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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활동지원사입니다

오늘의 나는

 

 

 진명희

요즘 고민은 ‘재미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지금 읽는 책은 『의존을 배우다』 ... 매일 길을 잃으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나는 열무와 상추와 보리와 밀을 수확하고 그 자리에 가을 동안에 자랄 녹두와 팥과 콩을 심고 옮겨심기해야 할 들깨모종이 제대로 자라지 않는 걸 걱정하는 어머니를 답답해 하며 모종은 시장에서 사오면 그만이고 그 걱정을 하느라 팔순의 어머니 건강이 상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걸 끊임없이 강조하며 절대로 소용없을 잔소리거나 화를 불쑥불쑥 쏟아내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산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후반기에 접어든 것이 분명한 인생의 남은 날들 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할 수 있는가? 이대로 이렇게 흘러가다 끝을 만나도 좋은가? 

 

  어제의 나는 밤샘하거나 끼니를 거르거나 친구와 약속을 갑자기 취소하거나 휴가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하거나 명절이나 휴일이나 공휴일에 쉬지 않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았다. 오직 ‘일’을 위해. ‘일’말고의 일상은 없는 삶을 20년쯤 아니 30년 가까이 살았다.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살기 위해 일하는 건지 일하기 위해 사는 건지. 차를 사고 집을 짓고 빚을 내고 빚이 쌓이고 아주 많은 것들이 늘어나는 시간을 꾸역꾸역 견뎠다.

 

  그리고 ‘번아웃’이 시작됐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 감각도 없는. 

  먹고 자고 사는 일에 어떤 흥미도 없는. 살아있지 않다고도 살아있다고도 할 수 없는 시간들,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어떻게 무엇을 바로잡아야 잃어버린 마음이 돌아올까?

 

  나날이 쌓여가는 빚을 더 큰 빚으로 메꿔가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존.버.하다가 이대로 더 이상은 버틸 수 없겠다는 압박감에 숨이 쉬어지지 않을 무렵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청소를 하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산책을 하고 미술관을 가고 공연장을 간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함께. 누군가에게 가장 필요한 일을 고민하고 대처하는 활.동.지.원.사.라는 일을.

 

  음식을 만드는 일에 서툴 뿐 아니라 불편하기까지 했던 과거의 나에게 끼니란 죽지 않을 만큼 적당히, 건너뛰기도 하면서 때우면 그만이지만, 되도록 조리를 덜 해도 먹을 만한 상태가 되는 신선한 제철재료를 몸에 공급하는 정도의 과정이었다. 활동지원사로 일하면서는 거를 수도 없거니와 할 수 있는 힘껏 맛있게 좋은 재료로 하루 세 번 즐겁게 먹을 수 있는 식사를 꽤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만들어 낸다. ‘나, 요리에 재능 있었나?’ 

 

  여전히 모르겠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렇게 별일 없이 살아도 좋은지. 그런데 궁금해졌다. 음성언어를 쓰지 않는 사람은, 걷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혼자서는 이동할 수 없거나 이동하기 어려운 사람은 별일 없이 살아도 좋지 않은지. 나는 지금 누군가가 별일 없이 살아가는 일을 지원한다. 덕분에 나도 별일 없이 살아진다. 나쁘지 않다. 

 

  나를 전혀 챙기지 못하며 살던 시절엔 나를 둘러싼 이야기도 전혀 챙기지 못하며 살았다. 내가 궁금한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일에 영혼을 갈아 넣으며 살았다. 남을 챙기며 사는 지금은 남과 나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가 궁금하다. 모두 다르게 태어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많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어째서 존중받지 못하는가. 공주와 왕자 혹은 부족한 것이 없거나 아주 조금인 사람들은 세상의 일부일 뿐인데도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마저 독점하는가. ‘나, 이야기에 관심이 많나?’

 

  새로운 일을 계속하는 동안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고 있다. 어쩌면 이상한 그러나 알고보면 흥미로운, 이야기를 쫓아가 보겠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진명희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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