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가을 135호 - [특집_노들장애인야학 개교 30주년] 김명학의 사랑, 바위처럼 산처럼 / 고병권
특집_노들장애인야학 개교 30주년
김명학의 사랑, 바위처럼 산처럼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다.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으며, 읽기의집 집사이기도 하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노들장애인야학의 김명학 교장(이하 호칭은 ‘명학’)은 꼭 인터뷰를 해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노들바람』의 제안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이야기를 길게 나누고 싶었다. 명학은 노들야학을 노들야학의 나이만큼 다닌 사람이다. 노들야학은 올해로 개교 30주년을 맞았고 명학도 30년째 이 학교에 재학 중이다. 물론 노들야학의 30년은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의 30년이다. 개인들이 겪은 시간을 모두 합한다면 족히 천년은 될 것이다. 한 개인이 필적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명학은 여느 사람들과 다르다. 노들야학 30년이 모두 명학에게 새겨진 것은 아니지만, 명학은 자기 자리에서 노들의 30년을 겪었다. 명학과 함께 공동 교장을 맡고 있는 천성호 교사는 어느 인터뷰에서 명학을 “바위 같은 분”이라고 했는데, 그는 정말 해안가 바위처럼 늘 거기 있었다. 지난 30년간 노들야학을 다녀간 사람들은 모두 명학이 있는 곳으로 왔고 명학이 있는 곳에서 멀어졌다.
(사진: 정택용)
명학을 찾는 것은 쉬웠다. 특히 집회 현장에서 그랬다. 노들야학 깃발만 찾으면 됐다. 노들야학 깃발은 언제나 그의 전동휠체어에 꼽혀 있었다. 내 생각에, 전임 교장이었던 박경석이 노들의 깃발이자 기수였다면, 명학은 펄럭이는 깃발을 붙잡고 있는 깃대, 아니 깃대를 꼽아둔 바위 같았다. 그는 논리적 달변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끄덕이게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감동적인 목소리와 몸짓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날뛰게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나부끼는 깃발을 꼭 붙잡고 있었고, 그 덕분에 사람들은 그곳으로 모였고 그곳에서 흩어졌다. 그는 노들의 중요한 장소였다. 그래서 그를 알고 싶었다. 노들의 중요한 무언가가 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 8월 두 번의 인터뷰를 가졌다. 첫날의 대화는 겉돌았다. 그의 말에는 튀어나온 곳이 없었다. 나는 그의 인생에서 극적인 사건을 찾으려고 했다. 불화와 갈등, 각성과 변혁, 죽음과 탄생의 드라마를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꽃은 어느 날 피어나지만 바위는 어느 날 바위가 된 게 아니다. 그는 반복해서 대답했다. 특별히 그런 일은 없었다고, 어느덧 여기 이 모습으로 있게 되었다고. 다툼도 없었고, 갈등도 없었고, 서운함조차 없었다고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준비한 물음들을 취조하듯이 던졌다. 그러다가 그 물음들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 왔다. 그때 비로소 명학 안에서 물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주파수가 틀렸던 것이다. 그에게는 황량하고 쓸쓸하고 다정하고 달콤한 말들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걸 놓치고 있었다. 그는 바깥으로 쏟아내는 사람이 아니라 안으로 흘려보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1. 리어 왕 김명학 - “난, 미쳐버릴 거야!”
명학은 1958년생이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5년 후이니 먹고살기 쉽지 않은 시절이다. 그래도 명학의 집은 살림이 괜찮았던 것 같다. 땅이 많았고 일꾼이 다섯이나 되었다고 한다. 명학은 팔남매의 다섯째이다. “위에 형님 둘, 누나가 둘. 내 밑에는 여동생이 셋. 그때 아들 선호가 많았지. 그런데 [내가] 아프다 보니까 좀 아들을 낳겠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낳았는데 다 여동생만 낳은 거야.”
아들이 이미 셋이나 있는데 또 아들을 낳으려고 하셨다고? “내가 아프다보니 또 욕심이 생겨가지고.” 부모님에게는 셋째 아들이 ‘온전한’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명학은 여동생이 셋이나 된 이유가 자신이 장애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쓰디쓴 인식을 직접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걸 의식하지 않고 컸다고 했다. 차별도 거의 느끼지 않았다고. ‘중간에 장애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상실감이나 차별 의식이 있었겠지만, 너무 어려서 장애를 입어서인지(그는 첫돌이 되기 전에 장애가 나타났다고 했다) “장애에 대해 각인을 못했던 것 같다”고 했다.
팔남매 중에 그만이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어머니는 교육열이 대단했고 자녀들 학업을 뒷받침할 경제적 여력도 있었다. 여동생들까지 모두 학교에 가고 나면 집에 혼자 남았다. 그는 가족들에게 한줌의 얼룩도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나도 교육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거기는 완전히 시골이었으니까.” 그래도 형제들이 학교 가고 혼자 남았다면 서운하지 않았을까. “그때만 해도 꼭 학교를 가야한다는 건 없고, 이런 게 내 일상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지.” 명학은 읽고 쓰는 것은 동생들 틈에서 배웠다. 동생들이 학교에서 시험지 같은 것을 가져오면 그것을 통해 공부했다.
