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여름 101호 - [노들은 사랑을 싣고] 김두영 야학 동문을 만나다
• 가물가물한 초기 노들야학 시절 •
명학 먼저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영 감사하긴요. 제가 감사하죠.
명학 두영이 야학에 있었을 때가 몇 년도였죠?
두영 1993년도에 처음 노들야학이 개교할 때…개교 멤버였죠. 그래서 개교할 때 처음 교사대표를
맡았고.
명학 그때 개교 멤버가 누구였죠?
두영 심귀황. 그리고… 이름들이 가물가물해요.얼굴만 생각나고 이름들이…
명학 그때는 반이 고검반(고등 검정고시반)이랑중검반(중등 검정고시반)?
두영 그렇죠? 거의 대검(대입 자격 검정고시)은없었고, 고검반 중검반. 고검반도 거의 없었죠. 중검
반이 대부분이어서.
명학 그때 장소가 정립회관에?
두영 정립회관에 탁구장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시작했구요. 그 다음에 처음에는 우리가 교재 같은
것도 별로 없어서 우리가 각자 대학 가서 후배들한테 중고등학교 때 썼던 책들 후원받아서
했구요.
명학 교과서?
두영 교과서 같은 거, 참고서나… 우리도 돈을 걷었죠? 필요한 교과서나 초등학교 교과서는 구하
기힘들어서 돈으로 샀고… 그때 힘들었던 게 정립회관까지 올라가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명학 산비탈.
두영 자동차가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구의역에서 내려서 마을버스 타고 초입까지 들어갔다
가한참 올라가야 되잖아요. 거기 올라가면서 지나가는차도 올라타고, 안 걸리면 끝까지 올라
가구요.
명학 특히 겨울과 여름이 많이 힘들었잖아요.
두영 아 그렇죠. 그렇죠.
명학 그때는 주로 재정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두영 별도의 후원금이라는 건 없었어요. 전부 교사들이 각출해서 사용했구요. 또 학생분들이 또
주섬주섬 많이 주셨어요. 저녁에 식사라도 하면 또 학생분들이 많이 사주셨고.
명학 아 생각난다. 학생은 대부분 돈을 벌고, 정립전자에 다니고. 반면 교사들은 대학생들이었지.
두영 그렇죠. 교사들은 돈을 안 벌고 그때는 교사들 100%가 학생들이었어요. 대학생 아닌 사람이
없었죠. 그러다 한 3, 4개월 있다가 안신연 교사가 지금 박경석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왔죠.
• 초기 노들야학의 뜨거운 감자 •
명학 노들야학이 시작할 때 그 당시 쟁점 같은 것은 무엇이 있었는지요?
두영 지금 같은 경우는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에 대한 재교육이 쟁점이 아니라 그 외에 많은
쟁점들이 있잖아요? 평생교육 측면에서 여러 가지 쟁점들이 있고, 또 장애인권이라든지 운동
에 대한 관심도 많이 생겼었지만 출발 자체는 학교교육을 받지못한 장애인들이 워낙 많을 때
였으니까… 그분들한테 학교교육을 시키고자 하고, 학력을 취득하게 하고자 하는 욕심이 많았
구요. 그 가운데서도 그러한 것들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를 이슈화하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계
속 있었죠. 그런 부분들도 같이 논의를 해나가면서 또 공부도 하고. 근데 규모가 지금처럼 크
지가 않을 때니까 검정고시 준비하는 게 많은 부분을 차지했죠.
명학 그래서 검정고시 보면서 성과도 많이 있었나요?
두영 그때도 많이 있었어요.
• 노들야학에 오게 된 사람들 •
명학 그럼 옛날에는 학생 모집이나 교사 모집 같은 건 어떻게 했나요? 노들바람도 없었을 텐데.
두영 학생 모집은 지역신문이나 그런 걸로 했구요. 교사 모집은 거의 인맥이었어요. 저 같은 경우
에도 단국대학교 특수교육과에 있는 후배들을 데려왔고, 안신연 선생님은 명지대 사회복지
과. 또 심귀황 선생님은 한양대에서 데려왔구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채워왔죠. 교사들은 늘
부족했구요. 오랫동안 그렇게 남아있지 못 하니까. 다 자기 삶이 바쁜 사람들이잖아요. 저도
아르바이트 했으니까.
명학 주로 어떤 아르바이트예요?
두영 저는 장애아동 과외하는 아르바이트를 했었구요. 저도 대학 등록금을 내야 되는 그런 상황이
었으니까. 그때는 돈이 없어서 형들한테 술 많이 얻어먹었어요.
명학 다들 그래요. 왜냐면 주로 돈을 벌기 때문에돈을 버는 학생들이니까 학생이 교사분들한테 술
사주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했었죠.
