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겨울 133호 - [고병권의 비마이너] 141일의 삭발식 / 고병권
고병권의 비마이너
141일의 삭발식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 저런 책을 써왔다.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으며, 읽기의집 집사이기도 하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장애인들의 출근길 지하철 투쟁이 1년이 되었다. 장애인에게도 교육받고, 노동하고, 시설이 아닌 동네에서 살 권리가 있다는 당연한 말을 당연한 말로 만드는 것이 참 힘들었다. 20년 전부터 선로에 뛰어들고 도로를 기어가는 일을 숱하게 반복하고 나서야 이동편의증진법, 특수교육법, 장애인차별금지법, 발달장애인권리보장법 등이 제정되었다. 그런데도 장애인들의 권리는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미흡한 법률도 문제였지만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은 탓이 컸다. 정부는 매년 예산이 아니라 말을 책정해왔다. ‘노력하겠다’, 이것은 말이지 돈이 아니다. 그리고 말로써는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 ‘장애인권리예산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담은 투쟁이 이토록 계속된 것은 정부가 자꾸 돈 대신 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지난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출근길 지하철탑승시위를 잠정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이달 국회에서 예산안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참 반향이 큰 시위였다. 감히 출근길 대란을 일으키다니. 엄청난 비난과 욕설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덕분에 사상 처음으로 여당 대표와 TV 토론도 할 수 있었고 응원하는 사람들도 제법 생겨났다.
이 시위는 크게 두 장면으로 이루어져있다. 뉴스 화면에 잡히는 것은 주로 두 번째 장면이다. 출근길 대란, 열차의 연착, 열차 안의 다툼. 하지만 위대한 사건은 소란이 아닌 고요 속에 있다고 했던가. 정작 이번 시위가 왜 일어났는지를 말해주는 것은 거의 보도되지 않는 첫 번째 장면이다. 탑승 시위 전에 열리는 삭발 결의식. 삭발에 나선 당사자는 자신이 이 투쟁에 나선 이유를 들려준다. 겨우 3분, 5분, 10분의 시간에 그는 자신이 살아온 10년, 30년, 50년의 세월을 담는다. 웃으며 말할 때조차 그는 참석자 모두를 숙연케 한다. 그가 이야기를 마치고 삭발을 하고 나면 동료들은 그를 따라 객실 안으로 줄지어 들어간다. 이것이 지하철탑승시위다. 이 일이 무려 141차례 있었다.
인터넷 언론 ‘비마이너’에는 이 141차례 삭발식에서 178명이 꺼내놓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첫날 삭발자였던 장애운동가는 곧 쏟아질 욕설들을 알고 있었다. “제가 지하철 선전전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시민 여러분, 불편을 끼쳐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입니다. 장애인으로 살면서 항상 무엇이 미안한지, 무엇이 죄송한지, 입에 껌딱지처럼 달고 말을 합니다.” 그는 지하철에서만 욕을 먹은 게 아니라고 했다. 길을 가다가 걸리적거린다고 욕먹었고, 엘리베이터 늦게 탄다고 욕먹었고, 식당에서 휠체어 때문에 공간 많이 차지한다고 욕먹었다고 했다. “오늘은 또 시민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욕설을 할까요?” 그는 그날도 ‘죄송합니다’로 말을 시작했고 예상했던 대로 무시무시한 욕설을 들었다.
둘째 날의 삭발자는 이렇게 말했다. “시민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는 단지 지하철을 타는 우리 시민분들의 삶이 부러웠습니다.” 다섯째 날의 삭발자는 집에서 40년, 시설에서 15년을 살았노라고 했다. 태어나서 무려 55년 동안 학교를 다녀보지 못했고, 뒤늦게 야학을 다녔다고, 제발 장애인들의 교육을 보장해달라고 했다.