외출은? “거의 못했지. 읍내 철공소에서 큰 세 발 자전거 만든 거에 실려서 가까운 데 몇 번 다녀오긴 했는데, 거의 못했어.” 어머니는 농사일로 바빴고 형제들은 학교에 가고, 그럼 집에서 어떻게 지냈을까. 라디오를 들었고 책을 읽었다고 했다. “누나가 월급을 타서 세계문학전집을 사줬어.” 명학은 문학 소년이었다. 어떤 작품들을 읽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떠올렸다.
의외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잘 지냈다는 어린 시절의 명학과 리어 왕은 잘 연결되지 않았다. 리어 왕은 가족, 즉 자신을 한없이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그래서 영토와 재산을 모두 물려받았던 두 딸에게 버림받은 사람이다. 그는 정체성의 붕괴를 겪은 사람, 자신이 알고 있는 걸음걸이, 자신의 말, 자신의 눈, 자신의 지력, 그 모든 것에서, 자기 이미지가 붕괴된 사람이다. 내가 알고 있던 나, 내가 그렸던 나가 현실의 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그러고는 광기를 향해 걷는다. “난, 울지 않아. 오 바보, 난 미쳐버릴 거야!”
명학은 『리어 왕』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의 마음은 어떤 장면에 머물렀을까. “리어 왕이 다 배신당하고, 넓은 황량한 들판에 서 있는 모습… 어떻든 황량한 들판을 헤매는 장면들, 그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어.” 형제들 모두 학교 가고 집에 혼자 남았어도, 이런 게 내 일상이라고, 서운하지 않았다고 했던 명학. 하지만 그의 가슴에 남은 리어 왕은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채 황량한 들판에 혼자 서 있었다.
“서른까지 집에서 지냈어.” 명학은 서른이 넘어 서울에 왔다. 서른까지 착하게 지내다가 일자리가 생겨 서울에 왔다고? 너무 부드럽다. 왜 집을 떠나고 싶었을까. “20대 때부터 [집을] 나가려고 했어. 일을 하고 싶었어. 진짜 노동을 하고 싶었어. 시간이 갈수록 더 촉박해지고. 뭔 일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다 하겠다, 돈 안 받아도 된다. 그만큼 절실했어. 시간은 막 가는데, 인생을 이런 식으로 보낼 수는 없다고. 형님들은 수원이나 이런 데서 일하셨는데, 가끔 형님이 오면 나 좀 어떻게 끌고 나가라고.”
명학은 나중에 형에 대해 회고하다가 이때의 기억을 다시 꺼냈다. 그는 집에 남겨진 채 형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형이 휴가 끝나고 갈 때가 참 슬펐어요. 설이나 추석 때 [집에] 왔다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노라면 내가 너무 초라해 보이고, 마음이 상해서. 좋아 보이기도 하면서 허전한 마음….” 십대 때 읽은 『리어 왕』에 대한 기억이 겹쳐 보인다. 명학은 그때 괜찮았다고 했지만, 아마 학교에 가는 형과 동생들의 뒷모습을 보고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내가 너무 초라해 보이고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 말이다.
명학은 십대 후반부터, 특히 이십대에 들어 너무 답답했다고 했다. 다시 물었다. 이때 ‘나는 형제들과 다르구나, 나는 별 수 없이 장애인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냐고. “크게는 아니야. 나는 선천적 장애인이니까 이 생활이 나의 생활이었지.” 그럼, 도대체 뭐가 견딜 수 없었던 건가. 그냥 “사춘기였다”고 답했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덧붙였다. “사실 그때 진짜 미쳤거든. 보통은 괜찮았는데, 십대 후반, 이십대 넘어가면서부터는 시간도 너무 빨리 가고. 세월은 막 가는데 나는 집에만 있고 미래가 없어. 잡아도 그것이 없어.” 왜 나가서 고생을 사서하려고 하느냐는 어머니도 더 이상 말릴 수 없을 만큼 ‘마구 들이받았다’고 했다. 그래, 그는 리어 왕이었던 것이다. “오 바보, 난 미쳐버릴 거야!” 명학은 계속해서 ‘나는 괜찮았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미칠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래도 명학에게는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과 달리 출구가 열렸다. 프랑스에서 온 셋째 딸 코딜리아는 리어 왕을 구하지 못했지만, 수원에서 온 명학의 형은 그를 부안에서 꺼내주었다. 놀랍게도 형은 중증장애인인 그에게 일자리를 찾아주었다.
2. 노동자 김명학 - “나 같은 사람, 뭐 피해만 안 주면 되지.”
정립전자는 1989년 서울 광진구에 설립된 전자부품 회사로 국내 최초의 장애인근로사업장이다. “1988년에 장애인올림픽을 치렀는데 아무 것도 없었거든. 그때 삼성전자의 지원을 받아 정립회관에 이게 만들어진 거지. 정립전자를 꿈의 직장이라고 했어요. 복지공장이라고. 한국 최초의 장애인 복지공장.” 그때 삼성에 명학의 형이 근무하고 있었다. 정립전자 설립에 관여한 실무자는 아니었지만, 형은 고향의 동생을 떠올리며 일의 진척 과정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명학은 형의 소개로 1991년 정립전자에 입사했다.
