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자료실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검고, 희고, 붉은 머리카락

  

 

 황시연

청솔1A반 수학 교사입니다. 뒷머리를 바짝 깎아 올린 상고 머리를 하고 다닙니다. 머리가 덥수룩하다면 미용실을 간 지 오래된 거예요.

 

 

 

 

  작년 언젠가의 교사회의에서 일상 공유로 바리깡으로 제 머리를 직접 다듬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천성호 선생님이 “오, 다음에 삭발할 일 있으면 시연 쌤이 해주면 되겠네요!”라고 껄껄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설마 그럴 일이 있겠냐는 마음에 웃어넘겼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 대화는 거울 앞에서 혼자 머리를 깎을 때만 종종 떠오르는 에피소드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420 투쟁이 있기 이틀 전, 박찬욱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 다가오는 투쟁에서 야학 학생 중 해고노동자가 되신 분들의 삭발을 해줄 수 있냐고 제안하실 때까지 말입니다. 제가 삭발(진행)을요?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전화를 받고 할지 말지를 정하는 그때는 정말 일생일대의 선택으로 느껴졌습니다. 삭발, 뉴스에서만 봤는데...  조금이라도 덜 떨고 싶은 마음에 22년도에 백여 차례 진행된 삭발투쟁을 다룬 비마이너의 글을 읽고, 삭발을 여러 차례 했던 활동가분의 인터뷰 글을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루룩 420이 다가오고, 시청역에 서 있더군요.

 

  삭발을 결의한 네 명의 노들야학 학생 수미, 영애, 용호, 탄진님 중에서 저는 학생회장인 수미님의 머리를 밀게 되었습니다. 수업을 들어가는 청솔1반 이외의 학생들과는 거의 교류 없이 지내다가 대화 한 번 나눠보지 않은 수미님의 머리를 밀어드려야 한다는 게 얼떨떨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다른 분의 머리를 밀었어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목에 해고노동자의 복직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두른 수미님의 뒤에 서서 겨우 청솔1반에서 수학 수업하는 교사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머리를 밀기 시작했습니다.

 

  삭발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드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더욱 그랬을 것 같아요.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T4 노래를 들으며 손보다 작은 바리깡으로 수미님의 머리를 밀었고, 엄청나게 많은 취재 카메라가 앞에서 그 모습을 찍었습니다. 직전에 마스크를 쓴 건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너무 짧은 길이로 깎지 않게 바리깡 위에 캡이 씌워져 있었는데도, 다치실까봐 과감하게 밀기가 어려웠습니다. 막판에는 다른 팀보다 속도가 느려 다른 선생님이 바리깡을 들고 도와주셨습니다. 붉은색으로 염색된 수미님의 머리칼을 뜯어내듯이 밀고 상자에 옮겨 담으니 염색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드러났습니다. 삭발식이 끝나고 수미님 목 뒷부분 머리가 덜 밀린 것을 그제야 발견해 아차 싶었는데, 별 도리는 없었습니다. 다음에는 더 잘 밀어야겠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두 팔에 붙어있는 검고, 희고, 붉은 머리카락을 털어냈습니다.

 

  420 이후 한두 달은 삐죽했던 삭발자들의 머리는 이제 삭발하기 전만큼 자랐습니다. 글을 쓰면서 삭발식을 둘러싸고 있었던 공기와 삭발을 해야만 했던 이유를 곰곰이 돌이켜보았습니다. 삭발자들의 결의문 유튜브 영상 아래에는 중증 장애인은 노동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원색적인 비난 댓글이 여럿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야학에 와서 춤추고 노래 만들고 그림 그리는 일이, 말하고 글 쓰고 투쟁하는 일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자주 확인합니다. 야학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에 누구나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그러기 위해서 일하고, 때로는 옆 사람에게 기대고, 누군가 강제한 시간이 아니라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지런한 글자를 넘어 삶의 형태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무관심한 사람들이, 적대적인 사람들이 이것을 같이 배우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되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삭발자들의 외침에 서울시가 응답했으면 합니다. 야학의 언니 형들을,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해고노동자들을 당장 복직시켜라! 지면을 빌려 작게 외쳐봅니다.

 

황시연.JPG

 

