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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이야기
2012 봄호 :
김창완 아저씨의 노래처럼,
내가 갖고 싶은 건...
데모 같은 일상에서 구호 같은 대화를 나누다
시설, 고 놈의 시설에서 나오고 싶었던 내 마음은...
- by 뉴미 : 노들야학 교사 -
“고놈의 인터뷰는 그만 좀 해라.”
우힝 시작부터 구박이다. 그녀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늘 험하다. 그녀 마음속 대체로 여린땅이나, 어느 곳은 독하게 딱딱하고, 어느 곳은 헐어있다. 어느 구석 잘못 밟았다간 불호령이 떨어지고 눈물바다 된다. 조심해야 하고, 기다려야 한다.
내가 그녀에게 듣고, 또 듣고, 또 들어온 이야기는 그녀의 ‘시설살이 ’ 이야기다.그녀는 나뿐만 아니라 이놈저놈에게 말하고, 또 말하고, 마음이 상해 입을 다물었다가도 또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 일단 그녀의 마음은 조금 있다 함께 들어가기로 하고, 나만 보면 헤헤거리는 사람의 문을 두드렸다.
시설에서 나오는 게 뭐 때문에 어려웠어? 상윤, “돈?” 이라고 단 한 글자를 뱉는다. 구체적으로!! “돈이 있어야지 집 구해놓고 나오는데…” “내가 돈이 있어야지” 돈이 왜 없어요? 수급비나 수당 나오잖아. “그때 당시에는 돈 모으고 싶어도 못 모았어요.” 왜요? “왜냐면 내가… 근데 알잖아요~?” 나는 다 알지만 독자들은 모르잖아요. “원장이 장애인 수당 가로채고…”
웬일로, 그녀가 벌써 입을 연다. 선심, “원장이 다 갖고 있었지.” 다시 상윤, “우리 안 주고…” 다시 선심, “우리는 돈 하나 안 주고, 나쁜 놈의 인간들이여!”
돈이 제일 큰 문제였어요? 상윤, “집…나오려고 하면 부모님이 반대하고…” 반대했어요? “네, 뿌리치고 나왔어.” 왜 반대하지? 같이 살지도 않은 거면서… “왜긴 왜야?” “…” 그 좋은 시설에서 뭣하러 나오냐, 그런 건가? “좋은 시설? 그게 다 웬 말이야!!” 안 좋아요? “안 좋아!” (:p) “직업 갖고 싶어도 거기는 외출도 자유롭게 못하니까. 직업이 있어도 뇌성마비들은 못하니까. 그 안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니까. 깜빵! 옥살이!” 아, 압축된 언어들.
그럼 돈도 없는데, 어떻게 나왔소? 물론 난 다 알지만… “알잖아…” 난 다 알지만 독자들에게 직접 설명해주셔요. “하 하 하 알잖아. 배째라! 하고…” 결국 웃음으로 때운다. 경기도 김포에 있는 한 시설에서 산 상윤께서는 시설 동료 일곱명과 함께 ‘내 배 째시오. 난 못 돌아가오.’ 하는 마음가짐으로 시설에는 나왔다. 노들 앞에 있는 마로니에공원에 먹고 자고 하면서 데모를 해. 서울시로부터 지원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데모 직후에 어찌어찌하여 한 사회복지법인이 무상으로 임대한 주택에 들어갔고, 동료들 중 그혼자만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다.
상윤, “일단 탈시설 데모할 때 우리가 따낸 거. 서울시 체험홈에 들어가서 6개월 살다가 서울시가 주관하는 주택으로 들어가면 돼요.” 거긴 쭉 살 수 있는 거예요? “아뇨, 5년 동안.” 에이 이것도 임시적인 거네. “(끄덕끄덕)임시적. 서울시가 빌려주는 거지.” 이렇게 사는 게 불안한데 시설보다 여기가 나아요? “낫지. 나야.” 뭐가 나아? “깜빵, 옥살이야 옥살이!” 아까와 똑같은 멘트. 치.
옆에서 종종 입을 열던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언니 시설에서 나온 지? “육년.” 아 그런데 갑자기 불쑥 들어온 덕민께서 껴든다. “난 팔년 됐는데! 난 올해가 팔년. 어디 까불고 있어~ 나이만 먹으면다야~” 선심, “시설에서 쬐까 살았어. 삼년. 이년 십 개월 만에 나왔응게. 왜 뭣을 인터뷰하고 싶어서! 그때도 했잖아.”
언니는 뭐가 그렇게 싫어서 시설에서 나왔데? 여기서 외롭게 사는 거에 비하면 좋지 않아? “아니 누가 그래? 좋다고 하면 때려죽일 거야.” 뜨헉! “아니 내가 화쟈ᅟᅡᆼ실 좀 볼라그러면 원장이 들어와서 안 나가. 나가라고 그래도.” 끼어드는 덕민, “그럴 때는 막가는 거야. 보는 데서 싸!” 다시 선심, “나가라 그래도 안 본다고 하면서 그냥 (*변)보라 그래. 아이고 징해. 내가 그러고 살았어.” 또 이야기하는 덕민. “아이고 바보. 나는 그냥 싸. 그런다고 안봐?” 나, 원장이 남자에요? “어. 내 방에 티비가 있어서 티비 본다고 들어와서는 안 가. 지방에 티비가 있어도 안 가.” 오, 이건 뭐ㅇ미?
비리시설에서 살기 싫다!!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다!!
언니는 나올 때 어떤 게 가장 힘들었어? “가장 문제가 뭐였을까? 난 돈도 아니여. 돈. 그때 당시엔 없었응게.” 엥??? “사람이 필요했어. 날 도와줄 사람. 어떻게 나가서 살까? 그것이 깝깝하데.” 없던 사람을 어떻게 찾았어? “발바닥에서 도와줬지. 발바닥 ㅇㅅㅇ이가 시설에 조사하러 나와서, 나하고 ㅅㅇ이 하고 인터뷰를 했어. 내 얘기를 들어보더니 이해가 안 된대. 왜 언니 같은 사람이 여기서 사냐고. 이렇게 의지가 강한 사람이 왜 여기 사냐고. 그래서. 나는 여기서 살 수밖에 없다. 내가 부모형제 다 싫다고 하고 나왔는데, 내가 어디로 가냐? 내가 과연 간다고 살 수 있을까? 어디로 가서 살 수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집에는 들어가기 싫었어. 집이나 시설이나 감옥 같은 건 마찬가지지. 방안에서만 살고. 꼭 창살 없는 감옥이야. 작은 유리병이야. 꽉 갇혀 있는 그런 기분 알어?” 닳고 닳도록 들어 조금은 딱딱해 있던 내 귀딱지. 조금 말랑말랑해지려는 이때, 또 끼어드는 덕민. “얘가 어떻게 알아? 가봐야 알지!” 아, 네, 저는 잘 모릅니다. 맞습니다. 덕민. “그건 알 수가 없지.” 선심. “사람들이 아무리 말해도 외로워. 군중 속에 외로움이라고 알아?” 덕민, “얘도 외로워. *자가 없어.” 선심 발끈, “*자가 있다고 안 외롭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어도 내 말을 이해해주고 그럴 사람이 필요한데. 거긴 그런게 안 되는 시설이었어.”
“돈은 한 개도 없었어. 나가도 나한테 (수급비) 들어온께, 그 놈을 모아갖고 살면 되지. 여기 서울에 와서 24시간 혼자 았어본 게 한두 번이 아니랑께. 나오긴 나왔는데. 앞이 캄캄하제. 집을 구하기까지는 너무 깜깜하지. 체험홈에 들어가서도 나는 어려웠어. 누가 살고 있었거든. 그래서 들어가기 전에 센터에서 한 일주일 살았어.” 센터? 사무실에서 살았다고? “그라제. 그러고 있다가 체험홈에 들어왔지.” 이후 언니는 월세생활자로 몇 년을 살다가 이년 전쯤 영구임대아파트로 이사가 혼자 살고 있다.
그래, 나와 사니까 좋아? “좋지. 뭐든지 내 맘대로 할 수 있고. 근디 한 가지 단점이 있어. 단점이랄까 그걸 뭐라 해야 할까? 활동보조 가고 나면 나 혼자 있는 거. 내 몸이 아플 때 혼자 있으면 그때가 힘들어.” 혼자 있을 때 아팠던 적이 많아요? “많아.” “글고 활동보조가 온다 그래놓고 안 오면 엄청 앞이 깜깜해져버려. 24시간 혼자 있다고 생각해봐. 나는 저혈당이 있어가지고, 혈당이 떨어지면 손이 벌벌 떨려. 물을 못 마시고 있으면 비참하요, 먹고 싸는 게 차라리 낫지. 꼭 살아있는 시체야. 눈 뜬 시체나 마찬가지야. **동으로 이사갔을 때도 한번 그런 일이 있었어. 으이구. 또 그런 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살고 싶지 않아. 혼자 있는 건 무섭지 않아. 사람들이 무서워.” 사람들? “안 올까봐. 활동보조인들도 내가 중증이라고 안 와. 중증이라고 말만 듣고 안 와. 보지도 않고” 잠자코 듣고 있던 덕민, 끼어들어, “그런 싸가지. 하든 안하든 보긴 봐야지! 머리카락을 뽐아 버려.” ㅎㅎㅎㅎ누구랑 같이 사는 건 싫어요? 선심. “눈치 봐야 하고. 그런 게 싫어. 같이 살면 눈치 봐야 하니까. 그러니까 그냥 혼자 살고 싶어.”
아, 이놈에 눈치. 눈치 없는 세상에 살고 싶어서, 활동보조 없인 드러누워 있는 것만 가능한 그녀는 혼자 산다. 이것은 내가 종종 혼자 지내는 것이 심심하고 무섭지만 그래도 혼자 사는 것과 같을 게다. 다만 혼자 살아도 외롭지는 않으면 좋겠고, 친구들로 북적이는 일상에 있다가도 고요한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언니 마음 내 마음
그러니까 이 글은 왜 그이들이 그토록 ‘장애인생활시설’ 이라는 곳에서 나오려고 하는 것이며, 그곳에서 나올 때는 무엇이 어려운가를 밝히기 위해 쓴 글이다. 올해 노들바람에선 노들 사람들의 집 이야기를 꾸준히 다뤄보려 한다.
탈시설 자립생활권리 쟁취하자!
2012 봄호 :
탈시설?