정립전자는 삼성전자의 제품에 들어갈 특정한 기판을 제작했다. “전자기판이 있어요. 납땜질도 하고 해서 수원의 삼성공장에 납품하는 거지. 땜질도 하고 검사도 하고.” 전자기판 땜질이라고? 명학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 같지가 않았다. “아, 나는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내가 거기서 장애가 제일 심했어. 거기 다른 사람들은 휠체어만 탔지 손은 자유로웠거든. 내가 최중증이었지.” 그렇다면 명학은 어떤 일을 했던 걸까. “나는 긴 자재를 기판 크기에 맞게 가위로 잘라내는 일을 했어.” 그마저도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맞아. 남이 열 개쯤 자르면 나는 한 개나 잘랐나.”
(사진: 한명섭)
정말 꿈의 직장이었던 걸까. 저마다 자기 속도에 맞춰 일하면 되는 곳. 그럴 리가 없다. 그곳도 엄연히 이윤을 내야하는 기업이었다. 노동자의 생산성은 거기서도 중요했다. 관리자들은 계속해서 속도를 높이려고 했다. “컨베이어벨트가 있어. 거기에 속도를 맞춰야 해. 자기 앞에 기판들이 오면, 물량을 많으면 열 개 넘게 뽑아야 해. 아, 물론 내가 뽑는 건 아니고, 거기 다른 직원들이 하지.” 명학은 컨베이어벨트에서 떨어진 곳에서 자재를, 그것도 아주 느린 속도로 잘랐다. 그는 그것이 허용된 유일한 노동자였다.
명학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지만 과연 그것은 일이었을까. 그는 정식 입사한 노동자였지만 과연 그는 노동자였을까. 거기 노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도 장애인이었지만 명학은 그들 눈에 정말 장애인이었다. “중증장애인. 그 안에도 그런 게 있더라고. 차별, 소외…” 회사는 그의 쓸모를 다른 곳에서 찾았다. 정립전자는 삼성전자에서 일감을 따내야 했는데 거기에 명학의 형이 있었다. 말하자면 명학 형의 도움을 받는 데 명학이 쓸모가 있었다. 게다가 중증노동자 한 사람 정도는 홍보를 위해서도 괜찮았다. 명학은 정립전자가 중증장애인까지 고용하고 있다고 생색낼 때 활용될 수 있었다.
동료 노동자들은 그와 함께 지내면서도 그를 동료 노동자로 인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빽이라고, 형 빽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했어. 나도 열심히 일하는데 사람들은 형 빽 이야기만 했지.” 명학은 그때 일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나는 정말 그 이야기가 듣기 싫었어. 맞긴 하지. 형 빽으로 들어왔지. 그런데 정말 싫었어, 정말!” 명학이 땀 흘리며 수행한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 ‘특혜’로 간주되었다. ‘빽’은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인증이 아니라 ‘빽’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그 자체로는 무능력한 사람, 비용이 드는 사람, 더 나아가 짐이 되는 사람이라는 인증이 되었다. 중증장애인을 사회적 활동에서 배제하는 논리, 중증장애인을 집에 가두고 시설에 가둘 때 동원되는 논리가 ‘꿈의 직장’에서도 작동했다. 비장애중심주의는 장애인근로사업장에도 존재했고, 다른 장애인들의 입을 통해서 설파되었다. 그는 ‘빽’은 있었지만 가치는 없는 사람, 가치를 더하기는커녕 가치를 축내는 사람이었다.
명학은 땀을 흘리면서도 얹혀 지내는 존재가 되었다. “다 기숙사에 함께 살지만… 다 나가고 혼자 있을 때가 많았어. 특히 일감이 없을 때.” 공장에 대한 기억은 가정에 대한 기억과 많이 닮았다. 그는 집안이 유복했고 가족들의 도움으로 장애인이라는 자각 없이 지냈다고 했다. “집안도 잘 만나고 부모도 잘 만나고, 다른 사람들처럼 고생은 않고, 마음고생 안 하고, 돈 구애도 안 받고…” 하지만 그의 말에는 학교에 가는 동생들의 뒷모습, 휴가를 마치고 직장에 복귀하는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때의 씁쓸함이 비쳤다. 공장에서도 그랬다. 이곳은 장애인들에게는 ‘꿈의 공장’이었다. 그는 정규직 노동자로서 많을 때는 100만원 넘는 월급을 받았다. 일하는 것도 좋았고 술 먹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공장에서 그는 컨베이어벨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뒷모습을 보아야 했고, 동료들이 모두 외출할 때면 기숙사에 혼자 남았다.