무려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삭발했던 4월19일. 중증발달장애인 아들을 둔 어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평생 ‘내가 우리 아들보다 하루만 더 살면 좋겠다’고 소망해왔습니다. 이제는 이런 소원 품지 않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있든 없든 자식이 당당하고 평등하게 사는 게 제 첫 번째 소원입니다.” 중증발달장애인 손자를 둔 할아버지도 머리를 밀었다. “내 나이가 80을 앞두고 있으니 하루하루가 눈물입니다. 지금은 기력이 돼서 손자를 돌보고 있지만 딸에게 오롯이 손자를 안기고 인생을 어찌 떠날 수 있을까요. 죽어서도 계속 손자 곁을 맴돌며 눈물 지을 것 같습니다. 국가책임제가 만들어지는 그날까지, 제 여생을 바쳐 최후 순간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한 장애운동가는 삭발 중에 옛 기억을 떠올리며 울먹였다. “아무 말도 못하고 (계단 앞에서) 30분을 그냥 있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척수성근위축증을 앓는 어느 장애인은 “처절한 제 삶의 약함을 드러내며 함께 살고 싶다고, 저도 한 시민으로 존엄하게 살고 싶다고 용기를 내어 이 자리에 섰노라”고 했다.
이들 모두가 머리를 밀었다. “머리가 꾸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던 뇌병변장애인도, “시설에 있을 때 만날 머리를 빡빡 밀고 살아서 시설에서 나오고는 머리에 공을 많이 들인다”는 탈시설장애인도 머리를 밀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마음을 담아 활동가, 사회복지사, 기자, 의사, 연구자들이 머리를 밀었다. 141차례 다른 사람들이 141차례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모두 머리를 밀었다. 141일의 아침은 쏟아지는 욕설은 같았을지라도 모두 다른 아침이었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우리는 서지 않는 열차 앞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들이다
2022년 12월 16일 오전 8시 삼각지역.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의 ‘무정차 통과’ 조치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기자회견을 열어 규탄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 기자회견에서 노들장애학궁리소 고병권 연구활동가는 무정차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발언문을 낭독했습니다. 발언문을 <노들바람>에 옮깁니다. - 편집자
‘노들장애학궁리소’와 ‘읽기의 집’에서 활동하는 고병권입니다. 오늘 저는 ‘지하철의 무정차’라고 하는 끔찍한 폭력을 규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가 한 달에 한 번, 신문에 칼럼을 씁니다. 지난주 출근길 지하철 탑승 투쟁 중에 있었던 삭발 결의식에 대해 썼습니다. 우리 모두 잘 알듯이 출근길 지하철 투쟁은 두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삭발식이 열리고 그다음에 단체 탑승 행동을 합니다.
언론은 두 번째 장면만을 주목합니다. 출근길 대란, 열차 연착, 열차 안에서의 다툼 같은 게 사람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라고 보는 거지요. 그런데 이번 시위가 왜 일어났는지, 이번 시위의 이유를 말해주는 것은 첫 번째 장면입니다. 매일 아침 한두 분이 나와서 삭발하기 전 발언을 했습니다. 왜 자신이 이번 시위에 나섰는지. 5분, 10분, 정말 짧은 시간인데 거기에 자신의 수십 년 생애를 담아냈습니다. 삭발자가 웃으며 말하는 날에도 듣는 사람들은 눈물을 훔쳐야 했습니다. 삭발식이 끝나면 삭발자를 따라 줄지어 열차에 탑승했습니다. 이것이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였고, 무려 141차례나 이것을 반복했습니다. 이 소중한 이야기를 알리고 싶어 칼럼을 썼습니다.