집에 있는 나도 자립하고 싶다
재가장애인들의 사연
- by 형호 : 노들야학 학생 -
사전에서 ‘재가’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온다. 결혼하였던 여자가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하여 다른 남자와 결혼함. 사전에 맨 처음 나오는 재가의 사전적 뜻이다. 하지만 내가 찾던 것은 이런 의미는 아니었다. 내가 찾던 재가의 일상적 의미는 ‘집에 머물러 있음’ 이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장애인과 붙여 쓰이게 되면 조금 다른 맥락이 생긴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재가 장애인’ 즉 이 말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사회와 단절되어서 혹은 단절되어 있지 않더라도, 방구석에만 쳐박혀 사는 장애인들을 일컬을 때 쓰인다. 비장애인들한테는 이런 단어를 딱히 붙여 쓰지 않는다. 그들한테는 은둔형 인간 내지는 잉여 인간이라는 단어들이 붙는다. 그런데 왜 비장애인들한테는 쓰지 않고 장애인들한테만 쓰는지는 나도 잘 모르고, 그에 대한 언급할 내용의 글이 아니므로 일단은 넘어가자. 본 글에서는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재가 장애인’ 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해석해서, 현재 가족과 같이 사는 중증장애인들의 자립에 대한 욕구... 다시 말해서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자립하고 싶어도 여건이 안 돼 못 하고 있는 재가 장애인들의 이야기들을 들어볼까 한다.
1. k씨의 이야기....
먼저 야학에 k씨의 (본인이다)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k씨는 뇌병변 1급 장애인이다. 그리고 기초생활수금대상자이다. k씨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가족과 공생관계에 있다고 한다. 적어도 밖에서 바라봤을 때 그렇게 보일 것이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K씨는 가족(부모님)과의 관계에서는 공생관계가 더욱더 두드러져 보인다. 그것은 아마 k씨의 기초생활수급비로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어서인 것 같다. k씨는 현재 그 누구보다 집과 어머니로부터 자립하고 싶다. 겨우 연명만 하는 수준의 기초수금비가 아니고 실질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화폐로, 으의부터도 자립하고 싶다고 한다. 그럼에도 K씨는 한편으로는 집 그리고 어머니와의 떨어짐을 못내 걱정하는 눈치고 막상 자립해서 혼자 사는 것도 두려울 것 같다고 한다. 이는 익숙함과 단절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신의 생활을 도와줄 수 있는 익숙한 조건과 자립할 수 있는 물적 토대의 부재라는 이중고를 장애인들은 겪고 있다.
2. 노들센터 활동가 문주 씨, 40세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데, 집을 나와 자립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네
○지금은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지?
●아버지, 어머니, 나, 애완견, 남동생과 여동생은 각자 결혼해서 따로 살아요.
○수급자인가요?
●아니요.
○장애등급은?
●뇌병변 1급 장애요.
○왜 자립하고 싶어요?
●아버지와 함께 너무 오래 살아서요.
○특별히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편인가요?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니고요. 제 나이가 마흔인데, 부모님과 함께 살면 늘 애 취급 받아요. 아무래도 그게 짜증나지요.
○비장애인들도 자립욕구를 말할 때 비슷한 이유를 꼽는데요. 누구나 성일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존재하지요. 그렇지만 장애인의 경우는 조금 다른 지점이 있지 않나요?
●나이를 먹다보니 자립욕구가 점점 커져요. 센터에서 다른 장애인들에게 자립을 독려하는 입장이지만, 정작 나 자신은 그러지 못하는 실정이에요.
○자립해서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했는지, 최근 들어 고민하는지?
●오래 전부터 꾸준히 생각해왔어요. 부모님이 영원히 살아계시진 않을 테고, 나도 마흔 넘어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게 다섯 달 정도 됩니다.
○그 전에는 자립에 대한 욕구나 생각이 없었는지?
●그 전에는 막연히 혼자 살고 싶다고만 생각했어요. 구체적으로 고민한지는 얼마 안 돼요. 서른다섯쯤. 동생들이 결혼하고 자식낳고 자기 가족을 꾸리는 걸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노들센터)에서 배운 것도 많고 장애인을 대상으로 자립생활교육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더욱 더 자립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됐어요.
○아직 자립을 못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일단 돈이 없어서.(웃음) 그리고 부모님이 놔주질 않으신다.
○부모가 본인이 자립하는 걸 싫어하는가? 왜 그런 것 같은가
●부모님이 아직도 과보호가 심하세요. 부모님이 날 책임져야할 존재로만 생각하고 포기를 못하지요.
○가족의 생활을 어떻게 유지되나?
●부모님으ᄂᆞ 연로하셔서 일을 그만두셨고, 동생들과 내가 조금씩 돕고 있어요. 부모님은 손자들을 보는 재미로 사십니다.
○자립을 하게 되면 혼자서 살아야 하는데, 현실적인 문제들과 직면하게 됩니ᅟᅡᆮ. 그런 부분에 대해 고민하는지? 그리고 자립하게 되면 어떤 부분이 좋을 것 같은가?
●일단 집이 필요해요. 집을 구할 돈이 피룡해서 저축을 하고 있어요. 전세자금은 40% 정도 갖고 있어요. 이 정도로 자립하기에는 벅차고 조금 더 준비가 필요해요. 부모님에게도 장애인들이 혼자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부모님에게 떳떳하고 싶고, 자유를 얻고 싶어요. (아마 문주 씨는 부모님에게 성인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 같다.) 그렇지만, 정작 혼자 살게 되면, 대단히 외로울 것 같아요. 밥을 잘 못 챙겨 먹어서 건강도 안 좋아질 것 같아요. 부모님과 같이 살아도 물론 외로웠지요. 적어도 자립하면 서럽진 않을 것 같아요.
문주 T의 자립에 대한 욕망은, 한 사람의 주체적 존재로 인정받고 싶다는 인정욕구에서 기인한다. 문주 씨는 현재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에서 노등을 통해 돈을 벌고 있다. 자신의 힘으로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중증장애인에 비해 그나마 상황이 좋은 편이다. 장애인의 자립은 가족구성원 특히 부모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망과 부모의 부재(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작용한다.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자립욕구와 함께 장애성인으로서 한 사회의 구성원임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증명하려는 생활인으로서의 자립 욕구가 공존한다.
3. 노들야학 학생 이영애, 40대 추정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고 계신가요?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어요. 같은 건물 지하에 오빠 내외와 조카들도 같이 살아요. 그렇지만 딱히 교류랄 건 없어요.
○본인은 자립생활에 대한 욕구가 있는 편인가요?
●누구 못지않게 많죠.
○자립에 대한 생각이나 욕구는 언제부터 느꼈는지?
●서른 살 지나면서부터요. 노들야학(당시에는 정립회관에 있던)에 다닐 때였는데요. 그때는 활동보조제도가 없어서 장애인들이 가족이나 자원봉사자는 친구의 도움을 받던 시기였어요. 야학에. 주간 보호센터에 나가기 전에는 집에만 있었는데, 노들에 나가면서부터 자립에 대한 생각이나 욕구도 생긴 것 같아요.
○바깥세상과 교류하면서 자립에 대한 욕망도 생겼다는 뜻인가요?
●야학에 다녀보니 자립한 장애인들이 많았어요. 장애인도 혼자 살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이 생겼어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자립에 대한 가능성 같은 걸 다름 장애인을 통해 깨달은 것 같아요.
○지금 현재. 자립에 대비해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적금을 붓고 있는데요. 아직은 준비단계라고 생각해요. 자립하기 전에는 무엇보다 자신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요. 솔직히 자립해서 혼자 살 수 있을까 두렵기도 해요. 부모님 없이 혼자서 결정하고 나를 책임질 수 잇을지. 잘 살아낼 수 있을까 걱정이에요. 활동보조시간도 그렇고 연금도 부족하구요.
○현재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신가요?
●아니요, 부모님 집이 있어서 수급권자는 아니에요.
○왜 자립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한데요?
●부모님이 연세가 많으신데, 언제까지 부모님과 같이 살 수는 없잖아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저는 살아야 하는건 현실인데요. 어머니는 제가 혼자 남겨질까봐 걱정이 되나 봐요. 저보고 어서 자립하라고 말씀은 많이 하세요
○자립을 아직까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혼자 살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나 혼자서 감당할 수가 없어서 자립할 수 있을지 늘 걱정이에요. 일단 저는 1급 뇌병변장애에 누워서만 생활해야 해요. 활동보조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가령 밤에 아프다거나 활동보조인이 없는 시간에 사고라도 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생각해보니 영애씨의 경우 활동보조가 24시간 붙어있지 않는 한 티브이를 켜거나 물을 마시는 사소한 행동도 어려운 실정이다.)
○만약에 앞으로 자립하게 되면, 현실적인 문제들이 많을 텐데 그런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거나 대비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살 집을 구하는 것부터가 막막하네요. 활동보조와 같이 생활하는 것도 걱정이구요. 아무래도 자립하게 되면 활동보조인과 같이 살아야 하는데요. 잘 맞을지도 그렇고 턱없이 부족한 활동보조 시간도 걱정이구요.
사실 그녀에게 모든 것들이 현실적인 문제이며 동시에 현실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막연함과 막막함 사이에 내던져진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막막한 걸까? 막연할 걸까? 자립을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가 중요한데, 사실 그녀에게는 그보다 더 불안한 자신에 대한 문제가 있는 듯했다. 각자 놓인 현실의 지형도 풍경도 다 달랐다.
독립과 자립은 어떻게 다른 걸까? 주변에도 열심히 물어봤지만, 딱히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일제 치하에서 미군정과 소련에 의해 독립을 당했지만 자립하지는 못했다. 스스로 노력과 의지가 있는가의 유무가 중요할 것 같다 남과 벽을 쌓고 자신만의 존재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사는 것의 차이가 독립과 자립의 차이가 아닐까? 자립이든 독립이든,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기본적인 삶의 조건, 의식주를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는 건데. 이 부분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막막함과 막연함 사이에 덩그러니 던져진다. 어쩔 수 없다. 고독해질 수밖에.
4. 노란들판 디자이너 대식
(사정상 이메일을 통해 인터뷰가 진행되었습니다.)
○현재 가족과 살고 있나요?
●네.
○가족 구성원은 어떻게 되나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누나가 있습니다. 집은 별내면 청학리 소재 아파트인데, 어머니가 미용실을 운영하셔서 전 어머니와 같이 태릉입구역 근처 목동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자립의 욕구가 있나요?
●내 생각에는 자립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라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평생 같이 살 수는 없으니까요. 사실 겁도 나고, 걱정도 되지만, 마음에 준비는 하고 있지만, 아직 자신은 없습니다.
○자립의 욕구가 있다면 오래됬나요? 언제부터인가요?
●욕구가 있었다기보다는 자립생활센터를 알고서 중증자아애인도 시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혼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한 5,6년 된 것 같네요.
○그러면 현재 자립 준비는 하고 있나요?
●따로 준비한 것은 없습니다.
○지금 현재 자립을 못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고 걸림돌은 무엇인가요?
●일단은 겁나서이기도 하고 아직 사회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이 중증장애인이 혼자서 살 수 있는 시스템이겠지요.
○막상 자립하면 현실적인 면 그러니까 본인이 모든 것을 책임을 갖고 생활해야 하는데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질문을 정확히 이해를 못했습니다. 자립하려면 경제관념이 필요하겠지요.^^;;
○가족들과 관계는 어떤가요. 원만한 편인가요?
●그다지 원만하지 않습니ᅟᅡᆮ. 개인적 프라이버시라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본인 자립에 대해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반대하고 있지 않나요?
