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봄 126호 - 박경석 교장의 퇴임식을 성취한 노들을 축하하며 / 고병권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쟁취 투쟁기 2-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박경석 교장의 퇴임식을 성취한 노들을 축하하며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으며,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제가 박경석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2007년 봄입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하루이틀 지났나 싶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이네요. 그때 저를 비롯한 몇몇이 <부커진R>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는데 창간호에 교장샘 인터뷰를 꼭 넣고 싶었어요. 2001년의 이동권 투쟁부터 노들야학을 눈여겨보았습니다. 2007년 즈음에는 활동보조인 투쟁을 격렬하게 벌일 때인데요. 노들의 투쟁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창간호 제목을 ‘소수성의 정치학’으로 잡고, 무조건 노들의 교장 선생님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인터뷰 요청 자체는 쉽게 허락하셨어요. 그런데 약속을 몇 차례 바꾸셨지요. 워낙 바쁜 분이었으니까요.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서 잡지 발간을 늦추면서 기다렸지요.
처음 만나뵙고는 제가 말려들었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박경석 교장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얼마나 말려들었는지, 인터뷰 마지막에는 제 스스로, 제가 속했던 수유너머가 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알려달라고 사정하는 수준이 되었지요. 정작 교장 선생님은 도와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제가 알아서 조직되었다고 할까요. 연대를 사정하는 저를 보고, ‘음… 학생들을 만나는 건 그렇고 교사들과 세미나나 좀 조직해보라’고 하셨죠. 좀 이상한 말이지만 그렇게 연대를 허락받았습니다.
박경석 교장의 매력이 어디에 있었을까. 나는 왜 말려들었을까. 그동안 여러 훌륭한 사람들을 만났는데요. 그 사람들과 아주 다른 부분이 있었습니다. 착하지 않다고 할까요. 선생님은 희생정신 충만한 착하고 아름다운 운동가의 계열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사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분에게는 눈물 쏟게 하는 진정성도 있고 불끈 분노를 일으키는 선동가이기도 한데, 그 이상으로 천진난만하다고 할까.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천연덕스럽게 거칠다고 할까, 거친데 천진난만하다고 할까.
처음 만난 자리에서 노들야학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선생님은 당시 외부 사람인 나에게 천연덕스럽게 말했습니다. “노들야학은 학생들을, 장애인 대중들을 일상적으로 만나는 공간입니다. 장애인 대중들을 만나는데, 그들을 조직하고 운동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만날 수 있는 곳이 없어요. 일주일에 보통 여섯 시 반부터 밤 열시까지 5일 만나니까. 한 이삼십 명을 집중적으로 만나니까. 얼마나 조직하기 좋겠습니까.”
이런 이야기, 그러니까 학교를 운동 수단으로 생각한다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장애인들이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우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식의 이야기를 상상했던 나로서는, 장애인 대중을 조직하는 데 학교만한 게 없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음모를 꾸미는 사람의 흉중의 말이 무심코 튀어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장애인 대중을 조직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걸 뼛속 깊이 자각한 사람, 장애인 대중을 조직할 수 있다면 뭐라도 하겠다는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대체로 1990년대 중반, 한국 사회 주류 운동은 길바닥을 떠났습니다. 단순히 야학이든, 길거리 투쟁이든, 소위 길바닥 운동을 낡은 것으로 비웃는 시대가 도래했었지요. 그런데 나는 그날 그 길바닥에 씨앗을 뿌리고 있는 황당한 농부를 보았습니다. 소위 아름다운 성자와는 거리가 먼,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그러나 너무나도 멋진 운동가를 보았습니다.
박경석 교장의 24년은 노들야학의 28년과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노들야학에는 박경석이 없는 역사가 많지 않으며, 박경석의 인생사도 노들 빼고는 남는 게 별로 없을 겁니다. 노들야학은 장애인들의 학교입니다. 그리고 박경석은 오랫동안 여기 교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노들야학이 더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람들, 노들 야학에서 더 많은 배움을 얻은 사람들은 비장애인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많은 비장애인들이 이 학교에 들어왔습니다. 말 그대로, 많은 비장애인들이 노들야학에 ‘입학’했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그리고 참 많이 배웠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많은 장애인 활동가들이 배출되었지만 또한 그만큼 많은 비장애인 활동가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리고 노들장애학궁리소가 상징하듯, 이들 활동가들을 따라 많은 연구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노들야학에 입학한 사람으로서, 제 개인적으로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노들은, 레베카 솔닛이라는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옥에 세워진 천국’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옥에 세운 천국. 저는 천국의 불빛만 보고 여기가 지옥인지도 모르고 굴러들었습니다만, 이제는 이 지옥 사회에서 이곳이 얼마나 귀한 천국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박경석이라는 이름은 지난 28년간 이곳을 지키고 가꾸어온 이들의 상징했던 이름이기에,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오늘 퇴임식 행사 제목이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더라고요. 너무 절묘해서 무릎을 쳤습니다. 정말로 노들의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이들이 박경석 교장 덕분에 인생 망치고 구원을 얻었지요(그리고 이렇게 구원을 얻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다른 이들에게 이런 이상한 구원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의 구원자 역시 사실은, 노들에 이끌려 자기 인생을 망치고서 구원자가 된 사람입니다. 박경석 교장의 책 『지금이 나는 행복하다』에는 장애인복지관에 취직한 박경석 직원이 노들에 갈까 말까 고민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안정된 직장인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재미있고 즐거운 것은 사실이나 험한 가시밭길이 뻔히 내다보이는 노들야학으로 갈 것인가?”
결국 박경석도 말려들었던 겁니다. 다만 그는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아니, 빠져나가지 않았습니다. 떠나는 사람들이 핑계 삼아 내놓는 명언보다 남아 있는 사람의 텅 빈 마음. “텅 빈 들판에 홀로 낮술에 취해 하늘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에 붙잡힌 거죠. 왜 이렇게 오랫동안 교장 자리에 앉아 있었는가. 기다렸답니다. “누군가가 교장이 되어주기를”. 그런데 그의 이 마음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그런데 이제 일이 일어났습니다. 두 분 신임 교장선생님들이 이 마음을 받아주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노들은 무려 24년 만에 박경석 교장의 퇴임식을 쟁취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박경석 선생님과 노들이, 박경석 교장의 퇴임을 쟁취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