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봄 122호 - [노들아 안녕] 상대와 내가 여기에 함께 있다는 느낌 / 최바름
[노들아 안녕]
상대와 내가 여기에 함께 있다는 느낌
최바름
작년 금요일 낮마다의 체험 수업이 생각납니다. 매번 새로운 짝꿍과 함께 새로운 장소를 돌아다녔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면 별로 한 것 없이도 기진맥진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래서인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스치는 것도 만남이라면 만남이겠지만, 우리가 만남을 원한다 말할 때에는 그 이상을 바라는 것입니다. 상대와 내가 여기에 함께 있다는 느낌, 으로써의 만남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느낌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친한 친구와 술을 잔뜩 마신다고, 가족과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한다고 느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라본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은 차라리 딱 붙어있다는 이미지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학생분들과 짝꿍이 되어 손을 잡고 돌아다닐 때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로 항상 손을 꼭 잡고 다녀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밀면 학생분들 몸이 움직이고, 학생분들이 끌면 내가 딸려가는 것은 실로 강력한 체험입니다. 나는 별거 아닌 일을 낭만화 하는 게 아닙니다. 만남의 물질적인 증거를 찾은 것에 가깝습니다.
혼자인 게 좋을 때도 있지만, 외로움을 느낄 때도 분명 있습니다. 상대와 내가 같이 있는데도 같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는 공중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곳을 떠나서 어디로 날아 도망가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노들에서는 내가 연결된다는 걸 압니다. 내 행동이 이들에게 분명 영향을 줍니다. 이들의 행동이 나에게 분명 영향을 줍니다. 서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반응한다는 것은 우리가 만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땅에 접지시킵니다. 들다방에서 잠깐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면 그때는 이제 울퉁불퉁한 땅이 느껴지는 겁니다. 멍하게 붕 떠 있는 나를 잡아 확실한 땅 혹은 그 밑으로까지 끌어 내립니다. 단단한 발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휠체어 바퀴 굴러가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그것은 만질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만남입니다. 노들에 오면 공허함을 느끼기 힘듭니다.
체험 수업 특성상 학생분들과 매주 여러 장소를 돌아다녔습니다. 광장시장, 롯데월드, 재난대피훈련장, 한강 유람선 등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체험수업반이 함께 움직이는 것은 내가 혼자 다닐 때와는 다른 경험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나에게 도달하기 전에 굴절되기 때문입니다. 보통 타인은 나를 똑바로 보아내거나, 계산하는 나의 손에만 시선을 보내거나, 시선을 보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분명한 굴절된 시선들이 느껴집니다. 어떤 때 타인은 내 옆에 아무도 없는 듯 내 얼굴만 쳐다보며 이야기하는데, 그의 말은 분명히 내 옆의 장애인 학생을 통해 굴절되어오는 것입니다.
광장시장에서 나와 짝꿍이 되었던 학생이 귤을 먹고 싶다고 하자 상인분은 저를 보며 값을 부릅니다. 내가 비싼 가격에 놀라자 상인분은 ‘본인이 산다는데 왜 당신이 난리냐’고 말합니다. 짝꿍의 흥정 시도는 짝꿍 손에 들린 카드를 거칠게 가져가는 것으로 거절됩니다. 대신에 그 상인분은 주로 나와 대화했습니다. 그러나 그 상인의 시선은 언제나 내 짝꿍을 거쳐서 나에게 온 것입니다.
아마 노들은 세상과의 진정한 만남을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위의 예처럼 장애인의 강한 존재감과 비가시화가 모순적으로 병존하는 세상에서 그 만남들은 언제나 복잡하게 되고, 어렵게 되고, 만남이라고 부르기 머쓱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그 그것이 무엇일지 알고 싶어서 여기에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