왜 나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굳이 바깥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근처 슈퍼마켓에 전화하면 다 배달해주었다고. 이 이야기를 듣노라니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혼자 집에 남아있으면 서운하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비슷한 답변을 했었다. 굳이 학교에 가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동생들이 학교에서 가져다주는 시험지로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고. 그러나 어린 명학이 리어 왕이 서 있던 황량한 들판을 떠올렸던 것처럼, 노동자 명학은 동료들이 모두 외출하고 혼자 남았을 때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한다. “나가도 되긴 해. 근데 할 것이 없어. 다른 사람들은 다들 나가지. 다들 장애가 조금씩 있어도 손이 이렇게 다 움직이니까. 나는 속도가 너무 느리고.” 자동차를 운전하던 동료들은 차를 몰고 나갔고, 장애가 덜한 동료들은 목발을 짚고 외출했다. “난 10년 동안 [정립전자가 있던 아차산 언덕] 밑에도 내려가지 않았어.” 정말 한 번도 거기서 안 나왔다고?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응.”
집에 30년을 묶여 있던 사람이 집을 나와서 다시 공장 기숙사에 10년을 묶여 있던 셈이다. 사실 ‘묶여 있었다’기보다 거기 그렇게 내버려져 있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기숙사 방에 들어오지 않아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어차피 어디에 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별로 나 찾지 않고 늦게 와도 문이 안 잠겼어. 나 같은 사람… 뭐. 나는 안 나갔지. 다른 사람, 뭐 피해만 안 주면 되지.” 명학은 여기에 ‘그런 게’ 있었다고 했다.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거 있잖아’ 한참 되뇌다가 그가 찾아낸 말은 바로 ‘소외’였다. “참, 힘들었어.”
거기서 나올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명학은 오랫동안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괜히 식구들까지 마음 불편해질까봐.” 그는 특히 일자리를 알선해 준 형을 많이 생각했다. 회사 관리자들도 직접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명학을 볼 때 또한 형을 의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학은 말하지 않아도 그런 게 다 보였다고 했다. 형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봐, 그리고 형을 의식하는 공장 관리자들을 바라보면서, 명학은 “많이 힘들었지만” 그냥 참아버렸다. 아니, 제일 힘든 사람, 제일 불편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참는다고? 그게 명학이다(그리고 꽤 많은 장애인들이 그렇다).
명학은 20년을 정립회관 노동자로 지냈고 그곳 기숙사에서 살았다. 그러고는 2011년 그곳을 나왔다. 정년퇴직을 한 게 아니라 스스로 그만두었다. 무슨 극적인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년을 일하다가 왜 갑자기? 이렇게 물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면 이 일은 거의 20년 가까이 점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는 20년 동안 달구어졌고 어느덧 욕망이 피어났다. 가정을 벗어나 공장으로 간다고 해서 풀려날 수 없는 속박, 그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 “운동을 하고 싶었어.”
3. 장애운동가 김명학 -“내 자신이 바뀐 거야, 맞지?”
명학이 정립전자를 그만두었을 때 가족들만 반대했던 게 아니다. 탈시설운동을 하는 주변 운동가들도 당혹스러워 했다. “모두들 나보고 배부른 소리 한다고. 혼났어요. 혼자서 그냥 나와 버렸거든요. 원래는 다 갖추고 나와야 하는데.” 20년을 달구어진 사람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나왔다고? “내 머리는 다 준비했는데 주변에서 안 했어.” 아니, 준비를 자기 머릿속으로만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이야기를 했는데 주변에서 안 믿어요. 거기를 왜 나오느냐고.” 사람들은 몰랐다. 자기가 그곳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거기서 특혜 받은 무능력한 존재, 무가치한 존재로 간주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명학은 계속해서 신호를 보냈다고 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확실히 그의 신호를 포착하려면 감도 좋은 수신 장치가 필요하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하곤 한다. ‘나는 좋은 집안에서 살았어요’ ‘거기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공장이에요’ ‘서운한 것 없었어요’ ‘괜찮아요, 어떻게 내 고집만 부리며 살아요’. 그런데 이 말들을 그대로만 들은 사람들은 놀라서 묻게 된다. ‘그럼 집에 가만있지 왜 고생길 뻔한 서울에 가려고 해’ ‘왜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려고 그래’. 말을 듣는 것과 알아듣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명학의 말은 특히 그렇다.
명학이 더 이상 견디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된 계기, 아니 그를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만든 계기, 그를 서서히 달구다가 결국 뜨거운 운동가로 만든 계기는 정립전자 안에 있었다. 작업장과 기숙사 사이에 있던 탁구장, 그곳에 1993년 노들야학이 들어섰다. ‘밑불이 되고 불씨가 되자’는 모토처럼 명학은 이곳에서 서서히 달구어졌다. 노들야학이 개교하고 3개월쯤 지났을까. 정립전자 직원 중 한 사람이 정립회관 건물에 야학이 생겼다고 말해주었다.