●찬성이나 반대 그런 것을 아직 없습니다. 따로 얘기해본 적이 없어서요.
○본인의 장애종류와 등급은 어떻게 되나요?
●근육장애고요. 더 자세히는 뒤시엔느 근육영양증?! 이라고 하는데 나도 사실 사전을 봐야 병명을 알 정도로 병명이 낯섭니다. 장애 등급은 1등급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사람들에게 나에 관해서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인터뷰로나마 말할 기회가 돼서 좋았습니다.
대식 씨의 이메일 인터뷰에 장애인들의 자립에 대한 해결책이 제시돼 있는 것 같다. 자립이라는 생활의 방식에 대한 두려움이야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자립을 저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자립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의 시스템에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을 난처한 존재, 부끄러운 존재로 인식하는 사회의 편견과 장애인을 한 사회의 주체로 바라보지 않는 사회의 시선, 그런 시선들이 장애인 당사자에게 자립에 대한 공포를 배가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경제관념은 굳이 경제활동을 체험하지 않아도 사회 안에서 학습가능하다고 믿는다. 장애인이 경제관념에 취약한 것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장애인당사자들에게 경제적인 권한을 주지 않거나 자기결정권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012 봄호 :
당신은
독립군이오?
번외/ 독립 못한 비장애인도 많다
- by 민구 : 노들야학 교사 -
본 꼭지에서는 독립 못 한. 또는 독립 안 한 비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인터뷰하는 동안 '독립의 기준이 뭐지?' 라는 궁금증에 빠져 들었지만 더 깊숙이 들어가면 머리 아프니까 여기서 덮자. 여기서는 부모님과 함께 살 고 있으면 ‘비독립’ 으로 분류해서 인터뷰했다. 독립하고 싶지만 사정상 못하는 경우도 있고 함께 사는 게 좋아서 독립 안하는 경우도 있다. 가족과 ‘함께 사느냐’ , ‘떨어져 사느냐' 만으로 독립을 ’했다', ‘안했다'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가족과 함께 살며 서로가 서로를 부양(?)하며 살 수 있고. 가족과 떨어져 산다고 해도 경제적, 정신적으로 기대어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한 독립군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판단할 몫인 것 같다. 당신은 독립군인가 비독립군인가?
5자 인터뷰(다섯 글자로 묻고 답하는 방식의 잔재미)
► ► ► ► 첫 번째 인터뷰 : 미쓰 킴
►왜 독립 안 해?
하고 싶긴 해.
제가 자금 살고 있는 가정 내에서 저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독립을 한다는 건 다론 가족 구성원들이 독립을 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엄마가 많이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저 개인의 독립 의지만으로 결정하긴 어렵네요.
►좋은 건 모야?
있긴 있겠지.
요즘 제 상태로는… 좋온 것 보다 힘든 게 많아서… 패스!
►나쁜 건 모구?
내가 없는 듯.
가족과의 관계가 너무 밀착되어 있으므로.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기 어렵다.
►언제 독립 해?
이천십삼년.
(왜 2013년?)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이 마무리 되고 진정 되려면 일 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듯. 그때가 되면 엄마도 동생들도 달라진 환경에서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 독립하길!
►나에게 ‘독립' 이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
► ► ► ► 두 번째 인터뷰 : 안 도인
►왜 독립 안 해?
함께 살아요.
우리는 서로 모시고 있는 증. 모시며 함께 살아요.
►좋은 건 모야?
손발이 편해.
청소, 빨래, 밥. 손에 물 안 묻히고 살아요. 힘쓸 일 있을 때 써요. 저는. 짐 옮기고 운전하고. 언니둘이 나보고 아들이라고 했어.
►나쁜 건 모구?
일찍 가야 해 or 술을 못 먹어.
술 취한 딸내미 절대 못 보겠다는… (조금만 먹으면 안 돼?) 취하지 않을 정도만 먹고 들어가고 있어요. 늦게 들어가는 것도 좀… 엄마 아빠랑 얘기할 시간도 없고 해서 웬만하면 일찍 물어가서 같이 밥 먹으려고 해요. 제가 하는 밥은 아니지만.
►언제 독립 해?
계획 없어요.
얼마 전에도 아빠랑 술 마시는데. 결혼하라고. 할 생각 없는데.
►나에게 ‘독립’ 이란?
혼자다. 혼자인 게 되게 좋던데. 혼자 나한테 오롯이 집중하는 게 되게 좋더라고요. 지금은 왜 그걸 못할까? (여기서 순정녀 등장: 우리 집은 혼자 있으면 너 혼자 거기서 워 하냐구 끊임없이 물어봐. 왜 너 혼자 있냐구. 나오라구.} 나를 위해서 밥을 하고 장을 보고 빨래를 하고 바느질 하고 그냥 그런 시간들이 평화로웠던 거 같아요. 시도 쓰고 누구랑 갈이 못 살 거 같아. 그러고 보니. 다론 사람을 위해서 그런 거 못할 거 같아.
► ► ► ► 세 번째 인터뷰 : 조코디
►자립은 언제?
결혼이후에.
언젠가는 해야 할 거니까. 내가 비혼주의자는 아니지만 결혼제도에 대해서 호의적이지만도 않고. 하지만 뭐 가족이랑 연을 끊지 않는 이상 결혼은 피할 수 없겠다고 스스로에게 합리화를 했어요.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 빠르면 내년? 어머니나 집에서 하도 말을 많이 하셔서. 만나는 사랑도 있고. 난 민구형 결혼하면 그 다음에 할 거예요. (옹… 그럼 내가 안하면 현수도 안 하겠네?) 하하하하
►좋은 건 모야?
돈이 덜 들어.
너무 개인사까지 나올 것 같긴 한데. 저희 집 형편이 좋지 않아서 월계동 주공아파트. 작은 아파트에서 10년 넘게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거기는 임대니까 비옹도 적게 들고 해서 주거비를 내가 낼 것도 없고. 어머니랑 동생이랑 같이 살고 있는데, 생활비나 이런 것도 덜 들고. 이것저것 학자금이며 갚을 돈이 있는 상황에서 마음은 나가서 살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돈 생각하면 앞이 깜깜해서. 접었죠.
►나쁜 건 모구?
내 방이 없어.
좁은 집이라서 그나마 지금은 아버지가 지역에 내려가서 농사짓고 계셔서 종 낫긴 한데. 아버지랑 어머니랑 동생이랑 저랑 넷이 살 때는 정말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어요. 공동체적으로 생각했을 때 각자의 방이 존재하는 게 좋기만 하겠냐마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야 할 때도 있는 거고 자기 방이 있어야 휴식다운 휴식을 할 수도 있는 건데 그게 안 되니까 싫었죠. 그래서 나와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
►나에게 ‘자립’ 이란?
책임. 한 성인으로. 부모님 품을 벗어나서 하는 최초의 행위이기도 하고. 대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동거를 하며 자취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의 삶율 책임진다는 의미에서 자립일 수도 있을 것 같고 아무래도 자립을 하게 되면 스스로의 일상을 잘 관리해야 하기도 하니까. 반려자가 있다면 서로의 삶을 책임지고 같이 영위해 나가야 하는 공간일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책임인 것 같아요. (자녀를 낳는다면 아들이 좋아, 딸이 좋아?) 저는 딸이요. (딸 하나?) 생각을 해 보진 않았지만 두 명은 있어야 하지 않올까? 아이 한 명 키우는 것도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둘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딸 둘?) 딸 둘이어도 좋고 딸 하나 아들 하나도 좋고. 근데 아들 아들은 싫어요. 우리 형제가 그렇기 때문에. 너무 싫어.
► ► ► ► ► ► 네 번째 인터뷰: 맹
►왜 독립 안 해?
돈이 없어서.
엄마 집 있어. ㅋㅋ 엄마랑 둘이 살기에 좋아요. 물론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왜 안 들어오니” 하지만. 근데 또 혼자 살면 쓸쓸할 것 같기도 하고. 가끔 엄마가 여행을 가시거나 그러면 마음의 파티를 열죠.
►좋은 건 모야?
사람 냄새 나.
각박한 서울에서 혼자 사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든든한 엄마라는 버팀목이 집에 있고,때 되면 밥 해줘, 가끔 내방 청소도 해 주시고 좋죠.
►나쁜 건 모야?
외박 못하지. 아니아니. 외박 힘들지. 하긴 하지. 못할 건 또 뭐야. ㅋㅋㅋ하곤 있어요. 주말에 퍼질러 있고 이런 거, 싫어하시죠. “영어 공부해라". ”교회 가자“, ”목욕탕 가자“ 잔소리도 있네요.
► 명희에게 독립이란?
먼 얘기인 것 같아요. 아직. 그런 생각의 출발점이 내가 여기서 나가고 싶다거나 지금의 삶과 다른 패턴의 삶을 살고 싶다는 게 강한 상태일 텐데. 사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지도 않고, 오히려 엄마랑 많은 걸 갈이 해보고 싶어요. 어릴 때 보다는. (전반적으로 어머니랑 사는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구나?) 그럼요. 만약에 아버지가 계셨으면 자립을 하고 싶은 게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으니까. 엄마랑은 좀 다른 거 같아요. 워낙 또 오래 살았고. 따로 산 적이 없으니까.
노들바람
2012
연간기획 series 2/4
우리,집,이야기
2012 여름호 :
시설 아닌
다른 삶은 가능합니다.
탈시설한 노들 사람들의 거주지 변천사
- by 온전 : 노들야학 교사 -
지금으로부터 꼭 3년 전인 2009년 6월 마로니에공원에서는 시설에서 뛰쳐나온 여덟 명의 장애인이 ' 탈시설-자립생활 권리보장' 을 외치며 노숙농성을 시작합니다.
어떻게 시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누군가의 답.
‘너 시설 안가면 어디서 먹고 살 거니? 엄마의 그 한 마디에 말문이 막히더군요’
그리고 농성하는 이들에게 쏟아지는 질시.
‘대책 없이 왜 나왔냐’
이때의 이야기를 담은 EBS 지식채널은「산 좋고 물 좋은 곳」 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살려고 들어간 곳이었는데, 30년이 지나도록 바깥세상은 아무런 대책도 만들지 않은 채 너희는 그냥, 거기서, 그대로 죽으라, 했습니다. ‘대책 없이' 도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이들의 싸움을 시작으로 그 후 3년간 새로운 대책 몇 가지가 만들어집니다. 2010년 서울시는 「탈시설 장애인 전환서비스 지원 사업」으로 「자립생활 체험홈」과 「자립생활가정」 등의 주거 공간 지원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대책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대책에 의해 이 도시 속에서 집을 얻고, 사랑하는 사랑을 만나고,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다니거나 직장을 다니며 보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편에서는 「장애인생활시설」 을 박차고 나와(흔히 ‘탈시설' 이라고 합니다.) 「그룹홈」. 「자립생활 체험홈」 . 「자립생활가정」 그리고 「평원재」 등 다양한 장애인 주거지원 정책을 섭렵하며 탈시설 이후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그전에 미리 알고 가세요!
