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자료실

조회 수 36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낙산 발정(發程)

 

 

 

김진수 | 노들야학 상근 교사이고, 2016년 교사대표이기도 해요. 요새 취미는 점심시간마다 낙산에 올라 제가 살고 있는 곳을 보고 오는 거예요.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보는 일은 언제나 좋네요.

 

 

김진수_낙산발정2.jpg

김진수_낙산발정1.jpg


봄이 왔을 때였다. 낮 수업 학생들과 낙산에 갔다. 봄이 온 낙산은 흐드러졌다. 벚꽃 잎은 날리고, 개나리는 노오랗고, 진달래는 발그레 했다. 풀냄새와 꽃냄새가 진동했고 하늘은 저 끝까지 보일 듯 파랗게 투명했다. 그렇게 낙산은 봄을 드러냈고, 그런 낙산을 보며 우리는 기침을 하듯 저마다 봄을 터트렸다. ~ 봄이다! 개나리다! 벚꽃 봐! 한마디로 발정 난 봄이었고 그 봄을 따라 발정 한 낙산이었다. 낙산은 봄을 따랐고 우리는 그 낙산을 따른다. 도심에선 봄이 쉽게 드러나지 않기에 드러난 곳으로, 낙산으로, 봄을 따라.

 

수원에서 슈퍼를 하던 시절 개 한 마리를 키웠다. 우리 집 개가 발정이 난 어느 날, 슈퍼 영업을 마치고 녀석과 산책을 했다. 고물상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커다란 철문 밑 작은 틈으로, 개 주둥이가 삐죽이 나왔다.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삐져나온 주둥이의 코가 벌름 거렸다. 그 모습을 본 우리 개가 그 주둥이를 향해 나를 잡아끌었다. 그러더니 서로 주둥이를 맞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냄새를 몇 분쯤 맡았을까, 잠시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 둘은 떨어졌다.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 다음 날 슈퍼 앞에 개 한 마리가 찾아왔다. 알고 보니 그 녀석은 그때 그 고물상 개였다. 그렇게 그 개는 몇 날 며칠을 슈퍼에 찾아와서 우리 집 개를 보고 갔다. 한두 달쯤 지나자 녀석의 발걸음이 뜸해지더니, 찾아오는 간격이 한 달이 되고, 그 보다 더 길어지기도 했다. 가끔 녀석이 슈퍼에 찾아올 때, 어떤 날은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났고, 어떤 날은 고약한 음식 썩은 내가 났다. 눈에 상처를 입거나 몸이 긁혀 찾아온 적도 있었다. 고물상 아저씨의 말로는 녀석이 집을 나갔다고 했다. 고물상 개가 집을 나간 게 우리 집 개 때문인 것 같아 조금 뜨끔했지만, 전에 고물상에서 키우던 개가 죽었다는 소식을 몇 번 들었던 터라 오히려 통쾌했다. 아무튼 그렇게 녀석은 발정 난 우리 집 개를 따라 고물상 밖으로 발정(發程: 길을 떠남)했다.

 

흐드러진 낙산을 감상하고 다 같이 마음이 들떠 왁자지껄 떠들며 내려오는데, 그 모습을 본 경남 누나가 우리를 보고 한 마디 한다. “어머~ 다들 발정났나봐~” 그 말을 듣고 모두 깔깔대며 웃었다. 하긴 봄이니, 이렇게 한껏 봄을 따르는 낙산이 있으니, 발정(發程)을 안 할 수가 있나. 얼마 있으면 자연이 자신을 더욱 더 드러내 보이는 여름이다. 이번 여름, 집을 나와 길을 떠났던 고물상 개처럼, 낙산을 향해 발정했던 우리들처럼, 어딘가를 향해 누군가를 향해 발정해 보시길!




