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가을 135호 - [특집_노들장애인야학 개교 30주년] 내가 당신을 봤어요 / 미류
특집_노들장애인야학 개교 30주년
내가 당신을 봤어요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인간의 존엄에 던져진 질문들에 정직하게 답하고 싶다. 평등에 도전하는, 세상을 바꾸는 힘들을 연결하는 데 관심이 많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마을버스가 한 대 지나갔다. 전에 내가 알던 마을버스의 모양과는 완전히 다른, 말로만 듣던 그 저상버스였다.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스타를 마주친 것처럼 나는 신나는 마음이 되었다. 내가 당신을 봤어요! 내가 당신을 본 걸 꼭 말해주고 싶은데 하필 너무 많은 얼굴이 떠올라버렸다. 얼굴들. 버스를 타자며 버스를 멈춰 세웠던 얼굴들. 저상버스를 도입하겠다는 약속이 기약 없는 공문구가 될 때마다 싸웠던 얼굴들.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들을 꼽아보려니 시간이 걸렸고, 잠깐의 감동이 지나가고 보니 마을버스 한 대에 감격한 게 머쓱해졌다. 20여 년 가까이 이어진 이동권 투쟁을 돌아보면, 지금 마을버스 한 대를 보고 즐거워할 때는 아니잖은가. 스타는 알아주지도 않는데 혼자 마음이 널 뛰었던 에피소드.
노들장애인야학이 개교 30주년을 맞았다는 말에 그 얼굴들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사실 사람 얼굴을 떠올리며, 그 사람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소속을 적는 방식으로 떠올리지는 않았으므로, 그때 노들야학을 떠올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때 떠올린 이들 대부분이 노들야학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노들야학을 떠올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노들야학 30주년을 축하하는 글을 쓰면서 이것이야말로 곤란한 점인데, 노들야학과 장애인 차별철폐 투쟁의 역사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례로 내가 만난 첫 노들야학은 지금 교장을 맡고 있는 김명학이다. 그는 기억할지 모르겠으나, 2004년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노숙농성을 할 때 나와 둘이 당번을 하게 된 날이 있었다. 조금 쌀쌀한 날씨였으므로 휠체어에 앉아 같은 자세로 자리를 지켜야 하는 그를 나는 걱정스러워했는데, 그는 별말이 없었고 대체로 웃는 얼굴이라 나의 걱정은 어디까지 동정이며 어디까지 연대인지 혼자 되물어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돌아보면 당시 만났던 다른 이들, 예컨대 박경석은 노들야학 교장이었고 다른 활동가들도 노들야학의 교사거나 학생이었다. 단지 장애인이동권연대 같은 투쟁체에 다른 직책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내가 만난 첫 노들야학을 누구라 특정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정립회관 폭력 사태와 점거 농성이 이어지던 어느 날, 다음날 침탈이 있을 거라는 소식에 늦은 밤 어두운 골목을 따라 작전을 하듯 숨어 들어간 건물에서 노들야학 교실을 봤을 때가 첫 만남일지도. 아니면 이름만 알던 노들야학이 벌써 20년을 맞았다며 배움과 투쟁과 일상을 기록한 『노란들판의 꿈』(당시 제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을 읽었을 때가 “내가 당신을 봤어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첫 순간일지도. 이런, 노들야학은 알아주지도 않는데 다시 나 혼자 마음이 널뛰고 있다.
노들야학은 30년 연혁의 절반을 농성이나 투쟁으로 채웠다. 노들야학 사람들은 이렇게 장애인 차별철폐 투쟁의 역사와 노들야학의 역사가 쉽게 구분되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다른 사람들이 ‘노들야학’을 만나는 일이 흔치 않지만 어디선가 노들야학을 늘 만나는 느낌이라고 할 때, 한편으로는 뿌듯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롭거나 서운할 수도 있겠다. 노들야학의 교사나 학생이나 활동가가 아니고서는 ‘노들야학’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그만큼 노들야학의 일상은 잘 몰라준다는 말일 테니 말이다.