★서울시 장애인 전환서비스 지원센터란?
•장애인복지 패러다임의 변화. (1. ‘보호, 재활’ 에서 ‘자립생활,사회참여' 로 / 2. 생활시설 소규모화 및 거주시설로의 개편)로 장애인의 지역사회 통합을 돕기 위한 기본 틀을 마련하는 지원사업을 한다.
•자립생활 희망자에 대한 개인별 전환서비스 계획을 수립, 지원하며 장애인 거주시설 입 • 퇴소를 체계적으로 지원, 관리한다.
•<자립생활 체험홈>, <자립생활가정>을 운영하고 인권향상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교육한다.
★장애인생활시설(이하 ‘시설□) 이란?
장애인이 필요한 기간 생활하면서 재활에 필요한 상담 • 치료 • 훈련 등의 서비스를 받아 사회복귀를 준비하거나 장애로 인하여 장기간 요양하는 시설이다.
★장애인 자립생활 체험홈(이하 ‘체험홈□)이란?
•장애인생활시설 거주자 중 자립생활 희망자가 6개월에서 24개월 동안 지역사회 내에서 거주하면서 자립생활을 처음 경험하는 곳으로, 지역사회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위하여 일상생활 및 사회적응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을 체험하는 주거공간이다.
•아파트나 단독주택 등 1 개 주택에 3〜4인이 거주(1 인 1실을 원칙, 주택규모에 따라 입소인원 조정)케 하며, 2012년 현재 서울에서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포함 17개소에서 체험홈을 위탁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가 주택 임차비용, 공공요금 등의 비용을 보조하고, 이에 대한 운영은 노들과 같은 장애인단체에 위탁한다. 입주자는 생활비(개인물품 비용)만 부담한다.
•입주자는 입주기간 동안 다양한 자립생활 훈련을 체험하게 되며, 이후〈자립생활가정〉으로 옮겨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한다.
★ 자립생활가정이란?
•탈시설 장애인에게 기본 2년에서 최장 5년 동안 지역사회 공공임대주택과 일상생활에 대한 자원을 연계, 지원하여 완전자립을 위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주거공간이다.
•다세대주택 등 지역사회 주택을 활용한 공공임대주택 형태로 1 개 주택에 3〜4인이 거주한다.
•생활시설을 퇴소한 장애인(이면서 체험홈을 수료자 등)이 우선 입주한다.
•서울시가 주택 임차비 및 리모델링. 공공요금을 부담하고 이에 대한 운영은 서울시복지재단 (장애인전환서비스지원센터)이 한다. 입주자는 생활비(개인 물품 비옹)만 부담한다.
★ 영구임대아파트란?
•영구적인 임대가 보장된 주택으로 기초생활수급자. 등록장애인 등이 그 자격이다. 1992년 공급 중단 이후로 기존 입주자가 퇴거해야 입주 가능하므로 대기자가 많다.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 임대보증금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평균 2백만 원 정도. 월 임대료는 평균 4만 원 정도이지만 재계약을 할 때마다 약간씩 늘어난다.
- 출처: 서울복지재단 홈페이지 / 자립생활정보집(2008. 시설인권연대)
★ ps. 평원재란?
사회복지법인 평원재단이 운영하는 장애인 자립생활 주택이다. 2001년부터 노들야학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던 ‘얼굴 없는 후원자' 평원재단이 2008년 갑자기 그 모습을 드러내며 노들 인근 명륜동에 뚝딱뚝딱 지어 올린 빌라다.
•법적으로 생활시설도, 그룹홈도, 체험홈도, 자립생활가정도 아닌. 그저 평원재다.
•남성층, 여성층을 운영하며 한 층당 입주자는 3~4명이다. 주택관리 비용 일체는 평원재단이 부담하고. 입주자에 대한 지원은 노들장애인 자립생활센터와 노들장애인야학 등 지역사회 기관들이 협조해서 진행한다. 입주자의 자치적 생활을 지향하는 장애인 공동 생활공간이다.
•좀 고급스럽다.(고 난 생각한다.)
► ► ► ► ► 김** (53세. 남. 현재 자립생활가정 거주)
나는 김포에 있는 S요양원(장애인시설)에서 20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곳은 오래전부터 비리가 있었는데 2008년부터는 장애인 인권단체와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해 싸웠습니다. 2009년 6월에 시설을 뛰쳐나와 탈시설 농성을 함께했고, 그 농성이 끝나고 임시로 평원재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농성을 함께한 사람들이 모두(여성1명. 남성7명) 같이 평원재에 들어갔으므로 처음에는 남자 일곱 명이 한 집에서 지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세 명이 체험홈으로 이사해 나갔기 때문에 나중에는 네 명이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평원재는 남성층, 여성충이 따로 있었고 집이 아주 넓고 좋았으며 노들(야학. 센터) 근처였기 때문에 생활하기 무척 편리했습니다. 공동생활이 가자는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큰 어려용은 없었습니다.
나는 2010년 9월에 평원재 여성층에 싫던 주•님과 결혼을 했습니다. 우리는 결혼하고 바로 노들센터에서 운영하는 체험홈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원래 노들센터 체험홈온 남성전용 주거공간이지만, 운 좋게도 그 시기에 체험홈에 다론 입주자가 없었어요. 노들이 우리 사정을 알고 배려해 주어서 우리는 함께 살 수 있었습니다. 체험홈과 평원재에서 생활하는 동안 우리 부부는 노들야학에서 공부하며 노들센터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그렇게 1년쯤 지냈습니다.
체험홈 계약기간은 1년이었지만. 자립생활가정이 생각보다 빨리 선정되어서 2011년 1 월에 또 이사를 했습니다. 5충 빌라 건물에 1충입니다. 4호선 이수역에서 40분 거리에 있는데, 가파른 오르막길을 넘어야 합니다. 나처럼 수동휠체어를 탄 사람에게는 아주 힘들죠. 특히 겨울에는요. 야학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밤 12시가 됩니다. 월세, 관리비는 우리가 내지 않아도 돼요. 우리는 딱 우리 먹을 것. 입을 것만 사면 돼요. 계약 기간은 기본이 2년이지만 5년까지 연장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영구임대아파트가 나오면 좋겠지만 안 나온다면 그때까지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사는 곳이 생활하기 썩 편리한 건 아닙니다. 마트나 병원에 가려고 해도 이수역까지 나가야 해요. 같이 사는 주*님이 몸이 많이 아파요. 다닐 수 있는 병원이 마땅치 않았는데 혜화독립진료소에서 진료도 해주고 약도 주니까 열심히 다니고 있죠. 많이 좋아졌어요.
나는 S요양원 뛰쳐나올 때 자립생활 의지만 있었지. 이렇게 될 줄은 짐작도 못 했습니다. 2009년 탈시설 농성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있었는데 그때 서울시에서 자립생활가정 20채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었습니다. 그 중 한 채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거지요. 신기합니다.
집에 있어서 내 최종 목적지는 영구임대아파트에요. 신청은 이미 해놓았습니다. 동사무소 직원은 ‘방화 쪽 어떠냐' 하는데 너무 멀어서 싫다고 했어요. 노들에서 멀어지면 힘들어요. 집 구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건 노들에서 가까운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하철역에서 가까운지예요.
► ►►►► 金**(49세. 남, 현재 월세아파트 거주)
나도 김••님과 같이 S요양원에서 22년 동안 살다가 2009년 탈시설 농성 끝나고 평원재에서 잠시 살았습니다. 평원재는 한 층에 방이 세 개이고 3~ᅳ4명이 살도록 만들어진 집이라 일곱 명이 지내기에는 좀 무리였습니다. 그러니 같이 살던 사람들끼리 싸우기도 많이 싸웠죠. 7개월쯤 살았어요. 평원재 생활은 아주 편했습니다. 너무 좋으니까 이건 자립생활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도 자립생활 처음 시작한 곳이었고, 어느 정도 적응도 되었으니 좀 더 버티고 있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어차피 나가야 할 거 하루라도 빨리 부딪쳐 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죠. 그즈음에 노들센터가 체험홈을 열어서 입주 신청을 했고 선정되어서 평원재에서 함께 살던 세 명과 같이 나왔습니다. 2010년 눈이 많이 오던 날 이사를 했던 기억이 나요
체험홈온 평원재보다 평수가 조금 좁았던 것 빼고는 큰 불편함은 없었다. 방이 세 개라 모두 각방을 쏠 수 있어 좋았어요. 그곳에서 7개월을 살았습니다.
2010년 10월에 화곡동에 있는 자립생활가정에 선정되어서 우리 세 명은 또 함께 이사했습니다. 그땐 좀 힘들었어요. 방은 세 개였지만 휠체어가 들어가면 방향을 틀 수 없을 만큼 크기가 작았습니다. 처음 이사했을 땐 스위치 같은 것들이 모두 우리 손에 안 닿도록 높이 달려있어서 불편했어요. 집안에서 우리는 보통 앉아서 생활하니까요. 장애를 고려해서 만들어진 집이 아니었던 거죠. 이사를 하면 수리를 하는 게 큰 스트레스예요. 집은 화곡역에서 20~30분 거리에 있었는데 야학까지 통학하기가 너무 멀었어요. 처음 서울복지재단(자립생활가정 운영주체) 측에서 화곡동에 집이 나왔다고 하기에 멀어서 안 가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담당자가 다론 곳에 자리가 나면 옮길 수도 있으니 이론 시일 내에 찾아보겠다고 했죠. 그래서 일단 들어갔습니다. 집이라는 게 내 맘처럼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 알고 있었으니까요. 자립생활가정은 공공임대주택을 활용하는데 방 두세 개인 집을 구하기엔 예산이 적온 모양이에요. 다른 자립생활가정들도 대부분 지하철역에서 좀 떨어져 있는 것 같아요.
그때 나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빨리 결혼해서 항께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남자들만 모여 사는 화곡동 집에선 불가능했죠. 나는 화곡동 자립생활가정을 ‘포기’ 하고 나와 2011년 5월에 도봉구 창동에 15평짜리 월세아파트를 구해 여자친구와 살림을 합쳤습니다. 자립생활가정은 일단 들어가면 길게는 5년까지 살 수 있는데 그 동안은 집에 들어가는 돈이 거의 없어요. 전세금도 전기세도 모두 서울시가 내줍니다.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월세 집은 모두 우리가 부담해야 합니다. 보증금은 체험홈 자립생활가정에 살 때 아끼며 모아두었던 적금으로 마련했지만, 매달 꼬박꼬박 월세를 마련하는 일은 좀 빠듯합니다.
자립생활가정을 증도에 포기하고 나올 때. 다시 신청할 수 없다는 확인서 같은 것을 썼습니다. 여자친구는 아예 자립생활가정을 신청할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탈시설장에인이긴 하지만. 체험흉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죠 자립생활가정은 체험홈을 거친 사람들만 신청할 수 있어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둘이 함께 살 수 있게 된 것으로 만족해요. 스트레스야 없을 수 없겠지만 근근이 생활할 만합니다.
