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여름 108호 - [특집1_2016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국현 씨를 그리며
[특집1_2016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국현 씨를 그리며
현정민 | 노들야학에서 방송반 특활수업 교사와 더불어 장애인권교육 담당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지난 4월 23일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故육우당 13주기 추모문화제’에 참여했던 노들장애인야학 현정민 교사의 발언 전문입니다. 손으로 직접 쓰였던 원고를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안녕하세요? 노들야학 방송반 교사 현정민입니다. 노들장애인야학은 매주 목요일 밤에 특별활동 수업을 합니다. 음악, 연극, 미술, 방송 등 학생들은 각자 관심 있는 특활반 수업을 자유롭게 듣습니다. 차별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열심히 공부도 하고 예술 창작 활동도 하고 있답니다.
저는 지금은 방송부 교사지만 2년 전에는 미술반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도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새로운 학생이 들어왔습니다. 송국현 씨였습니다. 시설에서 갓 나오셨다는 국현 씨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교실의 닫힌 문을 불편해 하셨고, 교실을 여러 번 들락날락 하시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을 찾으셨습니다. 다른 학생들과 인사도 나누면서 함께 수업을 이어갔습니다.
국현 씨의 장애 정도는 혼자 그림 그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활동 보조인이 없어, 보조 교사가 보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크레파스를 손에 쥐는 것을 다른 도구들보다 편해 하셨고, 여러 색깔을 쓰는 것을 좋아 하셨으며, 그림과 글씨를 함께 배치하는 것을 즐겨 하셨습니다. 그는 웃는 모습이 참 예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맞추면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다정한 눈 맞춤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어장애로 인해 음성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의 표정과 눈빛으로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미술 수업은 참으로 평화롭고 즐거웠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장애 3급 판정을 받은 국현 씨는 활동보조인 없이 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의아했습니다. 왜 국현 씨가 3급이지? 노들에서 많은 학생들을 뵈었는데, 국현 씨처럼 혼자 이동하기도 어렵고 혼자 식사하기도 어려우신 분들은 1급을 받아 활동보조서비스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는 등급 재심사를 요청 중이라는 말을 듣고, 가까운 시일 내에 다른 노들 학생들처럼 활동보조인과 함께 수업에 참석할 국현 씨의 모습을 기대하며 헤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곤 얼마 후 국현 씨의 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불난 집 밖에서 사람 있냐고 묻던 집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대꾸 한 번 하지 못했고, 불길이 치솟는 침대 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전신에 화상을 입은 그는 여전히 3급 장애인이었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누군가는 국현 씨의 집에 불이 나고 국현 씨가 집 밖으로 도망 나오지 못한 것을 ‘사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노들야학의 학생들은 대부분 중증장애인들입니다. 학생 중 누구라도 2014년 4월 13일 그날 밤, 국현 씨와 같은 상황에서 활동보조인 없이 혼자 있었다면 국현 씨와 마찬가지로 도망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노들 학생들과 국현 씨와의 차이는 국현 씨는 3급 장애인이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1급 장애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사고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숫자 3과 1 사이에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국현 씨를 통해 숫자 3과 1 사이엔 인간다운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도 공부하고 싶고, 나도 사랑하고 싶습니다.” 국현 씨가 시설에서 나온 이유였습니다. 숫자 3에서 1이 되어야만 공부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숫자 1을 가질 수 없었고 사람답게 살 기회조차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숫자 1을 가지지 못한 수많은 국현 씨는 아슬아슬한 삶의 경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비 오는 밤, 지하 단칸방에서 턱밑까지 물이 차올라도 도망갈 수 없고, 추운 겨울 갑자기 꺼져버린 보일러에 몸이 얼어가도 도움조차 요청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삶이 숫자 3과 1 사이에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 세상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요?
숫자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숫자로 인간다운 삶을 재단할 수도 없습니다. 차별의 숫자들을 지우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합니다. 장애등급제를 없애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제도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2014년 4월 13일 그날 밤, 활동보조인만 있었다면 엊그제인 목요일 노들 특활반 수업에서 국현 씨를 만나 반갑게 인사 나누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이 좋은 봄날, 여자 친구와 데이트 때문에 수업에 나올 수 없다며 카톡을 보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장애등급제가 빼앗아 간 국현 씨와의 오늘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 함께 모여서 국현 씨를 기억해 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차별 없는 세상에서 다시 국현 씨를 부를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국현 씨, 잘 지내고 계신가요?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꼭 차별 없는 세상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그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국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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