두영 그 잔디밭에 앉아가지고 그때는 뭐 학생이라는 생각보다는 인생 선배들이니까 거의 뭐… 제
상담도 많이 했었죠. 교사 입장에서 얘기한 게 아니라 거의 형, 누나들이었으니까 제 문제도
얘기하고 또 형들의 여러가지 일상생활들이며, 생각을 들으면서 또 서로의 고민들도 많이 얘
기하면서 서로 많이 배우고.
명학 저도 그때 생각해보면 노들야학이 창립하면서 치열하게 얘기 많이 하고, 서로서로 교류가 많
았을 때가 그땐 거 같아요. 지금도 똑같지만.
• 학생한테 배우는 교사, 교사 밥 사주는 학생 •
두영 지금도 똑같을 거구요. 저희들 같은 경우에는 다들 모이면 얘기들 많이 하지만 많은 걸 배웠
어요. 저도 사실은 대학생활 내내 데모도 하고 운동하고 그러면서 참 공부 안 했는데, 야학 다
니면서 공부많이 한 거 같아요. 형들한테 내가 미안해서. (야학에)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왔던
거 같은데 오면 에너지도 쌓이고 또 재밌었어요.
명학 그때는 우리가 야학 내에서 교사, 학생인데,지금도 똑같지만 수직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예
요. 교사가 학생한테도 줄 수 있고 그 반대로 학생이 교사한테. 근데 교사들은 주로 학생보다
나이가 어린 상황인데도 서로가 줄 수 있다는 건 좋았던 거 같아요.
두영 인생 자체가 배움이잖아요. 배움이라는 게누가 누구한테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거고
배우는 즐거움이 있어야 되는 건데, 지금 학교 교육이 문제가 이런 거죠. 교사에 의해서 배움
이 전달되기만 하는 거예요. 교사도 배워야 되는 거고 나이가 많다고 해도 또 나이 어린사람
한테 배울 게 있는 거구요.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한테 또 배울 수 있는거고, 근데 제가 좀
아쉬운 게 뭐냐면 저희가 어릴때잖아요. 특히 저 같은 경우에는 철이 없어가지고 제가 철이
있었으면 더 잘했을 텐데… 이런 후회들은 많이 남고, 제가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서
17년간 해왔는데 교사생활하면서 많이 느껴요. 아,(그 때) 잘 가르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것들을 잘못할 때였죠. 사실 전문가도 아니었고, 가르치는 것들에 대해서 배우는 것도 아니
었고. 후회가 많아요. 잘할 수 있었는데. 철이 없어서.
• 1993년 개교멤버가 보는 2014 노들야학 •
명학 지금의 야학을 두영이 밖에서 봤을 때 어떻게 보이나요?
두영 지금까지 성장해오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구요. 지금 말했듯이 검정고시와 함께 장애인으로
서 잃어버린 어떤 권리들을 찾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투쟁하는 모습들도 반드시 필요하다 생
각해요. 그런데 또 야학이 스스로 발전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생각해요.
명학 노들야학도 주로 검정고시를 봐야하기 때문에 교과서 위주로 많이 했는데, 요즘은 꼭 교과서
아니라도 야학 교사들이 교사마다 수업 방식들이 다르거든요. 꼭 교과서로 수업한다는 것보
다는 다르게 교과서 외적인 책으로 수업하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두영 검정고시에 초점을 맞추는 건 절대 아니구요.검정고시를 하더라도 성인들 대상으로 하기 때
문에 예를 들면 어떤 한글을 깨치는 문해교육을 하더라도 성인들한테 맞는 교재를 만들어야
하고 또 검정고시 이외에 다양한 평생교육 프로그램들이 있잖아요? 그런 프로그램들을 그런
것들이 뭐 문해교육이든 문화 예술교육이든 인문교양교육이든 시민참여교육이든 그런 것들
이 골고루 이루어져야 해요. 그런 것들이 배움에 있어서 편식하면 안 되니까 그런 것들이 전
부다 야학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교육이죠.
• 에피소드 •
명학 자 그럼 야학에 있으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같은 거 말해주세요.
두영 제가 있을 때 학생 중에 한 분이 공장에서 사고가 있었어요.
명학 정립전자에서?
두영 예예 그렇죠. 저희들하고 술 먹고… 그 다음부터 형님들하고 술 먹는 것들을 굉장히 자제하려
고 노력했지만… 나름대로는 정말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저는 사실 야학을 하면서
제가 그나마 대학에서 공부를 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야학이 아니었으면 제가 공부를 하지
않았을 거예요. 많은 것들을 배우고 그래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싶어요.
명학 그때 진짜 진지한 얘기 많이 했었어요. 지금같으면 10시 딱 되면 끝나요.
두영 우리는 집에 안 갈 생각을 하고 했었죠.
명학 지금은 그때가 많이 그리워요.
두영 지난 세월이니까 더 이뻐 보이는 거죠. 뭐가좋아요. 지금이 더 좋구만.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