임대아파트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사는 아파트가 올해 10월이면 계약이 끝나거든요. 집주인 말로는 아들이 장가가면 들어와 살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임대아파트도 자리가 가끔 나는데 위치도 대중없고 보증금, 월세도 다 다롭니다. 저번에도 임대아파트 자리가 한 번 나왔는데 저회랑 안 맞아서 포기했어요.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기에는 너무 좁았어요. 혹시 올해 (집주인 아들이 장가를 가서) 이 아파트 재계약을 못 하면 또 이사를 가야 하는데. 다른건 몰라도 이사하는 일 너무 피곤해요. 집을 구하기도 어렵지만 이사해서도 집을 수리해야 하고 그때마다 집주인 눈치를 봐야 하니까요. 우리 둘이 들어갈 수 있는 영구임대아파트가 어서 나왔으면 좋겠어요.
► ►►►► Kim**<28세. 여, 현재 평원재 거주)
나는 스물셋 되던 해까지 평택에 있는 D아동재활원(장애인생활시설)에 살았습니다. 규정상 성인이 되면 다론 성인시설로 옮겨가야 했지만 내가 계속 버렸습니다. 한 번 옮기면 평생이 될지도 모르는 시설을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인시설 다섯 군데 정도를 보러 다니기도 했어요. 하지만 어디도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스물세 살에 서울에 있는 국립재활원에서 3개월 동안 자립생활교육을 받았습니다. 국립재활원에서 먹고 자면서 받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런 교육을 받은 것은 D재활원 역사상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하더군요. 처음으로 D재활원 바깥으로 나온 것이었는데. 그때 나는 세상에 나 같은 장애인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립생활교육을 수료한 후, 나는 D재활원에서 운영하던 그룹홈(서울 은평구)으로 옮겨갔습니다. 2007 년 10월이었습니다.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룹홈은 살다가 (지역사회로) 나갈 수도 있다고 했고. 여기보단 낫겠지. 도전이나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그룹홈은 방이 세 개인 집이었는데 사회복지사 선생님까지 다섯 명이 함께 살았어요. 그 중 내가 가장 나이가 않았고. 남자아이도 한 명 있었죠. 그룹홈 생활이라고 뭔가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은 여전했었죠. 그러나 나는 (비록 눈치 보며 허락을 받아야 하긴 했지만) 외출, 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습니다. 떨렸어요.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그톱홈 입소자는 의무적으로 지역사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했는데 2008년 6월에 노들야학에서 하던 ‘치유 퍼포먼스’ 프로그램을 소개받고 일주일에 한 번씩 참여하다가 아예 노들야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들야학에 다니면서 자립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을 보게 되었고,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9년 7월 그룹홈을 나와 평원재에 입주했습니다. 저로서는 큰 결단이었습니다. 평생을 살아온 그곳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었으니까요.
평원재 생활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옷과 음식이었습니다. 옷을 좋아하거든요. 내 마음에 드는 옷을 내가 직접 살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먹을 때 다른 사람 눈치 안 봐도 되는 거요. 천천히 먹어도 되고 내 먹거리는 내 의지대로 선택하고 내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불편한 점은 내가 야행성이라 사람들과 생활리듬이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는 새벽 2시쯤 자서 아침 10시에 일어나는데 평원재의 다론 사람들은 아침 일곱 시부터 깨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거기다 활동보조인들이 번갈아 오다 보니 집안이 온종일 북적대는 느낌입니다. 잠을 편하게 못잡니다. 눈치 보는 건 여전하네요.
평원재에서 2년 정도 살고 있습니다. 나는 그룹홈을 거쳐 왔기 때문에 체험홈 입소자격이 안 돼요. 체험홈을 수료하지 않으면 자원생활가정도 들어갈 수 없대요. 그러니 나에게 남은 가농성은 임대아파트밖에 없습니다. 임대아파트도 마용처럼 빨리 구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니 나는 아마도 그냥 월셋집을 구해야 할 거예요
올해에는 평원재를 나가려고 마음먹고 있어요. 평원재 쪽에서는 이사 갈 집이 마련되지 않으면 내년까지는 있어도 좋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하早라도 빨리 나가고 싶습니다. 도전하고 싶어요. 내 살림을 살아보고 싶습니다. 나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을 구하려면 못해도 3〜4천은 있어야 한 대요.
지금까지 평원재 살면서 모은 돈에 전세자금 대출도 받으면 어찌어찌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1 월에 계약하고. 12월엔 집수리하고 가구 같은 거 들이면. 내년에는 정말 ‘내 집' 에서 살 수 있겠죠? 흔들리긴 하지만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죠.
►►►►► 인터뷰는 여기까지.
2005년 이후 수년 동안 노들야학 학생 수는 35명 선을 유지합니다. 들고 나는 사람들이 마치 그 선율 유지하기 위해 협의라도 한 것처럼 그 선은 오랫동안 지켜졌습니다. 그러다 2009년 9월 새 학기에 들자. 노들야학 학생 수는 50명 선을 찍으며 계단형으로 상승합니다. 그 기점에 탈시설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야학에서 저녁 네 시간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시설이 아닌 '집' 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는 그 집을 마련하기위해 고군분투했던 노들의 ‘주거복지사업팀’ 이 있었습니다. 그 팀을 움직였던 힘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센터/야학의 연간 예산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보조금에서 나왔습니다. 옵션으로 따라온 마감과 실적보고. 실사의 압박도 큰 몫 했겠지요. 정책적으로 편성된 예산과 그 돈이 갖는 집행력이 노들의 일상을 뒤흔들며 문화를 바꾸어 놓는 일, 이 사업만큼 잘 보여주는 경우도 드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극소수의 경우입니다. 이러한 삶의 가농성이 아직은 구호로만 존재했을 때. 야학의 S는 시설로 보내졌습니다. 그이의 어머님을 찾아가 힘드신 거 알지만 조금만 더 참아 주시라. 위로 아닌 위로를 늘어놓으면서도, 정작 S에게는 성질 죽이고 얌전히 지내시라. 화를 냈었습니다. 지친 가족이 끝내 부양을 포기하고 S를 시설로 보내었을 때 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S가 보내진 시설을 찾아가 그를 ‘면회' 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땐 우리의 실력이 거기까지였다고 자위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부끄럽고 불편한 기억입니다. 오래전 일이었으면 좋겠습니다만,2008년의 일입니다.
2012년입니다. 시설 아닌 다른 삶은 가능합니다. 빈약한 상상력 굳이 작동시키지 않아도. 노들은 매일매일 그 변화를 함께 겪고 또 지켜보고 있습니다. 주거복지사업팀은 내년에 지원금이 중단될 위기에 처해 서울시와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노들에겐 어느새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진 일상이지만 여전히 김과 金과 Kim은 특별한 소수의 선례로 여러 정책 자료집에 그 사례를 올리며 저들과 싸워야 하겠지요. 살아낸 자들의 몫입니다. 또한 수많은 ‘김' 들에 다를 아닌 노들이 함께 해야 할 몫이기도 합니다. 삶아내는 일 자체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노들의 하루하루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었을 테니까요.
Kim에게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너에게 집이란? Kim의 대답입니다. (그녀는 나와 필담으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내목숨이다
왜냐하면 집이 없으면 시설에 다시 가거나 밖에서 죽을수도 있으니
2012 여름호 :
개똥밭에 굴러도
지역사회가 좋다
- by 신행: 노들야학 교사 -
노들야학 학생들의 현재 사는 곳과 같이 사는 사람, 주거의 형태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사는 곳. 같이 사는 사람, 전
월세의 구분 등 딱딱한 내용이 담길 것 같아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딱딱한 이야기는 집을 구하며 힘들었던 이야기. 시설에서 생활
했던 이야기. 가족과 힘든 관계를 이어갔던 이야기 등으로 금세 변해갔
습니다.
1. 피할 수 없는 겨울잠. 그래도 시설은 No. No.
신행•자금 어디에 살고 계세요?
정온•삼선동에 살고 있어요. 월세고요. 지난번에도 월세를 삶았었는데.
인터넷 벼룩시장을 보고 다시 집을 구했어요.
신행•왜 집을 옮기려고 했어요?
정온•집주인이 나가라고 했어요.
신행 •왜요?
정온•기간이 끝나서.
신행•연장을 하지 그랬어요?
정온•집주인이 왜 재연장을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건 그렇고 벼룩시장을 보고 갔는데. 장애인이어서 안 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미아삼거리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거기도 안 받아주는 거예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집을 알아봤는데. 성북구에서 월세 있다고 해서 보증금 1000만 원에 35만 원짜리로 갔어요.
신행•많이 비싼 곳으로 가셨군요?
정은•처용에는 활보가 자기랑 같이 살자고 해서 그렇게 구했었는데. 활보가 갑자기 안 산다고 했어요.
신행•그렁 돈온 어떻게 마련했어요?
정은•돈율 나중에 엄마가 해줬어요. 그래서 살고 있는데, 알고 보니 관리비가 2만 원이 또 있더라고요.
결론적으로는 37만 원짜리 월세방에 살아요.
신행•그럼 생활이 가능해요?
정온•한 달에 60만 원이 들어오는데. 그중에 37만 원율 방세로 써요
신행 •겨울에는요?
정온•전기세와 가스비까지 합치면 20만 원이 더 나와요.
신행•돈이 안 남잖아요? 어떻게 살아요?
정은•겨울에는 복지관과 동사무소에서 월요일과 수요일에 반찬을 받아서 먹어요. 그 이외의 돈온 없어요.
신행•겨울에는 겨을잠을…
정은•그래도 나는 이 집이 좋아요. 시설에서 완전히 007작전처럼 나왔었거든요. 거기에서 나올 때 도와주었던 사람이 없었으면 나는 여기에도 없을 거예요. 시설에서의 생활이 질렸었기 때문에… 근데 바퀴벌레 때문에 힘들기는 해요. 엄청 무서워요.
2. 주거복지사업?
신행•지금 어디에 살고 계세요?
기영•왕십리에 살고 있어요•
신행•방세는 어떻게 하세요?
기영•방에 대한 돈은 내고 있지는 않아요. 시설에서 주거복지로 나와서 살고 있어요•
신행•누구랑 사세요?
기영•지금은 혼자 살고 있어요. 원래는 정우(가영)와 함께 살기로 했었는데, 정우가 안 들어온다고 해서 저 혼자 살게 됐고, 또 얼마 전에 미영 언니(가명)가 결혼을 해서 선미(가명)가 저랑 같이 살면 어떻겠냐고 주거복지팀에서 물어봤는데. 저는 괜찮다고 했는데 선미가 난리를 쳤어요.
