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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자립생활운동가 황정용을 보내며

 

 

노들 편집위원회

 

 

석암투쟁 1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마치고, 713일 석암비대위 황정용 님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1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마로니에공원에서 고인을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어쩌다 한번이었지만 얼굴에 매서움을 풀고 웃어주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이 귀해서 종종 떠오를 것입니다. 14일 서울대병원에서 열린 고 황정용 동지 추모식에서 발표된 발언들을 정리해 싣습니다.

 

 

정리 김유미 / 녹취 조정민 / 도움 박임당

 

 

 

 

 

* 탈시설자립생활운동가 황정용동지 약력

 

 

- 19591112, 출생

- 성인이 된 후 도장 기술을 배워 가족들을 부양

- 2007130, 석암베데스다요양원 입소

- 200964, 탈시설자립생활정책을 요구하며 62일간 노숙농성

- 201710, 임대주택으로 입주

- 석암재단생활인인권쟁취를위한비상대책위원회 활동

- 다큐멘터리 시설장애인의 역습(2009, 박종필감독)출연

-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함께 설립

- 탈시설 당사자로서 탈시설 멘토로 활동하는 등 각종 현장에 활발히 참여

 

 황정용.png

 

 

지난 4월에 정용형이 병원에 입원을 했었어요. 그때도 지금처럼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에서 응급실에 가서 일주일 정도 입원을 했다가 퇴원을 했었는데요. 그때 센터 식구들이랑 같이 집에 놀러갔어요. 정용형이 식사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니까 과일이랑 황도캔을 사들고 가서 술을 많이 마시더라도 챙겨 먹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알겠다고 했는데 사흘만에 이렇게 돌아가셨어요.

 

황정용 동지는 19591112일에 강원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도장 파는 일을 배워서 실제로 도장을 파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장애가 심해져서 2007130일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입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설은 인권침해와 시설비리의 온상인 석암재단 산하 시설이었고 2008년부터 석암재단 산하에 살던 장애인들은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대책위원회를 꾸려서 시설비리와 인권침해를 척결하는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964일 탈시설 정책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을 때 시설에서 무작정 짐을 싸들고 나와서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숙을 한 8명 중의 1명이 정용형입니다. 62일간의 노숙농성으로 탈시설 권리가 구체적인 정책과 예산 반영으로 이루어졌고 서울시뿐만 아니라 경기, 대구, 광주, 전주, 인천 등 지역 탈시설 정책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정용형은 그 이후에 서울시 자립생활주택에서 생활하다가 나중에는 진수형이랑 임대주택에서 사셨고 201710월에는 드디어 자신만의 집을 얻어서 강서구 가양5단지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동안 체험홈에서 거주하면서 정용형은 석암재단 산하 거주시설이 김포에 있는데 탈시설한 장애인들이 뜻을 모아서 8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시설에 있는 모든 장애인들이 나올 때까지 열심히 활동하자고 결의를 하면서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황정용이며 옆에 계신 동림이고 같이 활동했던 진수입니다.

 

정용이형 활동명이 큰손이었거든요. ‘왜 큰손으로 정했냐?’ 물어봤을 때 탈시설 계의 큰손이 되고 싶다. 그래서 시설에서 사는 많은 장애인들을 큰손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너무나 그립고 앞으로 먼길을 가서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만, 우리 같이 활동했던 큰손을 잘 보내줬으면 좋겠습니다.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 조은별

 

 

 

석암 베데스다 비리가 터져서 같이 투쟁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양천구청 앞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노숙농성을 하면서 엄청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다 시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할 때 황정용이가 동상에 걸렸습니다. 당시에 몰랐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는 1년에 서너번 씩 손에 껍질이 벗겨집니다. 그 친구가 추위를 엄청 타요. 한여름에도 잠바를 입고 다닙니다. 그런 친구가 너무 안타깝지만 갔습니다. 이 친구는 너무 내성적이고 남에게 싫은 소리 절대 안하고 법 없이도 살 친구입니다. 그런 친구가 나한테 하는 소리가 형님 내가 나가서 투쟁을 하면 내 한 몸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용아 우리는 한 몸 아니냐. 일당 100이라고 하지만 니가 함께 힘 보태주면 우리 탈시설의 역사가 빨리 오지않을까. 같이 나갈래?” 가만히 생각하더니 형님 그럼 나갑시다했어요. 그때 옆에 있던 용남이에게 같이 나갈래? 하니까 나가야죠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7, 8시 센터에서 차가 와서 아침밥도 안 먹고 갔습니다. 전국을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그 친구는 내가 가자고 하면 아무말 없이 같이 갔습니다. 그 친구가 지금 생각하면 너무 착했습니다. 비록 술을 좋아했지만 남에게 싫은 소리 안 하고 폐 안 끼치고. 누굴 만나도 자기보다 나이가 어려도 절대 반말 하지 않고. 특히 김용남이하고 정용이가 동갑친구입니다. 둘이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재밌습니다. “황정용씨 우리 한잔만 먹고 갑시다.” “그래요 김용남씨.” 둘이 서로 존대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저한테는 반말로 하면서...

