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자료실

조회 수 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고병권의 비마이너

그의 선물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다.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으며, 읽기의집 집사이기도 하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내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대표를 처음 만난 것은 2007년이다. 동료들과 만든 잡지 창간호에 그의 인터뷰를 싣고 싶었다. 당시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한강대교를 기어가던 장애인들의 시위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터였다. 그는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문제는 날짜였다. 2001년 이동권 투쟁이 시작된 이래 그는 바쁘지 않은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때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국회통과를 앞둔 시점이라 더 바빴다. 날짜 잡기와 미루기가 반복되었다. 그가 바쁜 만큼 나도 초조했다. 인터뷰 날짜가 옮겨질 때마다 잡지 창간 일정이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터뷰하기를 잘했다. 그날 나는 단번에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그의 말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가 이번에 책 <출근길 지하철>(위즈덤하우스)을 펴냈다. 부제가 ‘닫힌 문 앞에서 외친 말들’이다. 이 부제는 내가 자주 보았던 풍경이기도 하다. 지하철플랫폼에서 그가 발언을 시작하면 서울교통공사 직원이 곧바로 방해 방송을 시작한다. 그리고 열차가 도착하면 보안관들은 장애인들의 탑승을 막은 채, “일반승객 있어요?” “열차 타실 시민분 계세요?”를 외치며 비장애인들만을 탑승시킨다. 박경석의 말은 문 너머에 닿지 않는다. 탑승을 거부당한 동료들만이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보안관들은 이들을 아예 역사 바깥으로 끌어낸다.

 

  벽이 되어버린 문 앞에서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했던 걸까. 이 책에는 당시 그가 했을 법한 말들이 담겨 있다. 왜 욕먹을 게 빤한 출근길 지하철 행동에 나섰는지, 왜 좀 더 온건한 방법으로 시민들의 지지를 구하지 않았는지, 장애인들이 요구하는 탈시설이나 권리중심일자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그가 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었음을 알 것 같다. 그에게는 간절히 전하고픈 선물이 있었다. 한 편의 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천둥과 소낙비와 바람의 시. 이 시 한편을 다 전할 수 없다면 폴 발레리가 쓴 한 줄의 시구라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이 시구는 한 장애인 청년이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처음에는 무서웠고 다음에는 끔찍했던, 그러나 끈질기게 싸워왔던 어떤 것이 이제야 끝났음을 말해준다. 무감각 말이다. 

 

  이 이야기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행글라이더 사고로 하늘에서 추락한 청년. 정신을 차려보니 하반신에 감각이 없었다고 한다. 죽은 신체를 만지는 기분. 그는 믿기지 않는 듯 칼로 허벅지를 계속 그어댔다. 그러다 두려움이 엄습하면 감각이 남아 있는 팔을 담뱃불로 지졌다.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래서 팔이 항상 부어있었다. 그런데 담뱃불에 지져진 팔이 다음에는 자포자기의 표시가 되었다. 자신은 그런 팔을 가지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라고. 그는 자기에 대해 무감각해졌고, 사람들에 대해 무감각해졌으며, 세상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그는 애인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은 채 이별을 통보했다. 그때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도 알 수 없는 사물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어떤 감각이 살아났다. 휠체어를 막아선 도로의 경계석, 그를 외면하는 버스와 택시, 어디선가 달려 나와 그를 놀리고 도망치는 아이들. 그는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장애인복지관을 다닐 때도 다리에는 여전히 감각이 없었지만, 어떤 무감각에 반응하는 예민한 감각이 생겨났다. 장애인들에 대한 세상의 무감각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천둥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장애인운동가 친구들이 죽던 날, 그들이 자신의 감각을 깨운 번개였다는 것을 뒤늦은 천둥소리로 알았다고.

 

  이후 그는 노들야학에서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차별의 무게를 짊어진 중증장애인들을 만났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들, 신변처리부터 모든 것을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 시설에 오래 갇혀 있던 사람들. 그들 한명 한명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그러자 마음에 소낙비가 내렸다. 우리 사회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처분해왔던 사람들, 아무도 듣지 않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 이들에게 다가가자 세상이 선명해졌다. ‘모든 사람은 비용, 효율, 성과보다 존엄한 존재다.’ 싸움의 어느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고 했다. 삶의 감각이 돌아온 것이다. “제가 싸움의 현장에서 느끼는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여러분에게도 선물로 안겨드리고 싶어요.”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무감각한 열차 앞에서 그는 이 선물을 들고 그렇게 외쳐댔던 것이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고병권1.jpg

 