TAG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220 2016년 여름 108호 - [고병권의 비마이너] 희망 없는 인문학 [고병권의 비마이너] 희망 없는 인문학 루쉰이 다시 글을 쓴 이유에 대하여       고병권 | 오랫동안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밥 먹고 공부해왔으며, 작년 여름... file
» 2016년 여름 108호 - 낙산 발정(發程) 낙산 발정(發程)       김진수 | 노들야학 상근 교사이고, 2016년 교사대표이기도 해요. 요새 취미는 점심시간마다 낙산에 올라 제가 살고 있는 곳을 보고 오는 ... file
218 2016년 여름 108호 - [노들아 안녕] 노들에서 ‘활동하는’ 필순입니다 [노들아 안녕] 노들에서 ‘활동하는’ 필순입니다       김필순 | 자연색의 머리카락을 가졌다. 갈색 머리라 흰머리가 덜 보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노들장애... file
217 2016년 여름 108호 - [노들아 안녕] You Only Live Once! [노들아 안녕] You Only Live Once!       이승현 |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남성 자립생활주택 3개월 차 신입 코디네이터 & 활동가.     #1. 드라마 「응답... file
216 2016년 여름 108호 - [노들아 안녕] 꽃동네에서 나와 노들로 [노들아 안녕] 꽃동네에서 나와 노들로       추경진 | 노들장애인야학 학생. 현재 평원재에서 살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추경진입니다. 저는 1997년에 교... file
215 2016년 여름 108호 - 안녕하세요, 『비마이너』 기자 박정수입니다 안녕하세요, 『비마이너』 기자 박정수입니다       박정수 | 수유너머에서 오랫동안 밥 먹고 공부하며 생활해왔다. 올해 3월부터 『비마이너』의 프리랜서(!) 기... file
214 2016년 여름 108호 - 노란들판의 꿈 노란들판의 꿈       김명학 | 노들야학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2016년 5월 12일 목요일 오후 7시에 노들장애인야학에서 『노란들판의 꿈』(『그럼에도 불구...
213 2016년 여름 108호 - [교단일기] 청솔 과학반이 일구는 노란들판 [교단일기] 청솔 과학반이 일구는 노란들판       최재민 | 탈시설 운동하는 사람이다. 시설에서 생활하다 자립해서 잘사는 경남 누나를 보고 시설 따위는 없애야... file
212 2016년 여름 108호 - 노(怒)치아나! 놓치않아~!! 노(怒)치아나! 놓치않아~!!       김진수 | 노들야학 상근 교사이고, 2016년 교사대표이기도 해요. 요새 취미는 점심시간마다 낙산에 올라 제가 살고 있는 곳을 ... file
211 2016년 여름 108호 - 센터판의 독립과 이사, 그 새로운 출발점에서 센터판의 독립과 이사, 그 새로운 출발점에서       서기현 | IT업계의 비장애인들 틈바구니에서 개고생하다 장판에 들어와 굴러먹은 지 어언 15여 년. 현재는 장... file
210 2016년 여름 108호 - 수연 언니 외박기 수연 언니 외박기       김지윤 | 수연 언니 활동보조인, 청솔1반 담임, 낮 수업 강사, ‘아싸클럽’ 및 ‘내 몸 찾기’ 모임 및 ‘노들인문학세미나’ 열혈 회원, 무엇... file
209 2016년 여름 108호 - [자립생활을 알려주마] 자립생활을 향한 험난한 여정 [자립생활을 알려주마] 자립생활을 향한 험난한 여정       강미진 | 요즘은 멍 때릴 시간도 없는, 이래저래 바쁘고 몸이 지쳐있어 다크서클이 턱밑 까지 내려온 ... file
208 2016년 여름 108호 - [나는 활동보조인입니다] 익숙해지는 시간 [나는 활동보조인입니다] 익숙해지는 시간       남다영 | 노들야학에 다니고 있는 최영은 언니와 일주일에 3일을 함께 지내고 있다. 어린 활동보조인을 찾은 영... file
207 2016년 여름 108호 - 노들야학 후원마당 ‘밥상이 나르샤’를 마치고 노들야학 후원마당 ‘밥상이 나르샤’를 마치고       한혜선 오랜만에 국어수업을 맡아 학생들 얘기를 많이 듣는 게 즐겁습니다. 수업시간에 제 말은 좀 더 줄여볼... file
206 2016년 여름 108호 - 세월호 참사 2주기 ‘기억식’과 ‘진실을 향한 걸음’ 세월호 참사 2주기 ‘기억식’과 ‘진실을 향한 걸음’       박준호 | 전(前) 노들야학 상근자     2014년 4월 16일 아침, 나는 노들장애인야학의 학생 및 교사들과 ... file
205 2016년 여름 108호 - 우리 모두 내성천의 친구가 되어봅시다 우리 모두 내성천의 친구가 되어봅시다       박임당 | 수유너머N에서 주로 공부하고 있다가 작년 4월의 어느 날 노들야학의 낮 수업과 만나 바람이 났습니다. 그... file
204 2016년 여름 108호 - 도대체 부정수급이 무어란 말이냐 도대체 부정수급이 무어란 말이냐 우리를 부정수급자로 몰아가다니, 뿔이 난다!!       조은별 | 노들야학과 사랑에 빠져 수년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수업 ... file
203 2016년 여름 108호 - [오 그대는 아름다운 후원인] 탈시설 장애인의 벗, 이종각 선생님을 추억하며 [오 그대는 아름다운 후원인] 탈시설 장애인의 벗, 이종각 선생님을 추억하며       조사랑 | 노들야학 휴직교사이자 전 상근활동가. 2009년부터 평원재 담당자로... file
202 2016년 여름 108호 - 고마운 후원인들 2016년 6월 노들과 함께하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CMS 후원인   감광국, 강귀화, 강남훈, 강문형, 강미진, 강병완, 강복원, 강복현, 강성윤, 강수...
201 2016년 봄 107호 - 노들바람을 여는 창 [노들바람을 여는 창]     안녕하세요, 김유미 활동가에 이어 『노들바람』 편집인을 맡게 된 노들야학 상근교사 김도현입니다. 노들야학은 제가 2000년에 첫 사...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 54 Next
/ 54
© k2s0o1d5e0s8i1g5n. ALL RIGHTS RESERVED.
SCROLL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