그런데 신문사에 원고를 보낸 날, 서울시가 장애인이 시위를 벌이는 역에서는 지하철 무정차를 검토한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순간,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칼럼 주제를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화가 나니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손을 들어도 버스도, 택시도 서지 않았던 세월, 탈 수 있는 대중교통을 가져보지 못한 세월을 숱하게 보냈고, 아직도 곳곳이 그런 상황인 나라에서, 장애인들 앞에서 대중교통을 세우지 않겠다는 말을, 그것도 공공기관이 서슴지 않고 내뱉다니요. ‘무정차’라고 하는 세 글자는 그동안 이 나라에서 장애인이 평생 당해온 차별과 폭력을 압축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당국에서 장애인을 협박하며 쓰고 있습니다.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조선일보 기사에 “서울시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한 공무원의 아이디어를 접수한 국회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고 하더군요. 전언에 따르면 대통령실 공무원의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저를 정말로 부들부들하게 만든 것은 ‘아이디어’라는 말이었습니다. 무정차가 아이디어랍니다.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는 거죠. 도대체 뭐가 기발하다는 거죠? 장애인의 목소리를 차단하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기막힌 방법을 찾았다는 건가요? 지난 1년간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요구하며 싸워온 장애인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골탕 먹일 방법을 찾았다는 건가요? 아니면 정부가 손쓰지 않고 시민을 갈라쳐서 싸움 붙이는 방법을 찾았다는 건가요? 뭐가 아이디어입니까, 뭐가 기발합니까. 이게 공무원 머릿속에서 나왔다고요?
저는 공무원의 머릿속에서 ‘무정차’를 떠올린 것의 정체, 그 생각을 듣고 ‘아이디어’라고 환호한 사람들, 정말로 ‘묘수’라고 손뼉 쳤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것의 정체, 또 그것을 듣고 그렇게 하라고 했던 서울시장의 머릿속에 있는 것의 정체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무정차라는 말속에서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을 머릿속 그 괴물 말입니다. 그 괴물이 바로 우리를, 우리 장애인을 바깥에 못 나가게 집에 가두거나, 시설에 내던진 그 괴물 아닙니까. 그 괴물이 바로 우리를, 우리 장애인을 학교나 일터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만든 그 괴물 아닙니까. 그 괴물이 바로 우리를, 우리 장애인을 짐짝이라고 부르고, 출근길 방해하지 말라고 욕설을 퍼붓는 그 괴물 아닙니까.
수십 년이 지나도 우리 장애인이 기다리는 차들은 좀처럼 오지 않고 우리가 타야만 하는 차들은 좀처럼 우리 앞에 서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지 않는 버스, 서지 않는 택시, 서지 않는 열차 앞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들입니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지난 141차례 매일 아침 삭발자의 이야기는 모두 서지 않은 열차, 장애인 앞에서 무정차 했던 열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첫번째 삭발자였던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님. 삭발하시며 말했죠. 지하철 타며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시민 여러분, 불편을 끼쳐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마치 타지 말아야 할 사람이 탄 것처럼 말이죠. “장애인으로 살면서 항상 무엇이 미안한지, 무엇이 죄송한지, 입에 껌딱지처럼 달고” 사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장애인이 열차를 타는 일, 장애인도 열차를 타야 한다고 말하는 일이 ‘죄송하다’고 말하는 일이어야 하는 사회인 겁니다.
작년에 신문에서 읽은 이형숙 회장님과 따님인 은별 씨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김포로 이사한 후 귀가를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추운 겨울날, 장애인이 탈 수 없는 ‘계단버스’가 계속 지나갔습니다. 은별 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수다를 떨었다고. 장애인이 감수해야 할 당연한 불편함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엄마가 조용히 말했답니다. “한 시간째다. 계단 있는 버스여서 타지 못하고 그냥 보낸 게.” 평생을 그렇게 보낸 버스가 그날도 그렇게 지나간 겁니다.
장애인이 탈 수 없는 버스, 장애인 앞을 지나쳐가는 버스는 버스모양만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이 사회 전체가 이런 버스입니다. 얼마 전 삭발을 했던 이천이삭장애인자립생활 센터의 송현우 활동가님의 말에서도 그 계단버스를 보았습니다. 학창 시절,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체육 시간에도, 체험학습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장애인이니까, 걷지 못하니까, 뛰지 못하니까, 너를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너는 교실에 남아 교실을 지켜.” 그렇게 그를 교실에 혼자 남겨둔 채로 체험학습도, 체육 시간도 계속 무정차 통과해 버렸습니다.
