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가을 128호 - 코로나 보다 무서운 것 / 김진수
코로나 보다 무서운 것
진수
요즘 좋아하는 노래의 한 토막
: ‘어떤 얘길 말할까. 어떤 꿈 꾸게 될까. 아무것도 필요 없을지도 몰라.’
‘자가 격리 안내 문자드립니다’ 야학 학생 분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다음날. 나에게도 자가격리를 하라는 한 통의 문자가 왔다. 문자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이제부터 답답하겠다는 것보단, 글을 모르는 분들에겐 이 문자의 내용이 어떻게 전달이 되는지, 또 전화가 없는 분들껜 무엇으로 전달을 하는지, 등등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한 건, 글을 모르거나 핸드폰 없이 생활을 하는 야학의 학생들 때문인 것 같다. 세상엔 여전히 핸드폰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고,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고, 언어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이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보건소 역학 담당 조사관이 왔던 날 짐작했다. 역학 조사관을 상대한 야학 사무국 활동가는 자가격리가 예상되는 학생들의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개인마다 소통의 방법과 지원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알렸지만, 그 조사관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자가격리 통보를 할 경우 의사소통 지원을 할 수 있는 교사나 활동지원사의 연락처를 전달했지만, 그에 맞게 연락이 온 경우는 없었다. 말하고 알려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예감과 함께 2주간의 자가격리를 시작했다.
학생들의 자가격리가 시작 되면서, 노들 사무국에서는 학생들마다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담당을 정했다. 자가격리 동안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는데, 학생들의 장애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격리 담당 공무원이 그 내용을 전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야학 교사들은 보건소와 자가격리 담당 공무원에게 각 학생들에게 맞는 의사소통 방법을 전달했다. ‘00님은 스마트폰은 있지만 어플을 받을 수 없고 받더라도 어플을 통한 내용을 전달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말로 소통은 가능하니 전화로 열 체크와 몸상태 확인을 해주세요.’ ‘00님은 스마트폰이 없어서 어플을 받을 수 없고 글도 읽지 못하세요. 전화로 확인하는 것도 어려울 수 있으니 그분을 지원하고 있는 활동지원사 선생님을 통해 상태 확인을 해 주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의사 소통 지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정서 지원이 필요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고, 회의 끝에 정서 지원을 하기로 했다. 격리가 시작 되자 지난 시설에서의 삶이 떠올랐는지, 야학에 올 수 있는 거냐고 울며 전화 하던 분이 있는가 하면 마치 익숙한 듯 담담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분이 있었다. 그렇게 매일 한 번씩 전화 연락을 돌려 안부를 물었다. 전화 연락과 함께 종종 줌(zoom)을 열어 다 같이 모여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했다. 오랜만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마주한 자리를 통해 전화 연락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자가격리 하는 학생분들게 반찬 지원을 하거나, 과자가 먹고 싶다는 학생들에게 과자배달을 하는 등, 꼼꼼한 지원이 이루어졌고, 2주간의 자가격리는 큰 문제없이 마칠 수 있었다.
이런 지원이 가능했던 것은, 노들은 그들의 존재를 알고 함께 해왔기 때문이다. 역학조사관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 자가격리 담당공무원이 소통할 수 없는 이유는 서로의 존재를 몰랐고 알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의 부재는 시스템의 부재를 낳는다. 팬데믹 시대에 시스템의 부재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몬다. 그렇기에 존재가 지워지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아니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없는 자들로 치부되는 것은 죽음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활동지원을 못 받아서, 이동권이 없어 제때에 병원을 못 가서, 그리고 시설에서 살아서, 죽음과 가까워진 삶을 수없이 봐왔기에, 노들은 탈시설을 외치고, 교육권을 외치고 이동권을 외치고 활동지원 24시간을 외친다. 탈시설에, 교육 받을 권리에 그리고 이동할 권리에 활동지원제도에 생명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코로나19 사망자 중 47%가 거주시설에 사는 분들이라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누군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둘 중 한 사람은 시설 거주인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코로나로 인한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백신 접종도 치료제도 아닌 시설을 없애는 일일지 모른다.
코로나보다 더 잔인하고 무서운 것은 코로나 이전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