신행*3년짜리 사업이잖아요, 그럼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기영•바로 이 부분이 걱정이에요. 제가 임대주택을 들어가면 좋겠는데. 그 조건이 나한테는 확률이 없네요. 아직 탈시설한 지 1년도 안 됐고… 그리고 아직까지 돈도 조금밖에 모으지 못했고요. 그래서 걱정인데 저는 시설만 아니면 되니까…
신행•시설에서 얼마나 계셨어요?
기영*18년 있었어요.
신행•그때 어떤 집에서 살고 싶다든지 뭐 이런 생각을 했었나요?
기영•그런 구체적인 생각은 없었어요. 일단 나오고 싶었어요. 거기에서는 미칠 것 같았어요.
신행 •왜요?
기영•제가 시설에 있을 때 권익보호협의회 모임이 있었어요. 시설 자체에서요. 제가 거기서 회장을 말게 됐는데 못해도 욕먹고 잘해도 욕먹고… 생활인들한테 욕먹고 선생님들한테도 욕먹고 그랬어요. 그 생활이 좀 힘들었어요. 제가 한 번 나서면 끝까지 나서는 성격이라 조금 미움을 많이 받았어요.
신행•미우나 고우나 같이 사는 곳이어서 미움을 받으면 살기 어렵겠어요.
기영•수급비 때문에도 많이 싸우고 그래서 미운털이 박혔어요. 저희의 수급비를 시설 쪽에서 반을 달라고 하고 그래서요. 니가 뭔데 왜 자꾸 나서서 난리냐고 그랬어요. 지금은 생각이 안 나는데 옳은 말만 하니까 저보고 욕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건 아니지 않냐고 하면서 해대니까 나에게 커피잔율 집어던지려고도 했어요. 나도 악에 받쳐서 그거 던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냐고. 던져보라고 했어요. 주위에서 말려서 진정이 됐어요. 그 사건 이후로 (수급비를) 조금 지능 있는 사람만 받게 됐고 지적장애인들은 반올 내놓았어요. 그때 14명이 수급비를 다 받았어요.
신행•결정적으로 시설을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가 언제에요?
기영•우율증이 심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자살시도를 했었어요. 전깃줄로 목매려고 했어요.
3. 여기서 장낀!! 자살 이야기
학생분들에게 자살시도를 해봤거나, 하려고 했던 분이 있는지를 여쭤보니 여기저기서 손을 드셨습니다. 증간에 엉뚱하게 자살 경험담으로 주제가 흘렀습니다. 이 글의 맥락과 다소 떨어져 있는 주제일 수 있지만 건조하고 피폐한 시설생활, 폭력에 항상 노출되었던 가족과의 생활에서 벗어나 자립해서 살아가고 싶어 했던 이들의 절박함을 표현해 준다고 판단해 여과 없이 내용을 담았습니다. 험한 이야기가 불편하신 분들은 패스하시길.
기성•기슬 익히는 일이 잘 안 돼서 약 먹고 죽으려고 했어요. 수면제. 수면제는 약국 가니까 주더라고요.
진성•우울증 때문에. 칼로 손목을 그으려다 알았다.
선영•나는 많이 해 봤어요. 첫 번째는 아버지 때문에. 맨날 술 먹고 엄마랑 나랑 우리 동생이랑 다 때렸어요. 약 먹고 확 죽으려고 했어요. 수면제… 또 한 번은 칼로 손목을 그었어요. 입으로 칼을 물고 손목을 찔렀어요. (이 분은 양팔을 쓰기가 어렵다) 정말 죽고 싶었어요. 그리고 한 번은 아세론 뚜껑을 따서 먹었어요. 죽으려고… 지금은 그 사람이 누군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누가 전화로 죽지 말라고 해서 마시다 말았어요. 나도 시설에서 좀 있었어요. 나는 애기 때부터 엄마, 아빠가 갖다 버려서… 29살 때까지 있었어요. 정말 거기에서 안 좋은 일이 너무 많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은미•나는 세 번 정도 시도했어요. 첫 번째에는 비눗물을 먹으면 죽는다고 해서 시도했었어요. 한번은 면도칼을 조각내서 목구멍에 집어넣었는데. 그게 넘어갔는데 지금도 내 몸속 어던가에 있율 것 같아요. 세 번째에는 약으로… 수면제 100알… (주변 학생들: 수면제는 약해서 안 죽어〜 차라리 쥐약이 좋아~)
연서•나는 자살시도 엄청 많아요. 어릴 때 물에 들어갔어요. 수영도 못했는데… 피 안 통하게 손과 발도 묶어봤어요 끈으로… 나이가 좀 들어서는 내가 양호샘이랑 일부러 친해져서 약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었어요. 그리고 양호실에서 약을 도둑질해서 먹었어요.
경식•집에서 살 적에 그때 우울증이 온 것 같아요. 한 스물대여섯 쯤에 부엌칼로 손목을 찔렀어요. 그래도 안 돼서 물을 틀어놓고 얼굴을 세숫대야에 처박았어요. (일동 웃음) 그리고 나이통 끈으로 목을 칭칭 감고… 그리고 언젠가는 개천 뚝방길에서 시멘트 바닥에. 건물로 치면 한 2충 높이 정도 되는 곳에서 떨어지려고도 해봤어요. 엄마가 따라와서 말려서 살았죠. 근데 양잿물보다는 빙초산이 더 좋아요. 빙초산 먹으면 직빵으로 가.
탄진•나는 다섯 번. 괴로워서. 내가 왜 이렇게 실아야 되는지… 속상했어요. 그래서 죽으려고 했어요. 칼로 배를 찔렀어요. 그래서 시설 직원이 놀래서 병원에 데려갔었어요. 자살시도 이후에 원장이 야구방망이로 엄청 때렸어요.
정민•나는 본의 아니게 세 번 했어요. 한 번은 내가 죽으려고 지적장애인들이 먹는 약 있잖아요. 그거 안에 신경안정제가 들어있어요 그걸 열 알만 먹으면 사람이 제정신을 못 차리고 분간을 못 하거든요? 누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그걸 모아서 먹었어요. 병원에 가서 위세척해서 살고. 또 한 건은 술도 못 먹는 사람이 술을 3홉짜리 한 병을 홀랑 마셨어요. 안주가 라면. 그거먹고 완전히 맛이 가서 휠체어률 탔는데 어떻게 올라갔는지 시설 내방으로 올라갔다가 중간에 땅바닥으로 떨어졌어요. 날 휴게실에 데려다 놨는데. 죽겠다고 밖으로 뛰쳐나오다가 입이 찢어졌었어요.
4. 가족과 사는 것도 만만치 않아요.
상수•나는 가족이랑 같이 살고 있어요. 누나는 시집을 갔고, 엄마 아빠랑 살고 있어요.
신행•같이 사니 어때요?
상수•아빠랑 맨날 싸워요. 아빠가 내 말에 대꾸를 안 해요. 아빠가 사이코 기질이 있어요. 약은 안 먹는데... 정신과를 간다고는 해요 내 생각에는 아버지가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누나가 그랬어요. 아빠 같은 사람이랑 살았으면 진작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거라고 엄청 때리고 그래요. 내 머리를 터뜨려서 피도 나고 그랬어요. 마음 같아선 아동학대죄로 고소를 하고 싶었어요. 그때는 아동학대가 원지도 몰라서 못했죠. 엄마도 때렸었는데. 경찰서에 다녀온 이후로는 때리지를 못하더라고요. 어떨 때에는 목을 잡고 괴롭힐 때가 있어요. 지금은 나아졌지만요. 지금도 때리고 싶겠죠. 얼마나 많이 맞고 자랐는데요. 제가 이렇게 어눌하게 된 것도 아빠의 탓도 있어요. ‘병신자식아’ 라고 이야기하는데 제대로 될 턱이 있나요.
신행•지금이라도 집을 나가고 싶나요?
상수•로또 되면 호랑이(아빠 별명이 호랑이)는 안 줘. 로또 되면 엄마 데리고 나가고 싶어요. 지금은 마음이 바뀌어서 쪼금 주고… 난 안양으로 가려고 해요.
신행•왜 안양으로?
상수•어렸을 때 그곳에서 오래 살았어요. 이상하게 거기가 좋더라고요.
신행•가족과 함께 사는 게 좋을까? 혼자 사는게 좋을까?
상수•결혼해야죠〜! 여자가 병을 주고 도망갔어요. 정신병이 여자친구 때문에 생겼거든요.
신행•그런데도 왜 결혼을?
상수•다 잊었어요. 만나고 싶어요.
마치며
“여러분은 지금부터 이 학교를 나갈 수 없습니다. 밥도 급식만 먹고. 매일 수학공부만 해야 합니다. 잠은 선생님들이 퇴근해야 하니까 5시에는 자야 합니다. 기간은 30년입니다.”
ᅵ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인권교육을 갈 때마다 학생들에게 시설생활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성인이 되면 부모에게서 독립을 하고 싶어 합니다. 또한 단체생활보다는 개인의 사적인 공간이 보장되는 것을 선호합니다. 누군가로부터의 간섭과 통제.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은 그들이 장에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원치 않는 주거형태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시설에서 사는 것. 가족과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지사지.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다는 정알 간단한 사실을 생각한다면 장애인의 주거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조금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2 여름호 :
너도 집 없냐?
나도 집 없다
번외 노들 비장애인의 주거 현실
- by 뉴미 : 노들야학 교사 -
-
최저임금 더하기 식대 십만 원, 주거 수당 십만 원, 결혼
수당 십만 원. 육아 수당 십만 원, 또 뭐가 있었던가? 노들 활동가의 활동비는 현재 이린 식으로 결정된다. 극단이나 공장에선 다론 급여 체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동숭동을 증심으로 한 활동가 급여 체계는 이러하다. 갓 들어온 사람과 십 년 일한 사람의 급여가 같다. 앗 주거 이야기를 하려다가 쏠데없이 조직의 비밀을 말하고 있구나.
노들 1호 상근활동가가 30만 원의 활동비를 받던 때에 비하면 굉장히 상승한 급여 수준이지만. 최저임금 근처에 있는 급여 수준이다 보니 활동가들의 생활은 녹록치 않다. 물론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는 주변 이들에 비하면 배부른 수준일 수 있지만. 활동의 폭이나 규모를 생각했을 때 빠듯한 수준인 것은 틀림없다. 집 얘기를 하려다가 활동비 얘기부터 꺼내는 건, 누구나 알겠지만 그 둘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
아 앞으로 쓸 이야기들을 통해 사원들의 사생활이 좀 노출될 수도 있겠지만 동의를 구한 인터뷰였으니, 외우지 말고 슥 보고 넘겨주시면 좋겠다. 대신 활동가라 불리는 그룹들이 어떤 사회경제적 위치에 있는지 총체적으로 살펴봐 주시길. 인터뷰는 비혼자 중심으로 0. 빵. 빈털터리에서 노들의 급여를 받아 과거 현재 미래를 살아가는 동료를 중심으로 진행했다.
