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겨울 129호 - [노들 책꽂이] 권위 대신 소통을 말하는 ‘비판정신의학’ / 노규호
노들책꽂이
권위 대신 소통을 말하는 ‘비판정신의학’
샌드라 스타인가드, 『비판정신의학』
노규호
장애인활동지원사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
어느 날부터 내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무실 창문으로 위층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에는 집에서도 위층 주민이 큰 소리로 나를 비난하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급기야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나에 관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에서 동거인과 내가 나누는 말이 이웃 주민한테 들릴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환경을 바꾸어 부모님 집으로 옮겨봤는데 그곳에서도 위층에 사는 사람들이 창문에 대고 소리를 지르며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그 소리들은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실제로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믿게 되었다.
정신과를 찾았다. 정신과 의사는 내 말을 듣더니 “그건 현실성이 떨어지는 말 같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같은 답을 하였다. 그리고 환청과 관계망상, 피해망상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의사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의사의 말에 대해 ‘나 역시 믿기 어려운 사실들이었어. 의사가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라며 나의 망상에 대한 믿음을 유지했다.
의사는 나에게 대형 병원으로 가서 뇌(MRI)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대형 병원의 정신과 의사 역시 내가 듣는 목소리에 대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뇌 검사(MRI)를 실시했다. 뇌에는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조현병 진단을 내렸다. 그 의사는 나의 생활태도에 대해 “매사 너무 걱정하지 말고 팍팍 사세요”라고 조언했다. 주변에서 자꾸 나와 관련된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나의 말에 대한 조언이었다. 그러나 그 의사의 말은 당시 나에게는 내 생활태도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두 번째 의사와는 진료시간이 10분 남짓 짧았다. 대형 병원의 비싼 진료비가 부담되기도 해서 다시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망상인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세 번째 의사와 만났다. 동거인의 친구로부터 상담 시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소개를 받고 찾아간 의사였다. 그는 『비판정신의학』(샌드라 스타인가드 저, 장창현 역, 미디어협동조합, 2020)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번 의사는 나의 ‘목소리 듣기’(hearing voice)에 대해 이전의 의사들과 다른 식으로 접근했다. 전의 의사들은 내가 들은 목소리는 현실적이지 않은 ‘환청’이며,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나를 조현병 환자로 진단하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반면 세 번째 의사는 나의 ‘목소리 듣기’를 조현병의 증상으로 단정하는 대신 먼저 목소리의 출처를 확인해 보자고 했다. 그는 이전 의사들과 달리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일이 아니라면 꼭 사실 확인을 거쳤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창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인 동료에게 가서 혹시 소리를 내었는지 물어보았다. 동료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의 망상 속 서사가 깨지는 것을 느꼈다.
그 후 내가 들은 목소리가 망상 속의 소리임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이 빨라졌다. 망상 속 서사가 진실인지, 의사의 말이 진실인지, 혼자 고민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망상임을 알고 난 이후 마음상태도 달라졌다. 전에는 망상임을 알고 나서 앞으로 또 망상에 시달리면 어쩌나, 다른 동료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염려되었다. 내가 사무실에 나가도 되는 사람인지 혼자 골똘히 고민했다. 그래서 한동안 사무실에 못 나가기도 했다. 반면 동료에게 물어봐서 망상임을 안 이후에는 의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망상을 알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진지하고 성의있게 사실을 말해준 동료와는 신뢰를 쌓아갈 수 있었다. 앞으로 사실 확인을 할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관계를 통해 망상에 대한 자기인식을 갖는 중요함을 배웠다.
『비판정신의학』은 이런 걸 대화중심진료(dialogic practice)라고 부른다. 대화중심진료에서는 정신과적 개념화가 특정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고 한다. 이 치료법에서는 당사자의 생각을 쉽게 망상이라고 재단하지 않는다. 비록 당사자의 생각이 특이하거나 심지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대화에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의사, 가족, 주요인물 관계에 접근하도록 한다. 그러면서 당사자가 의사, 가족, 주요 인물과의 대화에 최대한 참여하도록 하는 것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는 진실을 의사와의 공방으로 알아가는 대신 관계에서의 소통을 통해 알아가도록 한다.
몸의 영향을 주의 깊게 살피는 약물중심모델
『비판정신의학』은 약물치료에 대해서 기존의 정신의학과 비판적 거리를 둔다. 내가 처음 만난 정신과 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은 리스펜정 3mg, 명인벤즈트로핀메실산염정 1mg, 소리반정 0.5mg, 하이라제정이었다. 이후 대형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은 리스페리돈 2mg, 아티반정 1mg, 프로이머정 5mg이었다. 그런데 대형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이 내게는 중요했던 터라 의사에게 어려움을 호소했다. 의사는 병이 나아지고 있는 신호라며 약 처방을 유지했다. 지금의 주치의는 리스페리돈 2mg, 렉사프로정 5mg, 아티반정 0.5mg, 벤즈토핀정 0.5mg을 처방했다.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서 의사에게 말했더니 의사는 리스페리돈이 몸을 무겁게 하는 느낌을 만들 수 있다며 복용량을 조금 줄여보자고 했다. 대형 병원 의사와 지금의 주치의는 약 처방에서 미묘한 태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주치의는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를 자주 언급했다. 그리고 약에 대한 내 몸의 반응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주는 느낌을 받았다.
『비판정신의학』은 약물치료에 있어서 질병중심모델과 약물중심모델을 구분한다. 질병중심모델은 정신과 약물이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에 직접 관여한다고 본다. 약물을 보충함으로써 신경전달물질의 이상 흐름을 정상화 시킨다고 본다. 반면 약물중심모델은 약물이 질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한다기보다 단지 특정 신경학적 상태에 특정한 효과를 일으킬 뿐이라고 말한다. 약물이 질병의 원인이 아니라 몸의 신경학적 상태에 관여한다고 볼 때 의사와 당사자들은 약물이 유발할 수 있는 다양한 영향에 대해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의사는 당사자의 약물에 대한 신체적 경험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를 갖는다. 약물에 의한 단기적 부작용에서부터 장기적 복용 결과, 금단증상 등에 대해서 고려하는 태도를 보인다. 당사자의 경우에는 약물을 통한 위험과 이익을 충분히 고려한 후 복용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비판정신의학』은 권위 대신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조현병 치료에서 인지기능을 진단하고 도움이 되는 약물을 투여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소통을 통해 망상을 확인해나가는 과정 역시 중요하다. 환청과 망상을 처음 경험했을 때 나는 무척 당황했고 주변관계에서 많이 위축되었다. 그 경험에서 정신과 진단은 증상으로부터 오는 무게를 더하면 더했지 덜어주지는 못했다. 망상과 환청을 나로부터 좀 더 가볍게 만들어준 것은 나를 지지해주고 대화를 나누었던 가족, 동료, 의사들과의 경험이었다. 이들과 함께 겪어 낸 망상의 자기 확인 과정이 망상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소통은 망상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아가게 하는 회복과정의 일환이다. 또한 약물치료에서 일방적 처방이 아닌 당사자인 나와의 소통은 자신의 몸을 돌보는 데 직접 참여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것은 당사자가 치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효과를 만든다. 이처럼 『비판정신의학』의 권위 대신 소통을 지향하는 치료법들은 당사자의 무너진 주체성을 회복시킨다.
*이 글은 비마이너에도 실렸습니다. bemino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