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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비마이너

노동자일 권리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다.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으며, 읽기의집 집사이기도 하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노동절을 앞둔 4월 30일, 십여 명의 중증발달장애인 해고노동자들이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플래카드에는 “우리 일자리 지켜준다고 약속했잖아요”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충동과 내 글로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없다는 무력감을 동시에 느꼈다. 글이라는 것이 목소리를 담아두는 불멸의 그릇처럼 느껴지다가도 물 한바가지도 담을 수 없는 깨진 옹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경우가 그렇다. 내 글로는 이날의 목소리를 담을 수가 없다. 몇 번이나 고쳐 써보았지만 내가 쓴 문장들은 내가 들은 말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날 발달장애인 노동자들이 분노하며 외친 말들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약속했잖아요”, “정말 화가 납니다”, “장난이 아니에요”, “꼭 반성해주세요.” 근래 내가 들은 가장 분노한 말들이었는데도 문장으로는 너무나 공손하다. 한 노동자는 분에 겨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현재 얼마나 화가 났냐면, 화가 발끝까지 치솟았습니다.” 머리끝까지가 아니라 발끝까지 치솟다니. 그런데 그는 정말로 발끝에서 화가 폭발한 듯 펄쩍펄쩍 뛰었다. “약속했잖아요”라고 울먹이는 노동자의 말에는 가슴을 얼마나 세게 얻어맞았는지 모른다.

 

  이들은 ‘피플퍼스트 성북센터’ 등 세 곳의 발달장애인 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해 온 노동자들이다. 그런데 서울시 관계자가 했다는 말에 따르면 이들은 해고노동자가 아니라 ‘중증장애인 동료상담’ 사업 공모에 떨어진 사업자일 뿐이다. 공모 사업에 선정되지 않았다고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맥락을 살피지 않고 발표 자료만 보면 이들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올해 공모한 ‘중증장애인 동료상담’ 사업은 사실 새로운 사업이 아니다. 지난 4년간 진행된 ‘중증장애인 동료지원가’ 사업이라는 것이 있었다. 중증장애인 활동가들의 요구로 만들어진 뜻 깊은 사업이라 이 지면에도 소개한 적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중증장애인들은 오랫동안 시설이나 집에 사실상 감금된 사람들이었다. 사회생활은 고사하고 외출도 할 수 없었다. 배제와 방치 속에서 몸만이 아니라 의지와 욕망까지 누워버린 이들. 동료지원가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들이다. 자신과 비슷한 장애를 가진 중증장애인들을 찾아내서 상담도 하고 자조모임에도 참여시키고 적절한 일자리도 찾아본다. 비장애인 사회복지사나 직업소개사도 할 수 있는 일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똑같은 말을 해도 중증장애인 동료가 하는 말은 다르다. 동료지원가는 그 자신이 자기 말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2022년 한 해만 해도 197명의 동료지원가들이 무려 3200명의 중증장애인들을 찾아내서 함께 활동했다.

 

  그런데 올해 예산을 짜면서 고용노동부가 사업 폐지를 결정해버렸다. 졸지에 집단 해고된 동료지원가들, 특히 발달장애인 노동자들이 격렬히 싸웠다. 장애인고용공단에서 농성도 벌였고 국회의원들에게 편지도 썼고 국정감사 자리에서 증언도 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여야 의원들을 움직였고 정부로 하여금 사업을 되살리게 했다. 다만 운영기관이 고용노동부에서 보건복지부로, 일자리 이름이 ‘동료지원가’에서 ‘동료상담가’로 바뀌었을 뿐이다.

 

  운영기관과 이름 변경에 어떤 술수가 있었던가. 이 일자리를 되살려내기 위해 투쟁했던 이들, 당연히 동료지원가로 계속 일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이 사업에서 탈락해버렸다. 그 대신 소위 ‘신규 사업자들’이 대거 선정되었다. 새로운 노동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업 규모를 키워서 더 많은 중증장애인들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새로운 일자리가 기존 일자리를 없애서 만든 것이라면, 그것도 기존의 성과들을 무시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독일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도박이 노동과 다른 점은 과거를 무위로 돌리는 것에 있다고 했다. 노동에서는 과거 성과가 중요하지만 도박은 매번 판을 새로 시작한다고. 과연 일자리를 그렇게 해도 좋을까. 일자리가 매번 운을 시험하는 경품 같은 것이 되어도 좋을까. 누구에게나 그렇듯 장애인들에게도 일자리는 생계이고 생활이다. 그런데 선정 권한을 쥔 서울시가 고용승계 원칙을 저버리고 판을 새로 깔아버렸다. 일자리를 단발적인 일자리체험 같은 것으로 만든 셈이다.

 

  이유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뿐이다. 중증발달장애인들에게 직업이라니, 그냥 일자리 체험이나 해보라고. ‘해고라뇨? 그냥 선정이 안 된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노동자의 권리 이전에 노동자일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왜 당신들 일자리에는 그렇게 민감하면서 우리에 대해서는 이렇게 함부로 하는 겁니까.” 기자회견 중 한 노동자가 울먹이며 한 말인데, 나로서는 이 ‘함부로’라는 말에 담긴 분노를 표현할 길이 없어 정말로 화가 난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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