여섯 번 이사하고 빚내서 전셋집
집. 서울이 고향이 아닌. 나. 집 떠나와 생활하는 자가 서울 생활을 버터내기가 쉽지 않다. 경북 구미시와 충북 충주시 등에서 오래 생활하다 이십 대 중반, 취직과 동시에 서울로 터전을 옮긴. 나로서는 ‘집' 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곱하기 백을 해도 모자랄 정도로, 문제였다. 어디서 누구와 사는가는 나중 문제이고. 내 월급 수준으로 얼마짜리 집에서 살 수 있을까가 늘 관건이었다.
땅 밑에서 옥상 위까지 집이 가득한 서울이지만. 내 방 하나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성북구 동소문동. 성동구 금호동. 성북구 안암동. 종로구 혜화동. 성북구 성북동. 서울에 온 지 칠 년째인 나는. 아. 여섯 번이나 이사를 했다. 아니 해야 했다. 내 변덕 때문에 좋은 집을 찾아 옮겨 다닌 것이 아니라. 나는 집주인이 방 빼! 라면 방을 떼야 하는. 계층의 사람이었다.
지금의 나는 전셋집에 살고 있다. 전셋집. 전셋집에 오기 전 나는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25만 원을 내는 월세방에 살았다. 동숭동 노들 사무실에서 걸어 10분 거리. 버스비. 택시비 모두 아낄 수 있으며 서울에서 보기 드문 이십만 원 대 월세방이었다. 집이 좁았지만. 사무실에서, 대학로에서 놀면 되니까 그냥 이사했다. 혜화동 전에 안암동 원룸에서 살았는데 월세가 35만 원이고. 너무 후달렸고,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혜화동 집은 싸고 겨울엔 그럭저럭 살 만 했다. 하지만 여름이 되니 화장실에 비가 새고, 현관문에서 방 안으로 물이 넘어들어오고, 곰팡이가 심각하게 피었다. 과로에 지쳐 집에 돌아가면 곰팡이 냄새를 맡으며 ‘못 싫겠다' * 연발했다. 자본론 하드 커버 위로 포심포심 곰팡이가 피고. 손때 묻은 5년 된 일기장에도 공팡이. 도마에도 곰팡이, 내 등에도 공팡이. 내 머릿속에도 곰팡이. 결국 나는 열 달 만에 집주인의 동정을 받으며 이사했다. 성북동 전셋집으로 이사 간다는 내 말에. 집주인 아저씨는 “잘됐네” 했다.
내가 곰팡이와 동거한다는 소식을 접한 오마니는, 나이 서른 먹은 딸이지만 부양의무를 강하게 느꼈던 못하다. 오마니와 새언니와 오빠는 내개 전세 자금을 마련해주겠다고 움직였다. 나에 대한 부양의무와 더불어 나를 철없이 여기는 그들의 동정표를 받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나는. 은행에선 오백만 원 빌려주기도 어려운 등급이라는 나는. 가족의 도움을 받아 전셋집으로 이사한다. 7년 동안 원금과 이자를 매달 상환하는 조건이었다. 나는 그렇게 7년 하우스 푸어. 집 노예 신세가 되고 2년의 생활이 안전한 살 만한 집으로 이사했다. 휠체어는 접근할 수 없는 성북동 산직대기 집.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는 재개발 예정 구역에 속한 나의 집. 곰팡이에서 벗어난 것으로 충분히 행복하지만, 이제 나는 집 노예.
월세 생활자
나와 비슷한 고도에 사는 극단판의 한솔은 노들에 오기 전 종로에 있는 고시원에 살았다. 국가공무원. 것도 경찰이 되기 위해 공부하다. 노들을 만나고. 그냥 하던 연극 계속하며 살아야겠다. 마음먹은 그는, 보문동 극단 근처로 이사한다. 취업을 준비하는 수험생이기도 했고. 부모에게 돈올 받을 처지도 아니었던 그는 친구에게 모자란 보증금을 무이자로 꾼다. 그리고 대학로를 풍은 낙산 언저리 창신동으로 이사.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25만 원인 옥탑방에 살기 시작한 지 2년 6개월이 됐다.
옥탑방에 살기 어때? “옥탑방의 특징 그대로야.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거기다가 정원에서 습격하는 개미들. 겨울엔 동파. 그리고 비가 오면 습격하는 곰팡이들.” 좋은 게 없어? “내가 시끄럽게 해도 아무도 안 올라온다는 거?” 또? 없어? “고시원에서 살다가 개인 공간이 갖고 싶어서 옥탑으로 갔지.” 고시원보다 옥탑이 나아? “훠얼씬 낫지.” 고시원은 보증금이 없고. 공과금을 포함해 매달 23 만 원을 내면 됐다. “일단 고시원에 23만 원씩 내던 버릇이 있어서 크게 부담스러운 건 없는데, 돈을 모을 수가 없네.”
그의 고시원 생활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전에 연극하느라 집을 나와. 18만 원 하는 고시원에서 살았다. 연극을 한다고 돈이 나오는 게 아니니. “연극이 고정수입원이 없고. 연극한다고 해도 3개월에 한 번 정도 돈 나오고. 것도 잘 나와야. 알바랑 같이 하다 보니 많이 힘들었지.” 아 데모나 연극이나 헛, 허허허허.
우리 오마니는 내개 종종 말한다. “니 하는 일은 부잣집 딸내미들이나 하는 기라. 부모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니 앞가림은 해야 될 꺼 아니가.” 맞습니다. 오마니. 그래도. 나는요. …
어쨌든 한솔은 활동비를 애끼고 애껴 써 친구에게 빌린 돈은 다 갚았다. 하지만 노트북을 하나 사면서 다시 빚쟁이가 됐다고 한다. “당분간 안 먹고 안 쓰고. 빚부터 빨리 갚아야겠다.” 이사할 계획은? “이사는 가고 싶은데. 당분간은 그냥 살아야지.” 그가 겨울에 동파하지 않는 따뜻한 집에 살 날이 빨리 오길 기도하며. 야학의 준호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교장샘. 사무실은 집이 아닙니다.
계단이 높고 위험하지만, 괜찮아요
벌방과 내 꺼 아닌 집 사이
너의 주거 형태를 설명해봐. “아파트, 자가, 하우스 푸어” 하우스 푸어? 자가 소유 아파트와 영 안 어울리는 말. 준호는 지금 올림픽축구경기장이 보이는 증산동 17평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 누나와 함께 살았는데. 누나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떠나갔다. 서류상 자가소유이긴 하지만. 그의 집이라고 할 수 없고. 그가 그 집을 원했던 것도 아니다. 저 멀리 계신 부모님께서 아들 이름으로 집을 한 채 산 것이다. 그 재산에 대한 소유권. 처분권은 준호가 아닌 부모님께 있다.
“원래 영등포구청 근처에서 누나랑 월세방에 같이 살았는데. 겨울에 동파가 많이 됐어요.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춥고 그랬어요. 저는 그래도 견딜 만했는데 누나가 많이 힘들어했어요. 그걸 보다 못한 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셔서 아파트를 사셨어요. 집을 나한테 상속하는 형태였는데. 우리 아부지가 상속세를 안 내려고 빚을 조금 내서 샀어요.”
이자가 60만 원 가까이 나왔는데. 증간 정산을 한번 하고 지금은 40만 원 정도의 이자가 나온다. 이자 중에 절반은 준호가 갚고 있다. 물론 이 부채 역시 준호가 원했던 것은 아니고 월급이 적은 그에게 부모가 내리는 부양의무의 은혜였기에. 감히 거부할 능력이 없었다. 누나가 떠난 지금 친구와 함께 살까 생각해보았지만. 이는 준호의 권한 밖이다.
“엄마 아빠 서울 가면 잘 데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부산에서 서울로 대학을 온 준호에게 학교에 다닐 때도 집은 큰 문제였다. 신입생 때는 아버지 회사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살기도 하고. 군대에 다녀온 뒤엔 월세방에 살기도 했다. 그러다 대학 말년에 부모님과 다투고 학교 앞에 있는 친구 집에서 함께 살게 됐다. 그곳은 ‘벌방’ 이라고 불렸다. 벌방, 정확히 어떤 뜻인지 그도 알지 못한다는데. 벌집의 밀집된 느낌과 벌 받는 곳의 느낌이 동시에 드는 이름이다. 벌방은 방이 여러 개인 큰 규모의 가정집을 학생 여럿에게 무보증으로 대여하는 주거 시설로 각자의 방을 가지되 욕실 주방 거실을 공유하는 형태였다. 원래 그곳은 준호의 친구가 계약한 방이었는데, 그 친구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아 어느새 종종 얹혀살던 준호가 방세도 내고 세입자처럼 살게 되었다.
“거기가 최악이었어요. 주방도 화장실도 너무 더럽고. 화장실엔 왜 물을 안 내리고 가는지. 계속 그러니까 일부러 그러나 하는 생각도 종종 들었어요. 이상한 사람도 많이 살았어요. 내 맞은편 방 사람이, 얼굴은 못 봤는데, 막대기나 야구방망이 같은 걸로 벽을 치고 물건들 부수고, 방에 진짜 장난 아니었어요. 내가 문 잠그고 얼마나 떨었는지. 그리고 내 옆 방엔 두 사람이 같이 살았는데, 그 좁은 방에, 옴악을 크게 튼 것 같진 않은데 방음이 안 되니까 너무 시끄럽게 들려서. 벽을 톡톡 치면서 좀 조용히 해주세요. 그러고.”
지금 준호네 부모님은 준호가 사는 집을 처분할까 말까 고민 중이란다. 부동산 시세틀 살피고 계신단다.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아파트값이 떨어질까 봐 걱정이란다. 계속 이렇게 살 거야? “그냥 살아야죠, 뭐. 아니면 벌방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벌방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거기가 최악이었어요, 나 돈 없어요, 어찌할 수 없는 말들이 귀에 맴돈다. 준호가 부러웠다가 아니었다가, 아 이것은 희극이면서 비극이어라.
부모님과 화합하면서, 삽니다
다음 희비극의 주인공은 마장동 현대아파트 24평형에 살고 계신 밍구밍구 님. 어우, 어떻게 그런 곳에 살 수 있는 거죠? “옹. 먹고 살기 힘드니까 갓난쟁이 때 서울에 와서. 울 엄마가 이 일 저 일 하면서 지하, 반지하 전전하면서 살았어. 물난리도 몇 번 겪고. 그러다가 내가 고 3에서 대학교에 올라가는 그때에 청약주택에 당첨되고, 이 아파트에서 살게 됐지. 이 아파트에 온 지가 13년이 되었네.”
옴… 이것은 정밍구 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밍구 씨 어머니 씨 사연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구 입장에서 다시 얘기해봐. “아. 어머니가 제가 고둥학생 때 청약주택에 당첨되면서 이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공짜로 살고 있나요? ”옴… 나는 공짜로 살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내가 현물, 용돈을… 비정기적으로… 지원하니까 공짜로 산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기생한다고는 할 수 없고. 함께 살고 있어요.”
