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30 05:17
2014여름 101호 - 우리, 자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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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센터는 노들야학과 10년을 붙어살았다. 명륜동 빌라에서 여기 동숭동 유리빌딩 2층까지 함께 살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아마 야학은 센터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겠지? 그나저나 노들센터는 유리빌딩 2층에서 6층으로 이전하느라 더 고생했다. 차라리 다른 건물이라면 이삿짐 차를 쿨하게 부를 수 있었을 텐데, 같은 건물의 다른 층으로 하는 이사라 짐을 전부 우리가 날랐다. 그런데 글에 넣을 사진을 고르다 보니 어째 이 사람들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낑낑거리면서도 웃고, 헥헥대면서도 웃고있다. 그래, 아마도 생애 처음 ‘내 방’을 갖게 된 설렘 때문이겠지. 우리도 이제 그토록 원하던 이용자, 활동보조인 전용 상담실도 생겼고, 프로그램 일정을 잡아놓고, 공간을 선점하지 못 해 그 어려운 ‘일정잡기’를 다시 해야 했던 지난날을 회상할 전용 프로그램실이 생긴 덕분이겠지. 2층에서 공간사용은 눈치게임 같은 거였다. 숫자를 먼저 외치지 못하거나, 동시에 외치면 진다.
이사를 준비하고, 이사를 하면서 우리는 서로에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사를 준비하는 자세부터 이삿짐을 꾸리는 것,짐을 나르고 재배치하는 것을 함께 하면서 각 활동가들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이때는 2010년 내가 노들센터에 오고 난 후 가장 분위기가 좋았던 몇 개월로 기억한다. 아마 서로에 대해 알게 되면서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도면, 전기공사, 술 상무 등 진정한 멀티맨 정구, 땀을 한 드럼은 쏟은 윤사마, 이사를 하면서 입이 트인 선우언니(짐 정리가 빨리 안돼서 갑갑한 나머지), 이삿짐센터 직원 빙의한 재환, 그 옆에 조수 광호, 걸레를 손에서 내려놓지 않은 지연언니, 짐 날랐다가, 청소했다가, 돈 계산했다가 홍길동 민희언니,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시키는 것만 하겠다던 조현수, 꼼꼼 또 꼼꼼 하나라도 놓칠세라 신경을 곤두세운 소장님, 지방 교육 갔다 몸살 나서 와보지도 못한 라나, 그리고 사진 찍는다고 쿡쿡거리고 이 인간들 구경하느라고 재밌었던 나까지 손발 맞추느라고 다들 고생 깨나 하면서 우리는 친해졌다. ㅎㅎㅎ
2층에서 짐을 몽땅 빼왔지만, 6층을 채우기엔 부족했다. 야학과 함께 쓰던 물건들을 공간이 분리되면서 전부 마련해야 했다. 상담실에 놓을 테이블,프로그램실에 필요한 책상과 의자, 빔 프로젝트와
스크린, 음향기기는 기본이었다. 물을 마시려니 컵이 필요했고, 밥을 먹으려니 수저가 필요했다. 밥먹고 화장실을 가니 휴지가 없었다. 노들은 우리의 일상이었기 때문에 참 많은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린, 미안하지만 우리의 부담을 나눠 짊어지어 줄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 분들은 노들과 가까운 곳에 계셨고, 우리가 손을 내밀었을 때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셨으며, 우리가 그 모습을 감지하자마자 우리보다 더 급속도로 6층 공간에 빠져들고, 우리보다 더 자주 6층 공간을 드나들기 시작하셨다. 그러더니 어느 날은 에어컨을 가져오시고, 어느 날은 빔 프로젝트를, 또 어느 날은 세면대와 변기를 가져오셨다! 이렇게 빨라도 되나 싶을 정도로 6층은 바뀌어갔다. 그분들은 노들이 2층에 들어올 때 아낌없이 지원해주신 우림건설의 이상엽 님과 이번 공간마련을 하면서 이상엽님이 소개해주신 김종길 님이다. 정말 귀하디귀한 인연이다.
이렇게 동숭동 유리빌딩 6층은 노들센터의 ‘첫’ 자립공간이 되었다. 자립 후에도 여전히 노들야학 6층으로 소개되지만, 언젠가는 온전히 노들센터로 소개되겠지? 될까? 될 거야~ 되자! 노들센터가 ‘자립’을하기까지 글로 다 못 할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어디자립이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겨우겨우 자립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을. 아직도 수두룩하게 넘어야 할 산들이 남았겠지만,
어찌됐든 우리, 자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