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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척 하기 

 - 907 기후정의행진과 『재앙의 지리학』

 

 

 

 황시연

노들야학 교사입니다. 청솔1반에서 두 학기 동안 수학 수업을 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근심걱정이 많습니다. 일단은 돌아오는 학기에 만나보지 않은 학생들과 수업을 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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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7 기후정의행진 포스터

 

 

  올여름, 난데없이 소나기가 내려 옷이 눅눅하게 젖을 때마다 다짐했습니다. 올해는 꼭 기후정의행진 가야지. 꼭 행진 가서 이렇게 점점 더 혹독해지는 세상에서는 살 수 없다고 해야지. 숨 막히게 덥고 고단한 여름을 보내면서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날로 커졌나 봅니다.

 

  907 기후정의행진을 돌아보면 강남대로의 빌딩숲, 택배 박스를 잘라 만든 피켓들, 신문지로 접은 물떼새 모자 같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신논현역을 빠져나오자마자 깃발을 든 사람들과 합창단 기후행동의 노랫소리가 뜨겁게 맞아줬던 것두요. 그날은 평소에 자주 마주치지 않는 다양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야학에 와서 참여한 집회 중에 가장 다채로운 집회가 아니었을까요? 처음 보는 깃발이 많아서 신기하고, 이렇게 많은 단체가 한데 모이는 것이 기후정의행진이구나 싶어 들떴습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인 만큼, 기후는 이 땅에 살아가는 모두에게 중대한 문제라는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참여자들의 나이대도 지금까지 가 본 집회 중에서 제일 다양했던 것 같아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운영한 사전 부스에서 물떼새 모자를 접어 쓰고 있는 어린이 무리를 보고 더 일찍 올걸! 하고 아쉬워했던 기억이 나네요.

 

  익숙한 사람들과 낯선 장소에 있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종로 인근이 하도 집회하기 좋다 보니 올해 기후정의행진도 그 근처 어딘가에서 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다가 강남에서 한다는 말에 깜짝 놀랐었는데요. 자주 찾지 않는 장소라서 행진도 쉽지 않았습니다. 신논현역에서 강남역으로 꺾어 들어가는 길목을 집회 트럭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을 빼놓을 수 없겠죠! 다른 대오들이 턱이 있는 인도로 올라갔다가 다시 차도로 내려오는 동안, 야학을 포함한 휠체어 대오는 트럭 옆에 전동휠체어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틈을 내서 행진을 이어갔습니다. 이렇게 가는 게 맞아? 하고 옆 사람들과 웅성웅성 중얼거리면서… 그래도 휠체어에 매단 폐깡통을 땡그랑거리고, 빈 페트병을 꽝꽝 두드리고, 노란 비닐봉지를 깃발처럼 흔들며 열심히 걷고 구르고 춤 췄습니다. 

 

  옆에서 장기 형이 부르는 트로트를 따라부르면서 강남에서 역삼, 역삼에서 선릉으로 지하철역을 하나하나 지나쳤습니다. 이제 정말 쓰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 누군가 “지금 누우세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이인 하면 사이렌 소리 아닌가, 하고 멀뚱멀뚱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이인을 하는 게 맞다는 말을 듣고 주변 사람들과 허겁지겁 아스팔트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어요. 지하철 역사 밖에서 하는 다이인은 따뜻할 줄 알았는데, 강남대로는 빌딩숲 때문인지 바닥이 냉랭했습니다. 죽은 척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우뚝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장기 형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형은 바닥에 누우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듯했습니다. 아쉽게도 형이 엉거주춤 누우려는 바로 그 순간, 시간이 다 돼서 다시 행진이 시작됐습니다. 툴툴거리는 형을 보면서 야학만의 속도가 있다는 걸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행진에서 주변 사람들과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라고 외치면서 생각했습니다. 바꿀 게 너무 많은데 어떻게 바꾸지?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기후정의행진의 요구안만 해도 너무 많은데, 구석구석 문제가 많은 이 세계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강남대로에서 행진을 마치고 돌아온 뒤로도 그 질문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때마침 로리 파슨스의 『재앙의 지리학』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캄보디아의 벽돌 공장에서 땔감 대신 유명 브랜드의 새 옷을 태우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기후위기의 발생과 영향을 둘러싼 불평등을 다룹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가 쓰고 입고 사용하는 물건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전혀 모르고, 세계 곳곳의 노동자들은 각자 다른 기준으로 착취당하고 있고, 기업들은 지속가능성, 제로웨이스트, RE100 같은 허울 좋은 말만 내세우면서 사실 기후위기를 가속하고 있다는 것을요. 나아가 기후위기는 모두의 문제이지만, 그로 인한 영향은 불평등하다는 것도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파슨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기후 또는 환경 문제에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우선 “지속가능한 소비라는 아편에서 벗어나야”(116) 한다고 강조합니다. 저도, 같이 읽은 친구들도 이 문장에서 조금 동요했습니다. 올바른 소비로 위기에 제동을 걸기에 세계의 산업과 경제는 아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은 불평등하고 쉽사리 보이지도 않는다니요. 개개인의 노력에 매달리는 것은 오히려 위기를 심화하는 기업들의 변명에 힘을 실어줄 뿐이라니…….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이어서 가장 기억에 남고 주변과 나누고 싶은 부분을 가져와 봅니다.

 

글로벌 경제에서 최악의 국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사람을 만난다면, 한 명의 개인으로서는 취약하지만 집단으로서의 우리는 우리의 경제, 우리의 생산, 우리의 기후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음으로써 단 하나가 아닌 여러 형태의 남용을 종식시키자고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솔직히 말해주길 바란다.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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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지리학』 (로리 파슨스, 오월의봄)

 

  기후정의행진의 요구안들을 하나씩 생각해 봅니다. 차별 철폐, 돌봄 증진, 공공 교통, 에너지 정의, 사회정의에 기반한 산업구조, 먹거리 기본권, 농민 생존권… 기후정의행진에서 이 의제들이 모인 것은 이 사회에 뿌리 내리고 있는 착취를 모두 멈춰야지만 최소한, 최악이라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곱씹고 있으면 야학에 와서 여러 차례 들은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 여성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세상에 바꿀 것이 너무 많아 도망치고 싶다가도,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연결된 이곳, 야학에 있을 때면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숨통이 트입니다. 혼자서는 잘 싸우지 못하지만, 같이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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