무엇이 그를 야학으로 이끌었을까. 어렸을 때 학교에 가지 못했던 한이 되살아난 걸까. 명학은 야학에서 공부하며 검정고시로 고등 졸업까지 학력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내 물음에 그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그렇게 컸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배움에 대한 열망보다 컸던 것은 사람에 대한 열망이었던 것 같다. “(배움에 대한) 열망도 있었겠지만 죽자 살자는 아니었고. 배우면서 사람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야학 물이 좋아, 학생들이. 옛날에 교사들이 다 대학생이었어요. 대학생들이 세상을 넓게 보니까 좀 시야가 넓잖아. 여기 우리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 있으니 시야가 좁지.” 사람을 만난 뒤 배움에 대한 열망이 새로 생겨났다. 명학은 나이 어린 대학생들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배웠다. 학력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배움에 대한 열망, 그것도 글이나 셈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배움의 열망이 그를 뜨겁게 만들었다.
게다가 야학에서 사람들의 관계는 그가 그동안 겪어온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장애도, 학력도, 나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야학에서는 수업과 뒤풀이가 한 묶음이었는데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수시로 바뀌었다. “인생은 우리가 선배잖아. 서로 고민이 있는데 술을 먹다보면 그게 나와. 우리 야학의 학생과 교사 관계가 수직이 아니라 수평, 평행 관계잖아. 세상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개인들 장래 문제까지 고민을 나눴어.”
명학은 이때 사람 냄새를 맡았다고 했다. 야학에서는 사람 냄새가 났다고. 그동안은 사람들 곁에 있었을 때도 전혀 맡을 수 없었던 사람 냄새,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으로 다가올 때만 맡을 수 있는 냄새, 사람이 사람에게 자신을 열어줄 때만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가 난 것이다. 명학은 여기서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고, 누군가 자신에게 털어놓는 마음 속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이야기였을 때조차 상대방을 크게 대한다는 신호였다.
명학은 술자리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는 교실만큼이나 세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었고, 무엇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집에서, 공장 기숙사에서 배회했던 명학은 노들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교사든 학생이든 신입들은 명학과 술을 마신 후에야 노들 사람이 된다는 말까지 돌았다.
명학은 ‘데모’에도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장에 묶인 몸이라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월차를 쓰고 데모에 나갔다. “거기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 왜 휴가까지 써서 데모하는지 말이야.” 그래서 뭐라고 했냐고 물었다. “이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 가야지.”
‘이것밖에 없다’는 말, 그 앞에 무슨 말이 생략된 것일까, 자꾸 생각해본다. 사람답게 사는 길?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 내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 장애인의 살 길? 확실한 것은 그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길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일을 쉬고 데모를 나가기로 한 것은 매우 상징적으로 보인다. 예전에 그는 일을 해야 가치 있는 인간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노동할 때 가치 있는 인간이 되지 못했다. 공장에서는 그의 노동, 아니 그의 존재가 가치 절하되었다. 명학은 노동할 때가 아니라 투쟁할 때 자신을 가치 있는 인간으로 느꼈다.
올해로 노들야학은 개교 30주년을 맞았다. 명학도 노들야학에 다닌 지 30년이 되었다. 그는 노들야학에서 가장 오랫동안 배운 사람이다. 개교 30주년을 기념하는 토크쇼에서 나는 그에게 노들야학에서 30년을 배운 사람으로서 가장 큰 배움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장애인들에게 비장애인처럼 살라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라고 말해 왔다, 그런데 노들야학에서 내가 배운 것은 장애인을 비장애인처럼 바꿀 게 아니라, 비장애인중심으로 만들어진 사회 환경을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함께 살 수 있게 바꾸어야 한다고.
“내 가치관이 변한 거지. 내가 생각하는 가치관이. [노들에서 오랫동안 지내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완전히 바뀌었어. 내 자신이 바뀐 거야. 맞지? 제2의 인생, 김명학의 제2의 인생.” 명학은 정말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전에는 말 그대로 집안에만 있었고, 사회라는 건 생각지도 않았어. 그런데 여기 와서 보고 들어보니까, 이거 맞네, 내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것이 완전히 틀렸네. 내 가치관이 여기서 변한 것 같아.”
명학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내 삶이 이런가보다 하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바꾸자고 외치는 운동가로 변신한 것은 놀랍다. 변신의 특별한 계기, 특별한 시점이 있지 않았을까. 명학은 내 물음에 다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런 건 없어. 한 번에 딱 생겼다기보다 계속 차곡차곡, 야학 수업도 계속 듣고 집회 나가서 사람들 만나고 발언도 듣고 그런 것들이 쌓인 거지. 어느 날 그런 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는 어느 날 꽃이 피듯 새로 피어난 사람이 아니고, 오랜 길거리 투쟁이 어느 덧 피부를 까맣게 바꾸어 놓듯이, 그렇게 변한 사람이다.
