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야 같이 놀자]
“나도 우리동네 편의점에서 주먹밥, 삼각김밥, 음료수 사먹고 싶다!”
박찬욱
노들장애인야학 활동가
우리가 일상에서 이용하는 수많은 시설과 설비는 대부분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장애인은 여전히 타인의 도움 없이는 자유롭게 이동하고, 선택하고, 이용하기 어렵다. 자유롭게 행동할 자유는 헌법이 말하는 인간의 존엄과 직결된 가치다.
40년 전, 34세의 지체장애인 김순석은 “도대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어놓았습니다. 시내 어느 곳을 다녀도 그놈의 턱과 부딪혀 씨름을 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1984년 9월 19일 서울시장을 향한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의 거리와 일상은 무엇이 변하였을까?
‘편의점 계단깨기’.. ‘CU편의점 투쟁’... ‘CU’...‘우리동네 기자회견’... ‘시의회 투쟁’... 등등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나도 우리동네 편의점에서 주먹밥, 삼각김밥, 음료수 사먹고 싶다!” 기자회견은 무려 1월1일! 고장쌤이 올린 트위터로 시작됐다. 야학에서 왔다갔다 하며 항상 지나친 그 CU편의점 계단 앞에서 고장쌤이 당했던 그 차별과 거절은 권익옹호반 학생들 모두 익숙한 경험이었다. 너도나도 우리 동네에서 겪었던 일들을 성토했고 우리는 ‘CU투쟁’을 권익옹호반 1년 목표로 삼았다.
계획도 술술 나왔다. 한 달에 한 번 기자회견을 열고, 그다음 주에는 평가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역할을 나누고, 발언 순서를 정하고, 누구를 조직할지 정했다. 누구를 조직할지 정하는 것부터 웃겼는데 평소 교사가 집회 조직을 할 때는 제발 좀 미리, 시간 넉넉히 두고 조직해달라던 언니, 형들이 그날은 성토대회도 했겠다. 마음들이 들끓었는지 당장 이번주부터 조직해서 다음 주에 집회를 하자고 성화였다. (다행히 한달 텀을 두는 것으로 잘 마무리했음!)
당일이 오자 조직한 교사가 오니마니, 안오면 어쩌니 하는 걱정으로 가득했던게 무색하게 멋있게 준비한 발언들로 꽉꽉 채우고 계단에 막혀 못 들어가던 편의점을 정윤이 형은 기어서, 영애언니는 휠체어를 들어 올려 안으로 들어가 편의점 안을 말 그대로 헤집어놨다. 이후 평가 시간에 정윤이형이 사실은 조직을 시도도 안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형은 조직 대신 포체투지 담당을 선언했다. 이렇게 다시 새로운 규칙을 정했다. 꼭 조직이 아니어도, 내가 잘하거나 해보고싶은 것 하나 하기! 조직, 사회, 발언, 집회신고, 포체투지, 사진 담당 중에 각자 하나씩을 맡기로 했다.
몇 번의 기자회견을 거치는 동안 CU는 여전히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꼴랑?! 장애인 도움벨 설치하는게 다였는데 우리가 요구하는 건 벨을 누르고… 누가 도와주러 나오는게 아니라, 편의점 안에 들어가서 직접 보고 고르고 구매하는 것이었던 터라 괘씸죄만 추가되어.. 이제는 좀 여럿이 안에 들어가서 헤집자고 결의했다. 이동식 경사로를 깔고 휠체어 여러대가 한꺼번에 안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안을 기어 다니던 것도 가히 충격적이었는데 좁아터진 매대 사이를 전동휠체어와 와상휠체어로 누비며 우당탕탕 여기저기서 떨어지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들이 났다. 그리고 요구가 추가됐다. 매장안도 너무 좁다! 일단 들어갈 수 있어야하고, 들어가서도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매대 사이도 늘려라!
CU는 여전히 무응답이었고 우리안의 여러 싸움들(?) 끝에 더 빡세게 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한 달에 한 번 하던 기자회견을 일주일에 한 번 피켓팅으로 전환했다. 매주 교사 2명을 조직해 30분간 피켓팅을 하고 돌아오면, 남은 이들은 돌아온 사람들을 열렬히 맞이해 주기로 했다. “고생했다”, “오늘은 어땠냐”는 말들이 오갔다. 예상보다도 맞이가 잘 이어졌고, 다행히(?) 권익옹호반은 내년에도 CU 투쟁을 이어가기로 정했다.
누가 이기나 보자, CU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