아 공짜로 사는 거네요? “아니야 윰. 그렇지 않아. 내가 가족들의 정서 지원을 엄청나게 하고 있어. 봐봐. 우리 어머니 인터넷쇼핑도 내가 할 수 있게 해주고, 인터넷 농장, 어장 관리도 내가 해주고 있어. 가끔 우리 엄마는 내가 1시에 들어갔는데도 어장 관리를 하고 계셔. 어머니에게 정신적 유회를 할 수 있게 엄청나게 지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죠. 주로 IT 쪽으로. 주로 엄마랑 누나에 대해 지원을 해왔는데 요즘은 아빠에 대한 정서적 지원도 하느라고 내가 좀 피곤해요. 그래서 이걸 공짜라고 볼 수 있지만, 나는 내가 여러 가지 현물, 인적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함께 살고 있다 생각합니다. 정보제공도 있고, 권익옹호! 엄마 아빠 싸울 때 무조건 엄마 편들어주기, 요런 거 제가 잘합니다. 그리고 자립생활 기술 훈련. 울 엄마 위탁모 하는 것도, 활동보조 일도 다 내가 연결한 거지. 웬만한 자립생활센터에서 하는 일을 제가 집에서 다 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엄마의 자서전도 같이 쓰기로 했어요.”
그의 나이 올해 서른셋. “일단, 결혼을 하면 나가야지. 그전에는 집에 있는 것이 나아. 내가 있어야 이 집에 평화가 유지되고, 좀 안정적으로 집안이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온 가족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도 편하고, 엄마가 해주는 밥, 엄마가 해주는 도시락. 엄마가 내 방도 청소해주고. 내가 주로 설거지를 하긴 하지만. 일단 몸이 편해요. 나는 몸이 편하고. 가족은 나를 원하고, 우린 서로 원윈하는 형태니까 크게 나올 이유가 없는 거지.” 아 그럼 정민구 씨가 결혼하면 가정의 평화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 가족은 요즘 포스트-정민구 시대를 고민하고 있어. 집안이 자립을 준비해야 할 중차대한 순간에 몰려있죠. 남은 기간에 자립 능력을 열심히 키워 드려야지. 걱정이야, 걱정이 많어.”
아,넴. 사랑받는 아들내미 느낌이 폴폴 나는 민구 님, 아, 냄,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이시는 언제 할 계획이십니까? “내년 가을이라고 우리끼리는 이야기하는데… 언젠가 할 것 같습니다.” 이사를 하고 싶다고 그냥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오늘도 적금을 하나 들었어요. 금리가 5퍼센트야. 돈 모으려고. 장사도 그래서 하는 거고. 근데 그걸로 턱없이 부족하지.” 부족한 건 어떻게 해? “나의 영원한 스폰서에게 스폰을 따와야지. 스폰서가 책임감이 아주 강해. 미안할 따름이지. 그 수가 아니면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은행에 줄 이자면 집에다
이자를 주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아 부양의무는 달콤한 유혹.
멍뭉이도 집이 있는데
조용한 삶과 맞바꾼 ㅍㅇㅈ의 안락함
민구와 갈은 방향을 바라보며 일하고 있는 야학 사무국의 사랑. 사랑은 지금까지 나왔던 이야기들에 비해 좀 특별한 집에서 살고 있다. 사랑이 노들에서 일하고 있기에 주거할 수 있어진 공간이랄까. 사랑이는 노들에선 이미 하나의 주거 거점으로 느껴지는 ㅍㅇㅈ, 장애인을 위한 무상임대-자립 생활공간 ㅍㅇㅈ에 살고 있다. ㅍㅇㅈ는 장애인을 위한 공간이지만 사랑은 비장애인으로서 그곳에서 생활한다. 장애인 주거 시설에 비장애인인 야학 교사가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우리는 쉽게 장애인을 관리하는 시설의 사회복지사나 그룹홈에서 장애인들을 케어하며 생활하는 관리자를 떠올린다. 하지만 러브조, 그녀는 ㅍㅇㅈ로 이사 가기 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갈 데가 없어” 라고.
사랑이 ㅍㅇㅈ에서 살기 시작한 건 2009년 6월부터다. 그전에는 야학에서 연극 수업을 하던 강진회 선생님네 집에서 공과금의 절반을 부담하며 그야말로 얹혀살았다. 사랑이 어무니는 사랑이가 야학에서 상근하며 생활비를 벌기 시작하자, 그녀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부모로서는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 그녀는 담담하게 “야학 상근하고 2008년 중반부터 가족지원금이 끊겼어” 라고 말했다. 그녀 스스로 돈을 벌기 전엔 엄마의 지원을 받아 강남 쪽에서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인 집에서 살았다. 노들을 비롯한 운동판에서 보기 힘든 강남 사람이었다. 한때. 그녀는. 사랑이의 어무니는 딸의 월세 지원을 중단하는 대신, 보증금 500만 원을 무상 증여한다. 사랑은 이 500만 원을 들고 노들 근처 월세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처음 봤던 집이 나한테 너무 충격이었어. 낙산 공원 앞에 있는 할머니네였는데, 화장실이 바깥에 있고. 그런 건 뭐 괜찮아. 현관문을 열면 싱크대가 있는 작은 주방이 있는데, 주방에서 밥도 하고, 씻기도 해야 하는 시스템이었어. 거길 지나 방문을 열었는데, 방문을 열자마자 퀸 침대가 나오는 거지. 그러니까 방이 퀸 침대 하나 크기인 거야. 신발 벗고 침대에 올라가서 문 닫으면 거기가 방인 거야” 상상해보면, 그 집 방에 있는 침대는 구들장 갈은 거였다.
“내가 그 집을 보고 표정관리가 안 됐어. 나가다가 그 집에 人40대 아주머니를 마주쳤는데. 그 아주머니를 보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은 거지. 활동가의 신념과 상관없이 즉각적인 반응인 거지. 내가 아무리 가난한 삶을 선택했다고 해도, 내가 신념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테지만. 그렇게까지 살긴 싫은 거야. 근데 결과적으로… 더 안 좋은 집으로 가게 됐어!”
보증금 500만 원으론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의 월세에 밀려 대학로 바로 옆 동네인 한성대 입구 쪽에서 집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피터팬의 좋은 방 구하기' 라는. 소액 세입자들을 중독시키는 인터넷까페를 주야로 점검하던 그녀는, 한성대 근처에서 하메(하우스메이트. 방이 여러 개인 집에 함께 사는 형태)를 구한다는 글이 뜨자마자 집을 보러 낙산 뒤통수를 오르기 시작했다. 방 하나를 세놓겠다는 人원을 만나, 그 사람 집을 보기 위해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드라마처럼, 우연히, 야학에서 연극반 수업을 진행하던 강진희 선생과 마주하게 된다. 그 건물 지하에 강진회 선생이 활동하는 극단의 연습실이 있었던 것. 둘은 여기에 웬일이냐?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서로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각각의 일을 계속 봤다. 사랑이는 계단을 올라 하우스메이트를 구한다는 집을 구경했다. 그녀에게 내어준다는 방은 작은 옷 방 크기였옴에도 월세 30만 원을 요구했다.
사랑은 울상이 되어 사무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드라마처럼, 불쌍한 그녀를 천사 강진회 선생이 구원한다. 진희 선생 자신이 사는 집의 방 한 칸을 사랑이에게 내어주기로 한 것이다. 진희 선생님의 집은 사랑이가 찾아 헤매던 집보다 더 높은 고지에 있었다. 그야말로 낙산꼭대기. 조사랑은 지금도 종종 그때 이야기틀 한다. 진희언니와 비누를 함께 만든 일,진희언니와 텃밭을 가꾸던 일. 진희언니와 함께 작은 파티를 연 날… 진희언니와의 생활은 위로이자 치유이자 사랑 그 자체였다고
하지만…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스타일의 집이었어. 겨울에도 화석연료를 때지 않는…”- 진희 선생님의 그레이트 빅 러브-한글로 흘러넘치는 사랑에도, 그녀는 아니 그녀의 몸은 뜨거운 물, 따뜻한 방, 편한 화장실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 무렵 조사랑은 노물에서 수련회를 가거나 남의 집에 놀러 가면 일단 욕실에 찾아들어가 따뜻한 물에 씻고 있었다. 그녀의 억눌린 욕망이 욕실에서 표출되고 있었다.
낙산에서의 생활이 1 년쯤 지났을 때, 마로니에 공원에서 탈시설 투쟁이 시작한다. 탈시설 투쟁은 이제 향유의 집으로 이름이 바뀐 베데스다요양원에서 살던 8명이 ‘시설이 아닌 곳에서 살고 싶다며 집단 퇴소해 마로니에 공원에서 노숙하며 공적 서비스를 요구하는 데모였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이 투쟁엔 노들 ’키다리아저‘ 의 물심양면 지원이 있었다. ’키다리아저씨' 는 장애인을 위한 무상임대주택을 짓고 있었는데, 탈시설 투쟁 당시 이 집은 공사를 마치고 오픈을 준비 중인 상태였다. 키다리아저씨는 석암 시설에서 탈출한 사람둘과 투쟁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오픈 전인 이 집을 오픈했다. 그곳이 바로 ㅍㅇㅈ. 러브조는 자신의 처지와 시설 탈출자들의 처지에 동질감을 확 느끼고. 탈시설 투쟁에 열심히 결합한다. 그러면서 ㅍㅇㅈ 의 따뜻한 물과 널찍한 공간과 에어컨 등등 그 쾌적함에 반한다. “투쟁 중에 ㅍㅇㅈ를 왔다갔다하면서 조금씩 살게 됐는데 너무 좋은 거야.”
탈시설 농성이 끝나고 석암 형님들은 ㅍㅇㅈ와 센터 체험홈 등으로 흩어져 자립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집 없는 러브조도 ㅍㅇㅈ생활을 시작한다. 관리자… 가 될 것이라며 러브조의 ㅍㅇㅈ행을 굉장히 반대했던 나의 우려와 달리. 사랑이는 부족한 활동보조 시간을 때워주는 비장애인 활동보조인이 되었다가. 밤낮 가리지 않고 생기는 응급 상황에 달려나가는 5분대기조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즐거운 경험들을 ㅍㅇㅈ에서 많이 했어. 아침에 형님들이랑 밥 같이 해먹고, 갈이 데모하러 나가고. 돌아오면 따뜻한 집에서 밥 먹고 노가리 까고… 나는 기옥언니랑 노가리 까던 시간이 너무 즐거웠어. 나한테는 형님들이랑 함께 숨 쉬고 생활하는 시간이 도움이 많이 됐어.” 하지만… “비상연락망이 되는 삶은 절대로 쉽지가 않아” 라며 이제는 이사하고 싶다는 러브조. ㅍㅇㅈ는 공동주거시설이다 보니 집에 사람이 없는 시간이 거의 없다. 활동보조인들이 아침부터 찾아와 동거인들의 일상이 되어 생활한다. 그래서 ㅍㅇㅈ를 나가고 싶다고 이야기하지만… 제 처지를 잘 모르는 러브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