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가을․겨울 109호 - [노들은 사랑을 싣고] 선동의 외출
[노들은 사랑을 싣고]
선동의 외출
홍은전 |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불수레반 담임이다. 2014년 7월 야학 상근활동을 그만두는 순간 기본소득 지지자가 되었다. 도서관에 앉아 멍 때리며 일기 쓸 때가 제일 행복하다.
꽃동네에 들어간 야학 학생, 선동
지난 10월, 꽃동네에 살고 계시는 조선동 님께서 1박 2일 외출을 나오셨습니다. 선동은 2002년부터 2008년까지 노들야학을 다닌 학생입니다. 야학에 처음 올 때만해도 잘 걷고 잘 뛰던 분이었는데, 어느 해부터인가 장애가 심해지더니 나중엔 아예 누워서만 지냈어요. 목 디스크와 허리 디스크가 급속도로 진행된 것 같아요. 이유는 알 수가 없어요. 술을 하도 많이 마셔서 그랬는지, 어느 해인가 자동차와 부딪쳤다고 했는데 그것의 후유증이었는지, 아니면 뇌성마비 장애의 자연스런 진행이었는지. 하여간 연로하신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당시 받을 수 있는 활동보조서비스 시간이 하루 6시간이었죠. 가족들은 결국 선동을 시설에 보내기로 했어요. 야학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던 게 2008년 여름 정도였던 것 같아요.
2012년에 선동을 만나러 처음 시설에 갔었어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탈시설 장애인을 위한 주거지원 사업’을 담당했던 야학의 조사랑 활동가가 먼저 말을 꺼냈죠. “우리는 선동이형을 잊으면 안 돼.” 사랑이는 사람들의 탈시설을 지원해 야학으로 오게 만들었는데, 정작 야학 학생이었던 선동은 꽃동네에서 살아가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 같아요. 그때 막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온 임영희가 운전을 하고, 사랑이가 음식을 준비해서 떠난 꽃동네 행에 저도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선동은 너무나도 야위어 있었어요. 볼에는 살이 하나도 없고 다리에도 뼈밖에 안 남았고 눈빛마저 흐렸어요. 선동은 언어장애가 심한데요, 목소리를 낼 기력조차 없는지 ‘응, 아니’ 정도의 의사소통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나는 속으로 ‘이 사람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었지요. 다행히 선동은 차츰차츰 기력을 회복했어요. 일 년에 한 번씩 그렇게 세 번째 선동을 만났을 때, 선동이 말했습니다. 나가고 싶다고요. 자신이 나가고 싶어 한다는 걸 가족에게 알려달라고 했어요. 우리는 그러겠다고 말하고 돌아왔습니다.
어머님께 연락을 드려 선동이 나오고 싶어 한다고 전했어요. 어머님이 긴장하시는 게 느껴졌어요. 만나 뵙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했지만 어머님은 한사코 만남을 피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선동이 누나하고 형이 모두 반대해요. 나는 권한이 없어요. 그곳에서 잘 살고 있는 아이 흔들어놓지 마세요. 앞으로 선동이한테 가지 마세요. 그냥 잊어주세요.”
저는 어머니의 마음을 너무 잘 알 것 같았어요. 선동은 술을 아주 많이 마셨고, 연로하신 어머니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중증장애인 아들을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을 거예요. 솔직히 말해, 한창 심각했을 때의 선동은, ‘저렇게 술 먹다 죽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싶을 만큼 술을 많이 먹었거든요. 지나가는 시민이 길에 쓰러져있는 선동을 보고 야학 교사들에게 전화를 자주 해왔었어요. 교사들은 선동을 답답해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었죠. 교사들이야 하루 이틀이지만 그걸 매일 겪었던 어머니의 일상은 어땠겠어요.
2015년에 선동을 다시 찾아갔을 때 어머니의 입장을 전해드렸어요. 선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고 싶다는 뜻을 보였어요. 우리는 그날, 꽃동네 직원들에게 선동의 뜻을 전했어요. 담당 직원은 퇴소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전제 조건이 있었죠. 가족이 동의해야 한다고요. 그러니 가족의 동의를 구해오라고 했죠. 가족의 동의, 그건 어떻게 구해야 하는 걸까요. 만나주질 않으시는데.