너는 장애인이니까 집에 남아 있어. 너는 장애인이니까 시설에 남아 있어. 너는 장애인이니까, 너는 걷지 못하니까, 너는 듣지 못하니까, 너는 말하지 못하니까. 그리고 이제는 훈계하듯이 말합니다. 너는 장애인인 주제에 고분고분하지 않으니까, 너는 장애인인 주제에 출근하려고 드니까, 이제부터는 너를 태우지 않을 거야, 너는 승강장에 그대로 있어.
우리는 이형숙 회장님이 기다린 버스 승강장에서, 송현우 활동가님이 남아 있던 교실에서, 그리고 엊그제 무정차한 이 승강장에서 너무 오래 기다려온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노력한다’는 말뿐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장애인이 탈 버스는, 열차는 오지 않는데, 기다리면 그 버스, 그 열차가 올 거라는 말을 수십 년을 들었습니다. 지하철 이동권 시위가 본격화된 2002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2004년까지 모든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저상버스와 리프트가 장착된 특별교통수단을 마련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022년인 지금도 우리는 2004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15년 박원순 시장은 “2022년까지 모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2022년이 지금 끝나가고 있습니다.
더 거슬러 가 볼까요. 40년 전 김순석 열사가 ‘서울 거리의 턱을 없애달라’는 유서를 쓰고 음독 자결하던 날. 그 유서의 공식 수신인이었던 염보현 당시 서울시장은 “조간신문에 눈물겹도록 기막힌 이야기가 씌어있었다”며 “교통 건설 보사국 등 관련 부서 간의 충분한 협의를 거쳐 횡단보도나 건축물에 장애자의 편의를 도울 수 있는 시설을 단계적으로 갖추도록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합니다. 40년 전의 충분한 대책이 시행되기를 우리는 40년이 지나도록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시간이 가고 하루가 가고 1년이 가서, 4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기다리다가 인생이 다 끝날 지경입니다. 이제는 더 기다릴 수 없다고 하니,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아예 무정차 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열차가 인류사에 처음 출현한 이래로 세상의 진보를 믿었던 사람들은 곧잘 역사를 열차에 비유해왔습니다. 우리는 삼각지역을 거쳐 숙대입구역으로, 그리고 서울역으로 열차가 나아가듯 인류는 진보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사의 이전 역에서는 남성의 권리만 보장받았지만 다음 역에서는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고, 이전 역에서는 인권이 사실상 백인만의 권리였지만 다음 역에서는 유색인의 권리이기도 할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역사가 장애인의 권리가 보장되는 역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열차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더 보편적인 권리로 사회 진보의 열차가 나아가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번 일을 보니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혐오는 더욱 악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 기차의 통제실에서는 수십 년째 장애인이 열차를 타지 못하고 있음을 알리는 대신, 장애인 탓에 열차가 운행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 열차의 기관실, 이 열차의 머릿속에는 ‘무정차’라는 말이 기막힌 아이디어라며 언제든 튀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21년의 투쟁으로 우리의 열차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 그것은 이 열차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비장애인 중심주의의 레일 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를 태우지 않는 기차, 우리 앞에서 정차하지 않은 기차가 우리를 우리가 원하는 역까지 데려다줄 리 없습니다. 이 열차가 달리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한 세기 전, 발터 벤야민이라는 비평가가 말했습니다. 혁명은 기관차가 아니라고. 혁명은 이 열차를 타고 있는 인류를 위한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라고. 이 열차를 세워야 합니다. 비상 브레이크를 걸어야 합니다. 계단버스를 막아야 저상버스가 들어오고, 무정차 열차를 막아야 정차하는 열차가 들어옵니다. 그제야 우리의 기다림이 끝날 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