하지만 모질지 못한 성품은 여전히 어쩔 수가 없다. “마음이 약하고 강하질 못해. [데모 나가서도] 욕도 안 해. 욕을 해보지 않아서 욕을 못하겠어. 다만 투쟁에는 열심히 나가려고 해. 내가 당사자니까. 내 일이니까. 열심히 해야지.” 장애인으로서 차별받아 온 그동안의 삶이 억울하고 그 차별이 여전한 현재의 삶에 화가 나지만, 그래도 그의 운동을 추동하는 것은 억울함이나 분노보다는 책임감이었다. “내가 열심히 해보려는 이유. 다음 후배들이 나처럼 힘들지 않게 조금 좋은 세상에 살아야 해. 만날 같은 문제로 싸우게 하면 안 돼. 후배들은, 지금 나쁘지만 그래도 더 나은 곳에서 살아야지. 그런 생각이었어. 지금을 살아가는 선배로서 의무감, 책임감. 윗세대들이 좀 열심히 하면 아랫세대들의 환경이 조금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물론 내가 중증장애인 당사자니까 열심히 싸우기도 하지만 말이야.”
지난 20여 년간 명학은 많은 투쟁에 참여했다. 투쟁이 익숙하지 않았던 1990년대 평택 ‘에바다’ 투쟁이 기억에 남고, 혜화역 리프트 추락사건 때 혜화동 로터리에서 수요일마다 버스를 막고 싸웠던 일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다. 하지만 명학이 제일 중요한 투쟁으로 꼽은 것은 활동지원서비스 요구 투쟁이었다. 활동지원서비스는 장애인들이 자기 삶을 살 수 있기 위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전동휠체어와 활동보조인[활동지원사] 덕분에 장애인들이 사회활동을 하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어.” 더 이상 가족에 짐을 지우지 않고, 내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것, 그것이 활동지원서비스라고 했다.
장애운동을 하면서 서운한 것은 없었느냐고, 이런 건 고쳤으면 좋겠다 싶은 것은 없었느냐고 물었다. “크게 서운한 건 없었어요. 공동체에서는 내 주장이 옳아도 상대방과 함께 해야 가능하지. 내 고집이 강하면 상대방도 안 좋아해.” 명학 특유의 속내 감추기다. 사실 그의 고민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말을 안 듣는 것보다는 자신이 자기 생각을 잘 말하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요즘 그는 야학 교장으로서 발언할 일이 많다. “몇 마디 이야기하고 나면 금세 끝나버려. 못한 말이 너무 많아. 써서 읽으면 상관없는데, 즉흥적으로 연설할 때는 이야기가 금세 막혀버려.”
4. 노들의 연인 김명학 -“문지기로 계속 있을 거야”
현재 명학은 노들야학의 교장이다. 노들야학의 학생이면서 교장이다. 이런 학교는 세상에서 노들야학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는 이 배움의 공동체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이고, 이 배움의 공동체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여기 교사들이 존경하고 많은 배움을 얻는 학생이다. 따라서 학생인 그가 교장이 된 것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할지 모르지만, 노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다. “저는 노들이 참 좋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것도 좋습니다. 함께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습니다. 함께 밥 먹는 것도 좋습니다. 함께 집회에 나가 목청껏 외치고요, 우리 요구를 알리는 것, 힘이 나고 좋습니다.” 교장이 되기 훨씬 전에도 언제나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김명학, 노들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위처럼, 산처럼 노들야학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교장이 되었다고 했을 때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사진: 정택용)
“교장? 처음에는 막 반대했어. 정말 안 하고 싶었어. 진짜야! 이제 교장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교장이라는 칭호가 거북하고… 나 권력 안 좋아해.” 노들야학 교장이 권력이라고? 웃었더니 그가 정색하며 말한다. “아니야, 그것도 권력이야. 천성호 교장이랑 공동교장 한다고, 천성호 교장이 함께 하자고 해서, 참…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안 한다고 말하는 게 성립하지 않는 거야. 천성호 교장이 와서 ‘형이 해야지 누가 해. 지금까지 야학에 계속 있었잖아’ 그러는데 할 말이 없더라고.” 그렇다. 그가 교장을 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도 찾기 어려운 반면, 교장을 해야 하는 이유는 열 가지도 넘었다. “더 뺀다는 것도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고, 한 세 번째인가 말하기에 하겠다고 했어.” 말 그대로 삼고초려!
“고맙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어. 나를 사지로 모는 거지. 못하면 내가 막 자책하게 될 거 아니야. 그리고 비교는 안 좋지만 박경석 교장이 해온 것이 있어 가지고, 진짜 거기를 따라가려고 하는 건 너무 힘든데, 바로 뒤에 이어받았으니까 말이야. 지금도 많이 부족한데(한숨).”
명학이 교장을 맡기로 결심한 데는 전임 교장인 박경석에 대한 미안함도 한몫 했다. 그는 교장 이취임식 자리에서 경석에게 용돈 봉투를 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동생한테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라고. 명학은 매년 정초에 사람들에게 복돈이라며 천 원씩 나눠준다. 사람들은 “물가가 올랐는데 아직도 천원이냐”고 말하면서도 싱글벙글한다. 그런데 교장직에서 물러나는 경석에게 건넨 봉투는 제법 두툼했다. “교장 임기가 원래 2년이야. 지금은 3년으로 늘렸지만. 근데 무려 24년을 한 거잖아. 그걸 못 받쳐주고 다 떠맡겼다니, 너무 미안하지. 게다가 경석은 그것만 하는 게 아니잖아. 직함이 얼마나 많아. 동시대 함께 운동하는 사람으로서 너무 못 받쳐줘서 미안해. 교장 못 받쳐준 것도 그렇고 함께 운동하는 사람으로서도 미안하지.” 그는 한해 한해의 미안함을 담아 24만원을 넣었다.