선동의 첫 외출, 가족과의 첫 만남
그리고 올해 5월, 가족에게 동의를 구하지 못한 채 선동의 첫 외출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꽃동네에 미리 전화를 했어요. 선동과 함께 외출할 테니 준비해달라고요. (미리 알리지 않으면 꽃동네에서 아주 싫어하거든요.) 하지만 꽃동네에서는 외출할 수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이유는 ‘보호자’, 그러니까 가족이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선동과 ‘직접’ 통화하고 싶으니 연결해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꽃동네는 그것조차 거절했어요. 직접 와서 ‘면회’를 하는 건 막지 않겠지만 전화를 바꿔줄 수는 없다고 했어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지요. 선동과 이야기를 하려면 차를 타고 2시간을 달려가야 할 판이었어요. (반인권적이라기 보단 ‘치졸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아요.) 꽃동네는 우리를, 그리고 선동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어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렇게 어깃장을 놓아도, 우리가 특별히 대응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겠죠. 우리는 이 상황을 여기저기에 알렸어요. 곧바로 ‘좀 싸워본’ 언니들로 특공대가 조직되었어요.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에서 여준민, 최재민, 인터넷 장애인언론 『비마이너』에서 최한별, 노들센터에서 김필순, 그리고 저와 사랑이었어요. 우리는 며칠 후 꽃동네로 찾아갔습니다.
우리가 선동과 함께 외출하겠다고 말하자 후덕해 보이는 원장님은 조곤조곤 자분자분 이렇게 말했어요. 아, 원장님은 수녀님이세요.
“우리도 인권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선동의 인권을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거주인이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가족에게 연락해서 만나게도 하고 외출도 하게끔 해요. 이 경우는 선동의 가족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어요. 우리는 선동을 지켜야 해요.”
줄여놓고 보니까 앞뒤가 전혀 안 맞는 말인데, 현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 샌가 이상하게 휘말려 들어가는 그런 거 있잖아요. 제가 딱 그 짝이었는데, 그 순간 좀 싸워본 언니 여준민 활동가는 수녀님의 후덕함에 속지 않고 그녀의 팔을 비틀 듯이 말했어요.
“인권에 대해서 잘못 배우셨나 본데요, 인권이란 선동의 가족이 아니라 선동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장애인복지법」 제 60조 4항을 큰소리로 읽기 시작했지요.
“시설 운영자는 이용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인권이 침해된 경우에는 즉각적인 회복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시설 운영자는 시설 이용자의 거주, 요양, 생활지원, 지역사회생활 지원 등을 위하여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한다. 시설운영자는 시설 이용자의 사생활 및 자기결정권의 보장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꽃동네에 울려 퍼지던 ‘시설의 의무’. 아, 이 장면은 멋있고 뭉클했어요. 우리는 꽃동네의 사무실에 앉아 대치하고 있었는데요, 그때 자기 책상에 앉아 일하는 척 애써 우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던 그 직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무실 바깥을 서성이던 거주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는 그런 게 궁금했어요.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줄을 먼저 내려놓은 건 원장님이었습니다. 결국 외출을 허락하셨어요. 우리는 선동을 차에 태우고 나와 좋은 경치가 보이는 닭갈비집에 앉아 기쁨과 승리감을 나누며 점심을 함께 먹었어요.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못했어요. 선동의 누나와 형들이 득달같이 전화를 해서 어마어마하게 화를 냈거든요. 저는 살면서 그렇게 심한 말을 처음 들어봤어요. 통화하는 내내 제 심장이 쿵쿵 널을 뛰었어요. 가족들은 야학과 센터 사무실까지도 전화를 해서 대표 바꾸라고 소리를 질려댔어요. 당장 쫓아와서 교장 선생님 머리채라도 잡을 기세였죠. 그분들은 우리가 선동을 납치라도 한 것처럼 말했어요. 그리고 선동에게도 평생 속을 썩인다고, 온갖 잔인한 말들을 쏟아냈어요.
