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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비마이너

노래를 만드는 공장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다.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으며, 읽기의집 집사이기도 하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노래를 만드는 공장. 왠지 동화책 제목 같다. 그런데 이런 공장이 정말 있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뒤편 유리로 덮인 작은 빌딩에 있다. 정확한 이름은 ‘노들노래공장’이다. 2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협업해서 노래를 매주 한 곡씩 만들어낸다. 주문도 받는다. 가사를 적어 보내면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고 직접 불러주기까지 한다. 공장 홈페이지(nonogong.kr)에는 이들이 생산한 음원과 악보가 공개돼 있다. 누구나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이 노동자들의 정체다. 이들 대부분은 탈시설한 중증발달장애인이다. 노래공장이 정말로 노래를 만드는 공장인 것처럼, 이들도 정말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다. 서울시의 ‘권리중심 중증장애인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을 통해 지난 2년간 임금이 지급됐다. 이 지면에 몇 차례 소개한 것처럼, 이 사업은 노동이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복지시책이 아니라 장애인이 ‘주체’로서 행사하는 권리이며, 그 형태도 비장애인 흉내내기나 보조하기가 아니라 중증장애인만이 해낼 수 있는 ‘맞춤형’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이들의 노동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공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취지로 만든 것이다.

 

  뮤지션인 만수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장애인들이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생산하는 주체”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기막힌 모델을 떠올렸다. 공장이지만 상품을 생산하지 않고, 노동을 하지만 이윤을 생산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에 가치를 더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는 노래공장을 열었다. “이곳의 기조는 ‘우리의 노래 우리가 만든다’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부르는 노래. 그것을 세상에 내놓겠다는 것이다.

 

  정말 중증장애인들이 노래를 만들었느냐고? 그렇다. 뮤지션인 만수와 비장애인 매니저들은 지원업무를 수행했고 최대한으로 말해도 협업을 했을 뿐이다. 가사도 곡도 기본적으로는 중증장애인노동자들한테 나온 것이다. 어떻게 만들었을까. 자세한 제작과정은 유튜브에 공개되어있다(장호경 감독의 다큐멘터리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를 보시라).

 

  먼저 노랫말을 만드는 공정. 노래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가사가 뚝딱 나온다. 만수 자신도 믿기지 않는 듯 이렇게 덧붙인다. “정말 신기하죠, 뚝딱!” 다음 공정은 작곡이다. 노랫말이 완성되면 노동자들에게 곡을 주문한다. 이런 식이다. “임실님, 이것 노래로 불러줄래요?” 임실이 곡을 붙여 노래하면 만수가 그것을 악보에 옮긴다. 모두 함께 노래한 뒤 녹음실 녹음까지 거치면 모든 공정이 끝난다.

 

  나는 요즘 이들이 만든 노래를 홀리듯 듣고 있다. 만수의 말처럼 “노랫말과 노랫가락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도 중독성이 강하다. “선생님한테 진달래꽃 줄 거예요. 어머나어머나 깜짝 놀랐네. ... 미안해미안해 사과 줄게요”(<봄, 여름>). 빙긋하던 웃음이 폭소가 되고 다시 가슴이 찡해진다. 임실이 특유의 목소리로 부르는 사랑 노래. “사랑은 7월에도 아름답지, 사랑은 언제라도 아름답지. ...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줄게요. 마음을 다주면 그 사람도 알겠죠”(<사랑의 마음>). 다음 노래는 기어이 눈물샘까지 터뜨린다. “미안해 친구야, 용서해줘 친구야,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미안해, 정말 미안해, ... 사랑한다 친구야, 잘 살아라 친구야, 건강해 친구야, 시간이 빨리 가, 시간이 빨리 가”(<미안해 친구야>).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미안해’에서 한 번, ‘시간이 빨리 가’에서 또 한 번, 눈물이 차오른다.

 

  단언컨대 비장애인들 누구도 이런 노래를 만들 수 없고 부를 수 없다. 발달장애인의 삶을 거쳐서, 생각을 거쳐서, 입을 거쳐서 세상에 흘러나온 노래들. 아니, 반대로 말해야 할 것 같다. 이들의 노래를 통해 세상이 흘러나온다. “이상한 세상을 꿈꾸지, 이상하지만 이상하지 않은, 가난하지만 가난 없는, 장애 있지만 장애 없는 세상, 차별이 없는 누구나 꿈꾸는, 이상한 세상”(<이상한 세상>). 지체장애인이자 열혈운동가인 수미가 노랫말을 적어 주문한 노래, 노래공장의 발달장애인 노동자들이 만들었다. 사람들은 아직 모르지만 이 노래는 세상에 나와 있다. 그리고 노래가 세상에 왔으니 이 노래가 속삭이는 ‘이상한 세상’도 오고야 말 것이다.

 

  첨언. 서울시가 동화 속 못된 악당처럼 노래공장을 폐쇄시켰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을 폐지하는 식으로 노동자들을 집단 해고한 것이다. 부디 이들의 노래를 지켜주시기를 부탁드린다(노래집은 mansu.space에서 구매할 수 있다). 노래를 지켜야 노래하는 세상이 온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이상한 세상.PNG

수미가 노랫말을 적어 주문하고, 노래공장의 발달장애인 노동자들이 만든 노래. <이상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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