교장 취임식에서 명학은 경석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석 동생 한번 노들이면 영원한 노들인 거 잘 알고 있지? 노들야학 교장직은 비록 퇴임을 했지만 우리 함께 노란들판에서 지금처럼 살아온 것처럼 우리 함께 살자꾸나. 꼬옥 함께 살자. 여기 우리와 함께한, 특히 24년 동안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선생님을 한 경석 동생에게 아주 작은 나의 마음의 선물인 용돈을 퇴임식에 준다는 것이 참으로 좋아. 늘 건강하게 활동을 하길 기원할게. 박경석 동생 마니마니 사랑해.” 무슨 연애편지 같다. 언제 찍었는지 두 사람이 다정한 연인처럼 손을 꼭 쥔 채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진도 있는데, 내가 참 좋아하는 사진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느냐고 물었다. “그냥 점차적으로.” 그러더니 바로 덧붙인다. “지금도 그렇게 친한 건 아냐.” 이건 또 무슨 소리냐고 웃으며 물었다. 명학은 틀림없이 경석을 좋아하지만 이 애정이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려고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명학은 경석의 노선과 지향을 사랑했다. 명학은 1998년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활동가의 다수가 한국DPI에 흡수될 당시 경석이 그것을 거부했을 때의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었다. 그만큼 그때의 일이 명학에게는 중요했던 것 같다. 당시 경석의 주장에 공감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묻자 “대장 따라가야지, 어떻게 해”라고 웃었지만 곧바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쪽은 보수였고 박 교장은 진보였어.”
명학의 기준은 독특했다. 둘 다 진보 아니냐고 묻자 “거기는 정부 지원을 받잖아. 한국DPI는 운동 별로 안 해. 법정 단체지.” 그는 이념이 다르다고 거듭해서 말했지만 어떤 점에서는 방식이나 스타일의 문제 같기도 했다. ‘거기’는 정부 지원금을 받으며 청원하는 식의 엘리트주의 운동가들이 주도하는 곳이지만, ‘여기’는 돈도 받지 않으니 자유롭게 비판하고 제약 없이 투쟁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거기는 집회도 못나오게 하잖아. 집회도 못나오면 뭘 할 수 있다는 건지. 싸워야 세상이 바뀌지.” 그리고는 경석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함께 표현했다. “박 교장이 한국 사회를 위해서도 장애계를 위해서도 정말 큰일을 하고 있어. 박 교장이 한국DPI 같은 데로 갔으면 더 편하게 살았을 텐데 오히려 이쪽으로 와서 더 고생이 심하지.”
‘이쪽으로’라는 말이 귀에 들어온다. 말하자면 명학은 ‘이쪽 사람’이다. 그는 경석보다 먼저 노들에 있었던 사람이다. 경석은 다른 쪽으로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사람이지만, ‘이것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는 ‘이쪽’으로 왔다. 그는 ‘이쪽’을 일구었고 ‘이쪽’에서 해방의 비전을 찾은 사람이다. 명학은 경석의 이러한 지향을 너무나 사랑한다.
교장으로서 노들에서 해보고 싶은 일을 물었다. “내년이 교장 선거야.” 포부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정말로 내년이면 3년 임기가 끝난다. 나는 명학이 교장직을 한 십 년은 맡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도 명학도 일이 그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하고 싶은 거? 지금처럼 예산이 쪼들리지 않고, 물론 그렇다고 많이 풍족하지는 않게, 알맞게 마련된다면, 지금 상근자들 업무를 좀 줄여주고 싶어. 월급도 너무 적은데. 이렇게 가면 안 돼. 꺾어지니까 마음들이. 견디고 견디다가 나가게 되니까. 떠나가는 사람들 보면 마음이 안타까워.”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그에게는 참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이 뒷모습은 어린 시절 학교에 가는 형제들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동료들의 뒷모습과는 다르다. 내 마음을 꺾고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지켜볼 수 있지만, 마음이 꺾인 채 내 곁을 떠나는 사람들은 마냥 그렇게 지켜볼 수가 없다.
“여기 활동가들은 정부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잖아. 장애인 평생교육,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여기도 어떻게 보면 학교인데 어떻게 이렇게 야박한지. 장애인도 교육받을 권리 있고, 교육을 멈추지 않고 계속 받으면서, 자존감 같은 것 높일 수 있어. 한 인간이 좀 풍부하게, 한 시민으로서 살아가면 그게 국가적으로도 좋잖아. 뭐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비장애인들에게는 교육받고 건강하게 사는 게 천부적인 권리인 것처럼 말하면서, 장애인들한테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정말 활동가들한테 풍족하지는 않지만 정말로 최소한이라도 생활을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고 싶어.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아. 자기가 안정이 되어야 뭐든 생각나는 게 있어. 막 불안해봐. 하고 싶은 것도 떠오르지 않지. 눈앞의 일만 처리하니 정신도 없고 피곤하지.” 두 번의 인터뷰 중 명학의 목소리가 가장 높아졌던 순간이다.
