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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렁벌렁한 첫 연구수업을 끝내고

 

 

 

 송나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안녕하세요, 이번 학기 청솔1-B반 국어 수업으로 노들과 함께하고 있는 송나현입니다. 청솔1반 분들과는 지난 학기에 처음 만났어요. 수학 수업의 지원 교사로 반 학기 정도를 보냈거든요. 그동안 수업 시간에 갑자기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거나, 색칠할 때 오랫동안 칸을 꼭꼭 채우거나 하는 학생분들의 이런저런 모습에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수업을 직접 이끌어가야 하는 처지가 되니 걱정만 덜컥 앞서더라고요. 마침 이번 학기 화요일에 광복절, 개교기념제 등 휴일과 행사가 여러 번 겹쳐서 수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오래 고민해 볼 수 있기는 했어요. 하지만 결국 고민에 고민만 거듭하다, 방학 숙제를 덜 끝낸 학생 같은 기분으로 첫 수업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희 반 학생분들을 두어 번 밖에 못 만나 봤는데, 덜컥 연구수업까지 하게 되었지요.

 

  이날 수업의 주제는 ‘과일 쓰기’였습니다. 좋아하는 과일을 하나씩 정해보고, 과일 이름을 써보고, 그 과일이 어떤지 여러 단어를 골라 묘사해 보는 활동이었어요. 다른 교사들이 와서 본다고 하니 수업 실연을 하는 학생처럼 이상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더라고요. 괜히 더 무언가를 준비하기도 했고요. 수업 전 들린 야학에서, 수업 때 쓸 과일 교구들을 만드느라 자르고 붙이고 하면서 절절맸던 기억이 나요. 나름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수업은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어요.

 

  청솔1-B반 학생분들은 글을 쓰는 방식과 속도가 각자 다양하세요. 이전 수업은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진행해서 그랬는지 그 속도를 맞춰나가기가 쉬웠는데요. 세세하게 구조화한 수업을 준비하다 보니 오히려 학생분들과 이야기하며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 무엇을 하면 좋을지 조율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준비해 둔 ‘동그랗다’, ‘길쭉하다’, ‘아삭아삭하다’ 같은 단어들을 학생분들이 낯설어하기도 하셨어요. 수업 중반부터는 참관하던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학생분들에게 붙어 지원을 해주셨고, 어쩐지 일대일 과외와도 같은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수업 내내 툭툭 머릿속이 하얘지고, 등에 땀이 솟아나던 느낌이 생생해요.

 

  조금은 머쓱하고, 또 조금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평가 회의를 시작했어요. 무얼 말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차에, 다른 교사분들이 이야기를 시작하셨어요. 한 분 한 분 이야기 하실 때마다 각 교사분이 각 학생분을 지원하면서 발견하셨던 것들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요. 예를 들어, 어떤 분께는 낯선 단어를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면 좋을 것 같았다든지, 어떤 분은 점선을 따라 쓰시는 것을 편하게 느끼시고, 어떤 분은 낱자들을 배열해 보았으며, 또 어떤 분은 빽빽하게 깜지 쓰는 것을 좋아하셨다는 등의 묘사들이 나왔어요. 학생분들에 대해 이전 수업에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던 것들, 잘 몰랐던 것들이 조금 더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다가왔어요.

 

  이 글을 시작하기 전, 무엇을 써야 할지 너무 막막해서 옛날에 다른 선생님들이 썼던 글들을 읽어보았어요. 오랜 시간이 깃든 공간이니만큼 정말 많은 이야기가 가득했고, 학생이든, 교사든, 활사든, 활동가든, 각자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들을 발견하고 궁리해나가는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노들에 첫발을 들인지 1년이 막 넘어가는 시점에서, 지금 제가 새로 알아가는 것은 서로를 발견해가는 관계에 대한 것인 듯해요. 저희 반은 수업이라는 이름으로 만나지만, 수업할 때마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생각은 계속 희미해지거든요. 거의 매 수업에서 몰랐던 이야기들이 나오고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생기는데요. 그 사건들을 만들고 이야기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원래 계획했던 수업이 흐지부지되기도 하고, 딴 짓을 하기도 해요. 요즘은 수다만 떨다가 수업의 반절을 보내는 일도 잦아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괜찮다고 생각되는 건, 아마 그런 농땡이들 속에서 학생분들이 어떤 사람인지, 무얼 원하고 어떤 관계를 맺어나가고 계신지에 대한 배움이 있고, 그게 학생분들과 조금 더 친해지고 조금 더 재미있는 수업을 생각해내는 데 보탬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반대로 학생분들이 저에게 관심이 있을지…는 제가 단언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요. 이 글을 보거나 읽거나 들으실 수도 있는 청솔1반 분들… 있으신가요…?ㅎ)

 

  신입교사 세미나 때 봤던 「어른이 되면」에서, 혜영이 혜정의 친구가 많아지면서 알지 못했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말이 나오는데요. 그 말이 지금 생각나는 이유는, 학생분들이 수업에서 늘 보이는 모습 외에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미처 수업 중에 발견하지 못했을 모습들, 혹은 수업이기 때문에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들이요. 얼마 전, 피플뻐스 팀의 공연을 보러 갔는데, 수업 중에는 보지 못했던 청솔1-B반 학생분들의 표정과 몸짓들이 보였어요. 이렇게 복잡한 학생분들과 함께, 어떻게 더 풍성한 수업 시간을 함께할 수 있을지 즐거운 고민이 이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평가회의 때 나왔던 이야기 중 하나를 언급하면서 글을 마치고 싶어요. 그때 다른 교사분들이 주었던 조언 중 하나는 이 수업을 어떻게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보면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매 수업 준비를 잔뜩 하고, 온몸에 힘을 주고 들어가면 결국 먼저 지치고 말 수도 있으니까요. 이 말을 생각하면서, 앞으로 남은 한 달간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몸의 힘을 풀고 수업에 임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학생분들과 함께할 앞으로의 시간의 가능성을 가능한 한 열어두려 해요. 얼렁벌렁 흘러간 연구수업이자 또 그렇게 수업을 하며 보낸 첫 학기지만, 나름 사소한 변화들도 제법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송나현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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