고병권2.jpg

2024년 7월 25일, 《출근길 지하철: 닫힌 문 앞에서 외친 말들》 북토크가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진행됐다. 사진출처 비마이너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1133 2024년 가을 139호 - [장애인권교육 이야기] 유치원은 처음이라 / 편집부 장애인권교육 이야기 유치원은 처음이라      편집부           노들야학은 4월 17일, 경기 동탄에 있는 푸른초등학교 병설유치원으로 장애인권교육을 다녀왔다. ... file
1132 2024년 가을 139호 - [자립생활을 알려주마] 내 스스로가 좋아 / 이승미 자립생활을 알려주마 내 스스로가 좋아      이승미 노들야학 학생,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노동자           시설에서 많이 맞았어 자립하니까, 안 맞아서 좋아 자... file
1131 2024년 가을 139호 - 제9회 종로장애인인권영화제 / 지니 제9회 종로장애인인권영화제       지니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6월 21일, 많은 분들의 응원과 도움으로 제9회 종로장애인인권영화제가 무사히... file
1130 2024년 가을 139호 - 예술인과 함께한 들다방의 2024년 / 오하나 예술인과 함께한 들다방의 2024년         오하나 들다방 마감 &amp; 청소 담당. 동물들이 편히 머물다 갈 수 있게, 작당하고 이것저것 이상한 포스터와 선전 문... file
1129 2024년 가을 139호 - 노란들판 소통모임 / 박정숙 노란들판 소통모임       박정숙 사단법인 노란들판 활동가           해마다 420투쟁을 시작으로 노란들판법인, 노들야학, 들다방, 센터판, 노들센터, 노란들판... file
» 2024년 가을 139호 - [고병권의 비마이너] 그의 선물 / 고병권 고병권의 비마이너 그의 선물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다. 인간학을 둘러싼 전... file
1127 2024년 가을 139호 - [노들 책꽂이]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_폭발하고 엉키고 맞물리는 노들의 시간 / 린 노들 책꽂이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폭발하고 엉키고 맞물리는 노들의 시간      린 책모임을 좋아합니다. 같이 읽으면 더 재밌어요         『페미니스트, 퀴... file
1126 2024년 가을 139호 - [오 그대는 아름다운 후원인] 비건 빵으로 매달 만나는, 책빵자크르_하라경 님 인터뷰 / 영희 오 그대는 아름다운 후원인 비건 빵으로 매달 만나는, 책빵자크   하라경 님 인터뷰       인터뷰 영희, 유미 정리 영희           노들야학에는 1~2달에 한 번씩... file
1125 2024년 가을 139호 - 고마운 후원인들 고마운 후원인들       노들과 함께하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24년 7월 1일 ~ 9월 30일 기준)        CMS 후원인 (주)피알판촉 hamamura misato ...
1124 2024년 여름 138호 - 노들바람을 여는 창 / 한혜선 노들바람을 여는 창      한혜선 &lt;노들바람&gt; 편집인           노들바람을 받아 글을 읽는 시간과 노들바람 속 글의 시간에는 시차가 있습니다.      일 년에 네 ...
1123 2024년 여름 138호 - [형님 한 말씀] 후원자님께 드립니다 / 김명학 형님 한 말씀 후원자님께 드립니다      김명학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안녕하세요.   계절은 어느덧 봄을 지나 여름으로 가... file
1122 2024년 여름 138호 - [노들아 안녕] 어제 교사회의에서 가져온 빵을 먹으면서 썼습니다 / 서린 노들아 안녕 어제 교사회의에서 가져온 빵을 먹으면서 썼습니다      서린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작년 4월 노들에 왔습니다. 빵에 땅콩버터를 발라 먹었습니다. ... file
1121 2024년 여름 138호 - 사진으로 보는 권.리.중.심.노.동.자.해.복.투. 이야기 / 편집부 사진으로 보는 권.리.중.심.노.동.자.해.복.투. 이야기   오세훈 서울시장,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최중증장애인 노동자 400명 해고 철회 및 원직복직 투쟁을 위한 ... file
1120 2024년 여름 138호 - [탈시설장애인당] 정당政黨 아닌 정당正當, 장애인권리를 향한 직접 민주주의 / 박주석 탈시설장애인당 정당政黨 아닌 정당正當, 장애인권리를 향한 직접 민주주의      박주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         탈시설장애인당 깃발과 차량  ... file
1119 2024년 여름 138호 - [탈시설장애인당] 안녕하십니까. 탈시설장애인당 종로구 전략공천 후보 이수미입니다 / 이수미 탈시설장애인당 안녕하십니까. 탈시설장애인당 종로구 전략공천 후보 이수미입니다  후보자 이야기      이수미 노들야학 총학생회장, 탈시설장애인당 종로구 전... file
1118 2024년 여름 138호 - [탈시설장애인당]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로: 유세차량 쏠라티 이야기 / 허신행 탈시설장애인당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로: 유세차량 쏠라티 이야기       허신행 사단법인 노란들판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노란들판 법인... file
1117 2024년 여름 138호 - [지하철 선전전] 나의 투쟁은 일상생활이다 / 박지호 지하철 선전전 나의 투쟁은 일상생활이다      박지호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개인대의원           나는 매주 두 번 정도 혜화역 아침 출근길 침묵 선전전에 나... file
1116 2024년 여름 138호 - [3.26 장애인대회] 직면... 그리고 변화 / 송석호 3.26 장애인대회 직면... 그리고 변화      송석호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 활동가           오랜만에 노들바람의 기고 요청을 받고 글재주가 없는 제가 어떤 방향... file
1115 2024년 여름 138호 - [교단일기] 와글와글 국어 수업 이야기 / 송나현 교단일기 와글와글 국어 수업 이야기       송나현 노들야학 청솔2반 국어 수업 교사           안녕하세요. 이번 학기 청솔2반 국어 수업을 노들에서 함께하고 ... file
1114 2024년 여름 138호 - 공부보다 미정 언니_4월 검정고시 이야기 / 이예인 공부보다 미정 언니  4월 검정고시 이야기      이예인 월, 화, 수, 목, 금 센터판에서 일해요. 금요일 저녁에는 노들야학에서 합창 수업을 해요.           올해... fil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8 Next
/ 58
© k2s0o1d5e0s8i1g5n. ALL RIGHTS RESERVED.
SCROLL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