이어지고 있는 어떤 말들을.

 

[비마이너] 2022년 장애인차별철폐 활동을 펼치며, 매일 아침 삭발을 이어나가는 장애인 활동가들의 투쟁결의문 (www.beminor.com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웹진 이음> 36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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