2008년 마로니에공원의 천막 야학은 그 일상을 슬그머니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늦은 밤 천막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무척 따뜻하고, 조금은 황홀했던 풍경이었다. 비바람에 한없이 취약하고 화장실 이용도 어렵고 수업에 집중하기란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겠지만, 노들야학을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는 ‘배움과 투쟁’의 빛깔을 나는 그 천막의 불빛으로 기억한다. 일상을 만들어가는 시간의 피곤함과 짜증, 한 스푼의 미움과 쓸쓸함 같은 것들까지 한 덩어리로 엉키면 따뜻함이 된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런 감정이 밖에서 볼 때 가능한 낭만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노들야학이 어떤 투쟁의 역사로 환원될 수 없는 황홀한 장소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진실인 듯하다. 노들야학으로 배움을 찾아 왔던 이들이 권리 투쟁의 당사자가 되어가는 시간. 어쩌면 노들야학에 배움을 전하러 찾아 갔던 이들이 권리의 언어를 오히려 배워가는 시간. 교사와 학생이 함께, 새로운 세계를 그려낼 새로운 언어를 만나 가는 시간. 노들야학의 소식지나 영상들에서 쏟아져나오는 이야기들이 그걸 증언한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장소.
이야기는 아무 데서나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상이 허락하는 틀에 갇힌 말들을 한 끗 차이로 비틀기 시작할 때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끗 차이를 만들기란 쉽지 않은데, 세상이 허락하는 틀이 그만큼 견고하기 때문이다. 지하철과 버스를 탈 수 없어 집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거나, 시설이 세상의 전부인 오랜 시간에 갇혀 있었다거나 할 때, 노들야학은 그 틀을 넘어서보고 싶은 용기를 주는 장소였다. ‘장애인’으로 뭉뚱그려진 이름 대신에 노래를 좋아하는 누구, 춤을 잘 추는 누구, 그림을 그리기 싫은 누구가 될 수 있고, 노동자이고 시민이고 여성이고 친구인 누구가 되어가는 장소.
배움과 투쟁, 또는 배움이자 투쟁.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뒤섞이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장소에서 시작된 일이다. 우리가 흔히 학교를 떠올리며 교과목이나 수업방식, 시험과 성적, 다음 단계를 위한 디딤돌 같은 것을 연상하게 하는 틀을 훌쩍 넘어서 노들야학은 그 자체로 배우고 싸우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학교가 무엇인지를 다시 정의하게 만든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곳. 싸우는 방법만큼 치유하는 방법을 서로 배우고, 상처받는 경험을 통해서 사랑하는 경험을 만들 수 있는 곳이다. 장애인야학은 교육 기회로부터 배제된 장애인을 위한 학교로 만들어졌다지만, 사실은 우리 사회에 교육이 무엇이고 학교가 어떤 장소여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만들어낸 사람들, 거리에 저상버스가 다니게 한 사람들, 활동지원제도와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만들고, 장애인 권리 보장과 탈시설을 위해 오늘도 싸우는 사람들. 이런 투쟁의 역사는 천막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처럼 내가 아는 겉모습일 뿐이지만, 그 안에 어떤 빛이 있다는 걸 알려주기도 한다. 그래서 늘 기웃거리게 하는 힘이 거기에 있는데, 노들야학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기웃거리지 마라! 세상이 정한 틀을 기웃거리는 데서 새로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으므로.
노들음악대의 첫 공연을 만났던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공연은 중증장애인들‘도’ 음악을 한다는 걸 보여주기보다 ‘음악’은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했다는 점에서 충격이었다. 익숙한 리듬과 멜로디를 기대하기란 꽤 어려웠는데도 몸이 함께 출렁이고 마음이 일렁이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노들이라면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걸 보면서 마치 노들음악대가 ‘당신도 뭐든지 해낼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노들음악대를 기웃거리기만 하지 말고 음악을, 합주를, 앙상블을 다르게 상상하라는 배움이랄까.
30주년을 맞은 노들야학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우리는 함께 노동하고 공부하며 세상을 바꿔나갑니다. 조금씩 조금씩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노들야학은 최근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만들며 노동자라는 이름의 자리를 넓히고 있다. 노들이라면 노동조합도 곧 만나게 될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노들노동조합은 다시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조합을 상상하게 하겠지. 이렇게 이어질 노들야학의 역사에서 나는 “조금씩 조금씩”이 가장 설렌다. 3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저상버스가 현실이 되는 시간처럼, 그저 함께 노동하고 공부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 노들야학이기 때문이다.
배움의 본뜻을 노들야학으로부터 배웠다고 내가 말해도 노들은 알아주지 않겠고, 나는 또 혼자 스타를 마주친 팬처럼 혼자 막 설레다가, 누구한테 싸인을 받아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또 시무룩해지겠지만, 내가 당신을 봤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