계속 교장으로 남아 이 일을 위해 싸워야 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교장] 안 받고 싶어. 그냥 노들에만 있는 걸로 감사하지.” 그러면서 옛날 야학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그곳은 ‘사람 사는 냄새’, ‘살아가는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곳이었다고. “그때는 정말 작았어. 그때 비하면 여기는 대기업이야. 이론만 생각하고 이론하고 싸워.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작아도 그 안에서의 일상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났지. 술 마시면서 서로 사는 이야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면서. 그때 이야기 하면 [지금] 사람들이 또 막 뭐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그때와 똑같이 있을 수 있느냐고 타박해. 그러면 나 얘기 안 해. 옛날 참 재밌었는데…”
노들야학 개교 30주년 토크쇼에서 박유리 교사는 자신에게 노들은 더 이상 ‘밑불’이나 ‘불씨’가 아니라 활활 타는 불이라고 했다. 정말로 노들은 규모도, 사회적 영향력도 많이 커졌다. 그런데 명학은 아직도 작은 모닥불 시절의 노들을 그리워하고 거기에 노들의 정신이 있다고 믿고 있다. “함께 밥 먹고 또 누군가가 싸워. 그리고 다시 나누어 먹고 누가 뭔가 사오면 같이 먹고. 그것도 먹는 맛이 있지.” 마치 눈앞에 스크린이 펼쳐진 듯 명학은 그때의 일들을 묘사했다. 자주 그때를 떠올리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타박해. 또 그 이야기 한다고. 인제는 그 이야기 안 해. 혼자 생각만 하지.”
그때가 노들이 제일 잘 나가던 소위 ‘리즈’ 시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잘 나간 건 아니야. 그보다는 희망이 보이던 때라고 해야겠지. 사랑과 기쁨이라고 해야 하나. 사랑, 기쁨, 관심…” 1990년대 노들야학이 발행했던 소식지인 『부싯돌』과 지금 발행하는 『노들바람』의 차이일까. 그는 “부족하지만, 부족해도 서로 맞춰가면서” 살았던 『부싯돌』 시절을 그리워했다. “지금은 수업이 끝나면 그냥 다 가버려. 개인주의라고 할까. 규모는 커지는데 공허하고 허탈하고.”
이것이 명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론도 필요하고 정책도 필요하고 권리를 위한 투쟁도 필요한데, 그 밑바탕에는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환하게 웃기도 하고, 고통을 껴안고 울기도 하고, 함께 울분을 내지르기도 하는, 어떤 감정들, 어떤 정서들이 있고, 명학은 이것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 역시 이 정서들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2019년 탈시설투쟁 10년을 기념하는 토크쇼에서 야학 교사였던 은전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는 최중증장애인인 기두님이 야학에 처음 왔을 때,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 노들의 활동가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니는 일단 밥을 먹어야 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은전은 “세상이 다 망해도 노들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세상 끝에서 ‘언니는 일단 밥을 먹어야 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세상은 정말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은전이 그 말을 했을 때 노들 사람들 몇몇이 눈물을 터뜨렸다. 노들의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노들에서 자라나는 모든 식물들의 뿌리가 향하는 쪽, 노들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가슴에 한 컵 정도는 가지고 있는 그것, 나는 그것을 노들의 정서라고 부르고 싶다. 이것이 노들의 교육, 운동, 투쟁이 힘을 얻는 원천이다.
명학이 사랑과 기쁨에 대해 말했을 때 내 귀에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가 사랑이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꺼냈을 때 기분이 참 좋았다. 잠자코 그 말을 음미하다가 문득 그에게 던져보았다. 연애는 해보았느냐고. “말 주변이 없어서 연애를 어떻게 해.”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있기는 한데 말 주변이 없어서…” 수줍게 안으로 들어가는 목소리. “근처에 있어. 서로 사귀는 건 아니고 짝사랑. 오래됐어. 그 사람이 알랑가 모르겠어.” 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노들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다는 것만을 확인하고 더 묻지는 않았다.
십 년 뒤, 이 십년 뒤 명학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런 생각 안 해봤어. 노들이 내 옆에 있었는데 든든했지. 지금도 든든해. 노들에는 고마움이랄까 부채감 같은 게 있어. 그래서 힘닿는 데까지 그냥… 장담은 못하지만 지금 생각에는 그냥 쭉…” 은퇴할 생각? “은퇴는 있을 거야, 교장은. 다만 문지기, 문지기로 계속 있을 거야.” 노들의 학생이었고 노들의 교장이었던 사람이 노들의 문지기로 남는 모습을 그려본다. 꽤나 근사할 것 같다. 명학은 은퇴해도 노들이다. 명학은 노들이 있어서 든든하다고 했지만, 명학이 있어 노들이 참 든든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알랑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