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봄 126호 - [자립생활을 알려주마] 그녀와의 지극히 사적인 데이트 / 고권금
자립생활을 알려주마
그녀와의
지극히 사적인 데이트
고권금
보랏빛향기
“왔어?”
아직은 찬 기운이 감도는 바람과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날, 고요한 카페에서 마침내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녀의 손목에는 하늘색 전화선 모양의 머리끈이 있는데, 그건 그녀에게 머리끈이 아닌 멋 내기용 팔찌이다.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부터 청소기를 돌리고 방을 정리하며 분주히 단장을 했다고 한다. 집 소개를 마치고 나가려고 하는데 그녀는 무언가 잊었다는 듯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더니 하늘색 팔찌를 손목에 걸었다. 그리고 말했다.
“가자.”
점심을 먹고 찾아간 카페는 조용했다. 오붓하게 마주앉아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잠시 동안의 고요를 즐겼다. 우리는 종종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곤 하는데, 눈을 크게 뜨며 얼굴을 흔들거나 얼굴을 잔뜩 찡그리면서 상대의 표정을 따라 하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매번 비슷한 듯 다른 표정은 그날의 상태를 말해주는 것 같고, 표정을 따라 하다 보면 상대의 마음이 진짜로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렇게 온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그녀가 문득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녀도 나의 표정을 느낀 것일까. 그녀의 오른손이 천천히 나의 왼쪽 뺨에 닿았고, 그녀가 말했다.
“예뻐”
“예뻐해 줘서 고마워요.”
“네”
조심성과 사랑스러움이 넘치는 그녀의 이름은 손원주이다. 그녀는 2020년 7월에 인강원에서 자립했다. 자립과 동시에 건강상의 문제와 코로나로 복잡한 나날을 보낸 그녀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전화해 연신 내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기약 없는 만남으로 쌓인 그리움과 답답함이 터진 것 같았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은 개학과 함께 종결됐고, 덕분에 우리는 인터뷰를 가장한 데이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언니 자립하니까 어때요?”
“강치오빠, 인강원에 있어. 강치오빠 보고싶어. 인강원 안 좋아해. 강치오빠랑 둘이 싸웠어요. 주희씨랑.”
그녀는 인강원에서 함께 거주했던 이들을 보고싶어 했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만난 순간부터 피자와 치킨과 떡볶이와 콜라를 먹고 싶다고 줄곧 말했기에, 나는 당연히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다는 말을 예상했던 것이다.
그녀의 기억 속, 시설에서의 삶은 어떨까? 감히 짐작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곳에는 함께 울고 웃던 사람들과의 추억이 있을 터였다. 한 시절을 함께 보낸 이를 향한 그리움에는 다양한 형태의 감정이 담겨있기에 그 깊이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보고싶다는 그녀의 말은 묵직하게 다가왔다. 어느새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녀는 이어지는 질문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고, 나는 더 이상 자립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느낌이 맛있어.”
“언니 뭐 보고 있어요?”
“오토바이, 버스정류장, 차 운전, 보라색 좋아해, 스트레칭, 기분 좋아, 느낌이 맛있어.”
그녀가 창밖을 내다보며 한 말이다. 수리 중인 오토바이와 오고 가는 차들 그리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풍경 속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보라색과 스트레칭하듯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다시 한번 소매를 걷어 하늘색 팔찌를 쳐다봤다.
“우리 산책할까요?”
“네.”
우리는 그녀가 자주 걷는 산책로를 걷기로 했다. 그 거리에는 그녀가 일전에 가 본 적 있는 식당이 있었고, 외우고 있는 아파트 단지도 있었기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따라갔다. 지도 따위는 필요 없었다. 가야 할 방향을 향해 거침없이 손짓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주민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고 또 걸었고, 눈길이 가는 가게에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도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녀의 걸음걸이는 조금씩 느려졌고, 나는 이제 그만 돌아 가자고 했다.
“언니 이제 어디로 가면 돼요?”
“몰라.”
거침없던 손짓만큼 당당한 그녀의 대답에 나는 웃음이 터졌고, 우리는 외딴곳에서 길을 잃었다. 산책의 묘미다. 나는 곧 지도를 켜 위치를 확인했고, 다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큰 그림이었을까, 길을 잃은 덕에 그녀가 좋아하는 팔찌를 살 수 있었다.
집 근처에 다다르자 그녀는 내게 콘서트를 좋아하냐고 물었고, 나는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는 신승훈 콘서트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이제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들을 그리운 채 남겨두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녀가 지금처럼 당당하고, 멋있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찬찬히 탐색해보고 실천해가며 건강하게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녀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은 보랏빛 향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