삭발식(전체).jpg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1153 2024년 가을 139호 - 노들바람을 여는 창 노들바람을 여는 창      한혜선 <노들바람> 편집인           이번 가을호는 4월부터 6월까지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노들바람이 계간지라 시차가 존재한다고는 ...
1152 2024년 가을 139호 - [형님 한 말씀] 후원자님께 드립니다 / 김명학 형님 한 말씀 후원자님께 드립니다      김명학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올여름도 많이 더웠던 여름날이었습니다. 여... file
1151 2024년 가을 139호 - 나의 첫 노들 모꼬지 / 김다현 나의 첫 노들 모꼬지       김다현 노들에 서성이고 있어요. 누군가를 잃고 살아가고 견디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싶어요.         “동네 나와서 첫 글자 ... file
1150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지옥행 420급행열차를 타라 / 서한영교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지옥행 420급행열차를 타라       서한영교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1981년 4월 20일> 조선일보, 1981년 4월 21일   ... file
1149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해복투 노동자 이수미입니다 / 이수미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해복투 노동자 이수미입니다       이수미 노들야학 총학생회장. 오세훈 서울시장,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최중증장애인 노동자 ... file
»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검고, 희고, 붉은 머리카락 / 황시연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검고, 희고, 붉은 머리카락       황시연 청솔1A반 수학 교사입니다. 뒷머리를 바짝 깎아 올린 상고 머리를 하고 다닙니다. ... file
1147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그날 혜화역 / 김은호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그날 혜화역       김은호 2024-1학기 노들야학 교사 인준에 도전하였으나 장렬히 실패하고만 사람. 2학기를 맞아 재도전해보... file
1146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서울교통공사, 서울혜화경찰서, 장애인의 이동권을 막다 / 유진우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서울교통공사, 서울혜화경찰서 장애인의 이동권을 막다       유진우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2021년 12월 ... file
1145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부당한 연행, 그리고 ‘감방’에서 보낸 이틀 / 서기현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부당한 연행, 그리고 ‘감방’에서 보낸 이틀       서기현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 소장             2024년 4월 20일, 나는 장... file
1144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날 투쟁 참여하면서 느낀 점 / 남대일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날 투쟁 참여하면서 느낀 점       남대일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 동료지원팀 활동가           올해... file
1143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제22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박종필’상 관객상 수상 / 편집부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제22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박종필’상 관객상 수상        편집부             제22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가 4월18일부... file
1142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나의 420_노들야학 ‘자립의 시’ 수업 학생 글 / 엄세현, 김민정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나의 420  노들야학 ‘자립의 시’ 수업 학생 글         투쟁의 스위치 -엄세현 (불수레반)     올해 두 번째 참가했다   항상... file
1141 2024년 가을 139호 - 두고봐라 오세훈아, 결국엔 탈시설이 이긴다_서울시 탈시설지원조례 폐지에 부쳐 / 민푸름 두고봐라 오세훈아, 결국엔 탈시설이 이긴다  서울시 탈시설지원조례 폐지에 부쳐      민푸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6월 18일, ‘서울시의회 보... file
1140 2024년 가을 139호 - 포체투지에 참여하는 이유 / 재범 포체투지에 참여하는 이유      재범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 권익옹호팀 활동가           지난 6월25일(화) 2년 전 박원순 시장 때 우리의 투쟁으로 만들어 낸 탈... file
1139 2024년 가을 139호 - 와글와글 5.18 광주 역사 기행 / 박유리 와글와글 5.18 광주 역사 기행       기행 참여 김홍기, 박유리, 박찬욱, 이수경, 조상지, 허종양 인터뷰 참여 김홍기, 박유리, 박찬욱, 이수경, 조상지, 이하늘 ... file
1138 2024년 가을 139호 - 광주 이야기 / 김홍기 광주 이야기       김홍기 노들야학 불수레반 학생.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노동자           오늘은 광주에 가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해서 준비를 빨리빨... file
1137 2024년 가을 139호 - 사진으로 보는 2024 제25회 서울퀴어퍼레이드 / 편집부 사진으로 보는 2024 제25회 서울퀴어퍼레이드       편집부           2024년 6월 1일, 서울 남대문로 및 우정국로 일대에서 열린 제25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노... file
1136 2024년 가을 139호 - 같이 불러요_‘합창과 연대’ 수업과 ‘세월호 기억식’ 이야기 / 이예인 같이 불러요   ‘합창과 연대’ 수업과 ‘세월호 기억식’ 이야기      이예인 월, 화, 수, 목, 금 센터판에서 일해요. 금요일 저녁에는 노들야학에서 합창 수업을 해... file
1135 2024년 가을 139호 - 2024 여기 닿은 노래 전시 리뷰_여전히 천천히, 즐겁게, 함께 / 고권금 2024 여기 닿은 노래 전시 리뷰  여전히 천천히, 즐겁게, 함께      고권금 몸과 장소가 맺고있는 관계를 탐구하는 <버티는몸 프로젝트>를 2020년부터 진행해오고... file
1134 2024년 가을 139호 - [노들야학 학생글방] 행복은 다음과 같은 순간이다 * 장애경 / 행복은 즐거움이다 * 김홍기 / 나는 라디오다 * 엄세현 / 힙합 안녕 * 박규형 노들야학 학생글방         행복은 다음과 같은 순간이다 -장애경 (청솔3반)     행복은 다음과 같은 순간이다.  이를테면 시설에서 나와 처음으로 옷을 샀을 때.... fil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8 Next
/ 58
© k2s0o1d5e0s8i1g5n. ALL RIGHTS RESERVED.
SCROLL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