그날 선동을 들여보내고 서울로 돌아와 작전 회의를 했어요. 그리고 며칠 후에 가족 분들을 만났어요. 차라리 잘된 일이었어요. 그 사단이 없었다면 가족들은 절대 우리를 만나주지 않았을 테니까요. 우리는 잔뜩 긴장해 있었어요. 교장 선생님이 함께 만났는데, 저는 그분들이 교장 선생님의 긴 머리채를 낚아챌까봐 미팅 장소로 야학의 교실, 그중에서도 문이 투명한 교실을 잡았어요. 가족들은 여전히 화가 나 있었어요. 교장 선생님은 조금 쫄아서 말을 시작했어요.
“요즘은 시설이 소규모화되고 있는 추세예요. 꽃동네 같은 대형시설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대형시설은 문제가 많이 생기니까요. 거기가 믿을만하다고 생각하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동이 탈시설하면 받게 될 활동보조서비스와 수급비, 장애수당 등을 설명했어요. 가족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어요. 왜냐하면 그것들을 현금으로 따져 합치면 한 달에 600만원이 넘었으니까요. 교장선생님이 설명을 좀 잘하셨어요. (짝짝짝!) 그동안 공무원들이랑 싸우면서 생긴 노하우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가족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걱정하지 않도록 이야기해 주셨어요. 설명을 듣고 있자니, 선동이 꽃동네에 들어갔던 2008년 이후 생겨난 변화가 저조차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웠어요. 그리고 평원재와 체험홈, 자립생활가정 등 선동이 살 수 있는 집들에 대해서도 설명했어요.
우리는 가족들을 모시고 야학과 센터, 활동보조인 교육기관, 평원재를 방문했어요. 선동이 오면 지내게 될 곳, 만나게 될 사람들, 활동보조를 연결해줄 센터, 그 활동보조인을 교육하는 기관들이었죠. 그리고 야학 휴게실에 옹기종이 모여 있는 학생들도 보셨어요. 모두 선동과 같은 중증장애인이었어요. 가족들은 차츰차츰 오해를 풀었어요. 처음엔 우리가 선동을 납치해서 뭔가를 뜯어먹으려는 사람들인 줄 알았대요. 하하. 누나들은 안심을 하시고, 마지막엔 고맙다고 말하신 후에 집으로 돌아가셨어요. 헥헥, 그렇게 또 한 고비를 넘겼어요. 이젠 정말 탈시설만 남은 건가 싶기도 했지요.
희망의 첫발, 그러나
그리고 지난 10월, 대망의 1박 2일 외박이 추진되었어요. 긴 시간동안 선동과 이야기를 나누고, 선동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그동안 꽃동네에 함께 갔었던 야학 교사 조사랑과 임영희는 사정이 생겨서 같이 가지 못하고, 저와 필순이 준비했어요. 운전과 활동보조로는 야학 교사 준호가 회사에 휴가를 내고 달려와 주었어요. 가족들의 동의까지 얻었으니 외박엔 전혀 문제될 게 없는 듯했어요. 우리 마음처럼 날씨도 너무 청명했고요. 선동은 그렇게 8년 만에 서울에 돌아왔어요.
오랜만에 노들야학의 교사와 학생들도 만났고 선동의 탈시설을 추진해줄 노들센터에 가서 인사도 했어요. 그리고 대학로를 돌며 이어폰과 작은 가방도 샀어요. 아, 선동은 바로 이틀 전에 핸드폰을 장만했어요. 지난 5월 외출 때 선동이 핸드폰을 사고 싶다고 우리에게 말했거든요. 우리는 꽃동네 직원들에게 전했어요. 선동 씨가 핸드폰 구입을 원하신다고요. 직원들은 알았다고 했지만 차일피일 미뤘어요. 그러다가 5개월이 지나서야 장만을 했는데, 그게 딱, 우리가 선동을 만나러 10월에 꽃동네에 가기로 한 날의 바로 이틀 전이었어요. 참 공교롭지요!
