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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비마이너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 곳에서의 400일

  지하철행동 400일째, 국회의사당역에서의 발언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다.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으며, 읽기의집 집사이기도 하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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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만나러 어딘가를 찾아갔는데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식당에 갔는데 입구에 턱이 있습니다. 카페에서 친구와 만나고 화장실에 갔는데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연극을 보러 갔는데 엘리베이터도 없는 지하 1층입니다.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여기는 나를 환영하지 않는구나, 여기는 내가 올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공간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 겁니다.

 

​  장애인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많을 겁니다. 영어에 ‘out of place’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적절하다’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옮기면 ‘장소가 어긋났다’, ‘제자리가 아니다’ 정도 될 겁니다. 장애인들이 이런 곳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시선이 한목소리로 외칩니다. ‘여기는 네가 올 곳이 아냐, 여기서 나가줘!’ 말하지 않아도 또렷하게 들립니다. 학교도 그렇고, 직장도 그렇고, 버스도 그렇습니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김순석 열사가 편지에 썼던 말이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살 땅은 어디입니까.”​

 

  출근길 지하철 행동이 400일을 맞았습니다. 2001년 이동권 투쟁이 시작된 이래 이렇게 큰 주목을 받았던 적이 있을까 싶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욕을 세게 먹었던 적이 있을까 싶어요. 2001년에는 지하철 선로까지 점거해서 열차 운행 자체를 막았는데요. 그때도 욕을 먹었지만 이렇게 전국적으로 거세게 욕을 먹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비장애 시민들은 분노하는 걸까요. 분노의 이유는 ‘out of place’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 이 시간에 당신들이 들이닥치면 안 된다는 거지요. 한마디로 ‘여기는 당신들이 올 곳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시간도, 장소도, 대상도 틀렸다고. 출근 시간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압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습니다. 이번 일이 아니어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출근길 열차나 버스에 전동휠체어를 밀고 들어갈 만큼 용감한 장애인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욕먹을 각오를 하고 이러는 겁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장애인들은 오랫동안 비장애인들에게 걸리적거리지 않는 곳, 심지어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서 지내왔습니다. 수십 년간 집구석에만 있었고, 공기 좋고 물 좋은 숲속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언제 돌아다녀야 하나요? 야밤의 곤충들처럼 비장애인들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는 시간에만 돌아다닐까요? 괜히 놀러 간답시고 시외버스나 고속버스 탈 생각은 말고, 서울 같은 대도시, 대로변에서, 한적한 오후 시간에만 저상버스 타고 다니면 되나요? 우리는 그래야만 하는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시민권은 조건부 시민권이고, 우리는 조건부 시민입니다. 비장애인들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만 시민 행세를 할 수 있으니까요.

 

  작년 대항로 사람들이 만든 뮤지컬 「누가 죄인인가」의 영상을 보았습니다. 도입부에 지하철 행동에 화가 난 출근길 비장애 시민들의 실제 반응들을 삽입해 놓았는데요. 거기 한 시민이 장애인들에게 제발 빨리 내리라며 애원하듯 말합니다. “도와줄게요. 도움이 필요하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하세요.” 그러자 한 장애인 활동가가 말합니다.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그 시민은 “왜 필요 없어요. 에잇, 그럼 빨리 좀 가요. 빨리! 원하는 게 뭐에요.” “일상에서 같이 살고 싶습니다!” 그때 곁에 있던 이형숙 대표님이 말씀하셨죠. “근데 왜 피해라고 생각하세요?” 그러자 그 분이 말합니다. “우리 시간을 빼앗고 있잖아요!” 이형숙 대표님이 항변하셨어요. “그럼, 우리 시간은, 우리 시간은요?” 그분 답변이 인상적이더군요. “스스로 버세요, 시간을 스스로 버세요.”

 

  언뜻 보면 이 시민의 반응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계속 도와주겠다고 말하면서 우리 시간을 빼앗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장애인들이 이동권 제약 때문에 평생 동안 빼앗겨온 시간에 대해서는 스스로 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 분의 말은 아주 일관됩니다. 이런 뜻입니다. 나는 당신들처럼 불쌍한 사람들,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도울 생각도 있다, 하지만 출근길을 방해하면 안 된다, 출근길 지하철은 스스로 돈을 벌어서 먹고사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출근길 지하철이란 이 분이 “우리 시간을 빼앗고 있잖아요!”라고 말했을 때, 그 ‘우리’의 공간이라는 뜻입니다. 출근길 지하철은 ‘자립’적인 ‘우리’한테 ‘의존’해서 먹고 사는 ‘너희’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의존과 자립에 대한 긴 이야기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어떤 장애학자의 말처럼 타인의 도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발을 신고 걸을 때도, 책을 읽고,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아침 식사를 하고, 버스와 지하철을 타는 모든 순간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 자신이 의존할 것들이 잘 갖춰져 있어서 쉽게 그것을 선택하고 이용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존합니다. 우리는 ‘함께’ 살고 있고, ‘함께’ 덕분에 살고 있는 겁니다. 다만 장애인들은 이 ‘함께’에서 배제되었고, 그래서 그 시민분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우리는 계속 “일상에서 같이 살고 싶다”고 말하는 거죠.

 

  여기가 문제의 장소입니다. 같이 산다는 말, 함께 산다는 말이 입증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물론 출근길 지하철은, 장애인들이 대통령실이든, 국회든, 시청이든 정말 온갖 곳에서 온갖 방법으로 장애인권리 보장을 외쳤고 더 이상이 방법이 없어서 온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또한 이 모든 문제들의 바탕, 우리 사회가 비장애중심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핵심 장소입니다. 학교에 가고 일터에 가는 사람들, 우리 사회의 정상적 삶이 무엇인지, 장애인들은 감당하기도 힘든 속도와 밀도로 이루어진 시공간, 바로 여기입니다. 장애인의 권리를 인정한다고 제아무리 떠드는 사람도 이 시간에 여기는 안 된다고 말하는 곳, 바로 여기입니다. 장애인의 시민권은 조건부 시민권이고 장애인은 조건부 시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곳, 바로 여기입니다.

 

  시간도 맞고 장소도 맞고 대상도 맞습니다. 지금 여기 출근길 지하철의 당신,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장애중심주의 사회인지, 이 구조적 차별을 어떻게 없애야 하는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그것을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행동해야 하는 사람은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아니고, 바로 당신이니까요. 우리는 아주 제대로 된 시간에 제대로 된 장소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인 당신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살 곳은 어디인가요?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시간은 언제인가요?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 곳에서 무려 400일의 아침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400일 동안 우리는 우리가 있어야 할 시간에, 우리가 있어야 할 장소에, 우리가 말을 건네야 하는 사람들 앞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환영받지 않았지만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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