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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 핫이슈]

권리가 박탈된 시대, 선택은 사투(死鬪)뿐이었다

 

 

 

이정훈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슨 욕을 먹더라도 해야 속이 풀리는 성격 안 좋은 장애인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일 하지도 않아도 돈이 없어도 즐겁고 행복해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장애인입니다.

 

 

201699,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는 적막함이 흐르고 있었다. 양영희, 노금호, 그리고 박대희, 전동휠체어를 타고 있는 이 세 사람의 목에는 빨간색과 흰색 천이 둘러져 있었고, 그 뒤로 흰 장갑을 낀 또 다른 세 사람이 서 있었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음에도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가위질 소리가 또렷이 들릴 만큼 주위는 조용했다.

 

가위질이 멈추고 이윽고 양영희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의 머리 위로 전기 이발기가 지나가자 민머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곁에 서 있었던 한 활동가가 양영희 동지가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께 쓴 편지를 읽어나갔다. 300명이 넘는 장애인들과 활동보조인들은 조용히 눈물을 떨어뜨리거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거나, 그저 숨죽이며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양영희 동지는 편지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2006년 처음 활동보조제도화 투쟁을 시작할 무렵, 아빠는 폐암 선고를 받고 4개월 만에 돌아가셨지요. 아빠가 병원에 있을 때, 난 길바닥에 있었지요. 시청 농성장에서 투쟁하면서 더 이상 가족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어요. 남은 엄마, 남동생, 여동생에게도 부담 주기 싫었어요. 난 그때 자립하지 않으면 언젠가 시설에 가거나 평생 엄마와 동생들에게 짐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절실함 때문에 투쟁이 절박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빠에게 살아생전 효도는 못 할망정 걱정거리로 남고 싶지 않았어요. 평소 내 활동지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아빠의 불안을 덜어드리고 싶었습니다. 혼자 자립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장애가 있는 딸자식 걱정으로 평생을 보낸 아빠,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편히 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활동보조 투쟁은 절실했고, 나의 생존이자 아빠에게 드릴 수 있는 마지막 효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머리를 깎습니다. 활동보조 예산 때문에, 장애인 생존권 예산 때문에, 아니, 내가 정말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삭발을 또 해요. 내게 꿈이 있기에 머리를 깎습니다.

 

그랬다. 10년 만에 다시 장애인들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장애인들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생명과도 같은 활동보조서비스의 예산이 사실상 삭감되었기 때문이다. 10년 전 삭발을 하고 온몸에 보호대를 하고 반나절을 넘게 한강대교를 기어 만들어낸 활동보조서비스제도가 공중분해 될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시 시설에 처박혀 있어야 하고, 다른 가족 누군가의 걱정과 근심거리로 전락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지난 92일 발표된 2017년 정부 예산안에서 장애인의 생존권과 직결된 주요 예산은 그간의 물가 상승률을 생각하면 사실상 삭감되었다. 장애인들의 자립생활의 핵심인 활동지원 예산은 2016년 실제 이용자 수인 63,322명에도 못 미치는 63,000명을 내세웠다. 월평균 급여 수준도 월 109시간으로 동결해 버렸다.

 

활동지원서비스 단가도 시간당 9,000원으로 동결시켰는데, 이는 활동보조인들의 최저임금마저도 보장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주휴수당조차 받지 못하는 걸 고려하면, 한 달 임금은 법정 최저임금에도 못 미친다. 열악한 노동 조건은 활동보조인을 회피하고픈 직업으로 만들고 서비스의 질 하락을 초래하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증액된 적이 없는 중증장애인자립생활센터 지원 예산도 5% 삭감되었다. 국고에서 지원을 하는 센터의 수는 올해와 같은 62개소로 동결되었다. 노동시장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장애인들의 소득을 일정 부분 보장해 주어야 할 장애인연금은 고작 200원 인상시켜 놓고 온갖 생색은 다 냈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이렇게 장애인의 자립생활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예산들은 줄줄이 삭감한 반면, ‘탈시설-자립생활에 역행하는 장애인거주시설에 대한 운영 지원금은 늘렸다는 사실이다. 거주시설에 대한 총예산이 올해 4,370억 원에서 4,551억 원으로 181억 원 증액시켰고, 지원 시설 수도 올해보다 16곳이 늘었다.

 

역행도 이런 역행이 없다. 역행이 아니라 장애인들의 삶의 권리를 박탈해 버린 것이다. 아니 억지로 빼앗고 시궁창에 지옥에 내던져 버린 것이다. 권리가 박탈된 시대, 장애인들의 선택은 사투(死鬪)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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