선동은 핸드폰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어요. 그곳에 간 후로 선동이 가진 개인 소지품으로는 핸드폰이 유일했을 테니까요. 선동이 서울에서 사고 싶어 한 것도 모두 핸드폰과 관련된 것들이었어요. 음악을 듣기 위한 이어폰과 핸드폰을 보관할 작은 가방이요.
야학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는데 선동이 무척 힘들어 보였어요. 매일 누워서만 지내다가 하루 종일 앉아있으려니 몸이 힘들었나 봐요. 숙소인 평원재로 계획보다 일찍 들어가게 되었어요. 선동을 만나기 위해 ‘옛날 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였어요. 평원재 거실에 이불을 편 후 선동은 누웠고, 우리는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어요. 보쌈을 시켜 8년 동안의 회포를 제대로 풀어볼 작정이었지요.
그리고 사건은 또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꽃동네에 살겠다”고 선동이 말했어요. 우리는 우리의 눈을 의심했어요. (선동은 눈빛으로 말한답니다.) 살겠다고요? 아니, 나오겠다가 아니고 살겠다고요? 살면서 뒤통수를 하도 여러 번 맞아서 내 뒤통수가 이렇게 납작해졌지만, 선동의 말은 38년 인생에서 맞았던 뒤통수 중 베스트 쓰리 안에 들 만한 것이었어요. 저는 직감했어요. ‘조선동이 돌아왔구나!’
오래 전 야학에서 한글 수업할 때면, 선동이 숙제를 안 해 와서는 숙제 안 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선동의 언어장애 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도 선동은 끝까지 말을 하거든요. 나는 말한다, 너는 알아맞혀라. 그런데 그게 또 묘한 마력이 있어서 그걸 들으려고 애쓰다보면 어느 새 수업 시간은 다 끝나가고, 다른 학생들은 짜증이 나있고, 나는 지쳐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를 배신감에 치떨게 했던 건요, 그 숙제 안 한 이유가 너무나도 별 것 아니었다는 거였어요.
아니, 꽃동네에 계속 살겠다고요? 그날 밤 평원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모조리 달라붙어서 선동에게 계속 질문하고 확인하고 짐작하고 해석한 결과는 이랬어요.
“꽃동네에서 나를 일주일에 세 번 야학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그러므로 나는 꽃동네에 살면서도 야학을 다닐 수 있게 됐다. 그러므로 나는 굳이 나오지 않고 거기에 계속 살겠다.”
우리는 말이 안 된다고 얘기했지만, 선동은 확신에 차서 우리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꽃동네 직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면서, 그 예로 핸드폰도 사줬고 요금도 내준다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말했죠. 그건 몇 달 전에 우리가 요구한 것이 이제야 이루어진 것이고, 요금도 당신의 장애수당으로 내는 것이지 꽃동네가 내주는 것이 아니라고요. 선동은 계속 아니라고 했어요. 같은 말을 자꾸만 반복했어요. 이러다간 밤을 꼴딱 샐 것 같았죠.
아, 복병. 우리는 왜 그렇게 수녀님과 싸웠고, 왜 그렇게 가족들에게 쌍욕을 먹었던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아, 조선동. 저는 너무 힘이 빠졌어요. 사실 그 외출이 너무 힘들었거든요. 늘 같이 다녔던 조사랑도 없고(사랑이는 베테랑이거든요) 임영희도 없어서(영희는 늘 밝고 긍정적이죠) 마음의 부담이 컸어요. 저의 정신 상태는 널을 뛰었어요. “이 사람아, 꽃동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하고 선동에게 짜증을 냈다가, “휴, 그러세요. 거기 수녀님하고 행복하게 사세요”하고 세상 포기한 듯 웃었다가, “선동이형, 이제 난 거기 안 가도 되는 거죠. 안녕”하고 잔인하게 손을 흔들었다가. 선동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이야기하다가도 내가 “안녕”하면 대번에 슬픈 표정을 지었어요. 아아아. 얄미운 사람.
선동의 탈시설은 가능하겠죠?
다음날 꽃동네에 도착하자마자 원장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선동이 했던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죠. 원장님은 손사래를 치며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잘라서 말했어요. 아아아, 그렇게 단호하실 것까지야. 아아아, 허무해. 삼자대면으로 진실이 가려지자 그토록 확신에 차 있던 조선동은 온 데 간 데 없고 당황하고 무안한 조선동만 남아 있었어요. 간밤에 우리는 왜 그렇게 조선동과 씨름을 했던가, 내가 씨름한 조선동은 유령이었던가. 원장님께 혹시 다른 직원이 그런 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냐고 물었더니 그조차 가능성이 없다고 했어요. 그건 시설로선 정말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아직도 미스터리예요. 선동은 대체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었던 걸까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상상을 했고 어떤 과정을 통해 그토록 굳건한 확신으로 변했던 걸까요. 저로서는 알 길이 없네요. 그저 짐작할 뿐이에요. 8년 동안 살았던 곳이니 어느새 익숙해졌겠구나, 바깥 세상이 뭔가 많이 낯설고 불편하고 힘들었구나, 몇 번의 외출만이라도 허락된다면 익숙한 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구나. 8년이란 긴 시간이었겠죠. 8년, 아마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이 흘렀을 거예요. 저는 그것이 ‘인간성을 상실하는데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자유를 갈구하는 그런 인간성 말이에요. 그리고 같은 시간 동안, 시설 바깥에 있는 우리도, 그를 우리 사회에서 밀어내면서, 그를 잊으면서, 인간성을 상실해나간다고요.
선동에게 다시 물었어요.
“그래도 여기 사실 거예요?”
선동은 완전히 주눅이 들어있으면서도 망설임 없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저는 선동이 얄미워서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어요.
“우리가 어제 그렇게 설명했잖아요.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어요? 어제 밤 그 귀한 시간을 다 허비해버렸잖아요. 형이 그런 태도를 보이면 밖에선 아무것도 추진 못해요. 이런 기회를 놓치면 영영 못 나올지도 모른다고요.”
나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아서 말했어요.
“나 이제 안 올 거야!”
알고도 한 말이지만 다시 써놓고 보니 참 잔인한 말이네요. 내가 꼭 신이라도 된 것처럼. 아마 선동은 많이 무서웠을 거예요. 엄마마저 자신을 이곳에 두고 가버렸는데, 대체 누굴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가 노들을 믿고 잘 따라와 주기를 바랐지만, 그건 노들의 생각이겠죠. 표현할 수 없지만, 그는 지난 8년의 시간을 통해 알게 되었을 거예요. 세상이 자신을 버렸다는 걸. 다음에 또 올게, 라는 말이 기다리는 사람에겐 얼마나 고통스런 말인지를. 사람들이 자신을 잊는다는 게 얼마나 서럽고 무서운 일인지를 선동은 알고 있는 거겠죠. 아아아, 몰라요, 몰라요. 이것조차 모두 저의 짐작일 뿐입니다.
헤어지기 전에 말했어요.
“휴, 다시 올게요. 전화할게요.”
요즘 선동은 저에게 자주 전화를 해요. “밥 먹었어요? 아픈 데는 없죠? 조만간에 갈게요.” 저 혼자 말하다가 끊는 그런 통화. 가끔은 선동이 버튼을 잘못 눌러서 영상 통화를 해요. 선동의 얼굴은 안 보이고 선동의 방 천장만 보여요. 선동이 8년 동안 바라본 그 천장을 핸드폰으로 바라보는 느낌. 참 이상했어요. 선동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이 글은 10월에 있었던 1박 2일의 외출에 대한 것인데, 그 외출을 설명한다는 게 이렇게 길어졌네요. 시설로 들어가는 건 한 순간이지만 한 번 들어간 시설에선 나오기는 이토록 어렵다는 걸, 나와 우리가 잊고 지낸 조선동이란 사람의 8년을 기록하는 의미로 길게 적어보았습니다. 내년엔 꼭 선동이 나온 것으로 이 기록이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네요.
- 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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