비록 14년동안 같이 투쟁을 했지만 아직까지 우리가 할 일이 많습니다. 정용이가 돌아가실 때 옆에 누구가가 있었더라면 생명이 연장되지 않았을까. 우리가 할 일은 활동보조 24시간, 탈시설, 등급제 폐지 더 열심히 해서 우리 후배들에게 이런 불행한 일이 안 벌어지게 노력할 수 있겠습니까.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김진수

 

 

 

정용동지를 만나면 저를 누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도 동생같이 생각하면서 만날 때마다 술 많이 먹지 말고 밥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한 달 전에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정용동지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그런데 모습이 너무 왜소해져서 놀랐습니다. 손을 잡으면서 지금도 술을 먹느냐, 이렇게 살이 빠져 어떻게 하냐, 같이 투쟁해서 이 세상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깐 웃으면서 ~~” 술을 안 먹는다는 말은 안해서, 내가 될 수 있으면 제발 좀 줄여라 하고 앞에 가는 사람 뒤에다 대고 얘기했어요. 그러고 왠지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가다가 돌아봤는데 누구를 기다리는지 길에 서 있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살았을 때는 맨날 술 먹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누나여서 오늘은 대구에서 술을 준비해왔습니다. 이제 갔으니까 맛나게 드시고 잘 가시라고 드리겠습니다.

근데 그 모진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 술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았겠는가. 그 젊은 패기들을 다 팽개치고 삶을 단념하고 살아야하는 것을 술이 아니면 어찌 살았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울분과 내 자신의 장애를 그리고 이 세상을 원망하면서 술이라도 먹고 잠들고 싶었다는 걸 가고 나서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누이라고 부르는데 그날은 누님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 손을 잡으면서 왜 한번 밥을 같이 못 먹었는가, 자기가 싫다고 해도 내가 끝까지 붙잡고 밥 먹자고 왜 못했는지 모든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정말 24시간 활동보조를 받았다면 급하게 119라도 불러서 병원이라도 갈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아직 우리랑 같이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이 병문안을 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활동보조 시간을 쪼개서 살다보니 활동보조인이 돌아가고 난 뒤에 그렇게 혼자서 외롭게 피 토하면서 이 세상을 가면서 얼마나 아프며, 마음이 어떻겠느냐는 생각을 하면... 그리고 내가 나이가 더 많은데 왜 자기가 먼저 가야하는지를... 정말 내세가 있어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멋진 남성으로 이 생에서 못했던 모든 일을 다 하면서 멋지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 박명애

 

 

 

먼저 죄송하다는 인사 드리겠습니다. 제가 2007년도에 베데스다 요양원에 형님을 모셔다 드린 장본인입니다. 끝까지 형님을 보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제 맘속으로 짐이 됐다고 생각했고, 지금 와서 같이 활동했던 동지분들께 죄송할 뿐입니다.

베데스다 요양원에서 전화를 몇 번 받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형한테 찾아가서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형의 뜻을 모르고 저는 형에게 비참한 말만 남겼습니다. 이렇게 많은 동지분들에게 인정받으면서 했던 분을 저는 동생이란 이유로 형을 마음속으로 많이 비판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서서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희 형님을 이렇게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많은 동지분들한테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저도 오늘에서야 형님이 무슨 뜻을 가지고 행하셨는지 많은 이해를 했습니다. 앞으로 형님에 대한 제 마음도 달리 먹겠습니다. 말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가족 황주용

 

 

 

사람은 만나기를 잘 만나야 한다. 어디서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가 굉장히 중요하고 그리고 어디에 자기에 있는가가 오늘 이 자리를 통해서 더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황정용 동지는 2008년 석암재단 그 당시 베데스다 요양원 시설비리 인권침해 투쟁 현장에서 만났습니다.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가 황정용. 탈시설이란 말과 자립생활이라는 말조차도 알려지지 않았던 그 시대에 자립생활,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자 그리고 시설에서 나가자는 말을 듣고 만났습니다. 이조차도 누군가가 꼬셔서 하게 되었습니다. 김정하 동지가 저한테 시설비리 인권침해, 탈시설 투쟁하는 석암이 있는데 같이 싸우자고 안 그랬으면 저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그거 개고생할 건데 그걸 왜 싸워, 에바다 10년 투쟁했고 시설 인권침해, 비리 그렇게 싸워도 변하지 않는 세상인데 또 그 개고생해가지고 만들어놓으면 뭐가 좋을까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정용형이랑 개인적으론 잘 몰라요.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삶을 살며 고통스러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너무 술을 많이 먹어서, 좀 술 먹지마 그랬거든요. 근데 제가 형인 줄 알았는데 지가 형이래요. 그래서 처음에 만나서 민증을 깠어요. 1년차가 나더라고요. 그 뒤로 쌩으로 말을 까시더라고요. 한 달 전에도 경석아! 똑바로해!” 난 맨날 똑바로 하는데, 나는 형이나 술 먹지 마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저도 에바다 투쟁을 10년 했습니다. 에바다는 바뀌었고 법인이 교체되었습니다. 석암재단 비리도 투쟁했습니다. 재단 이사장이 바뀌었고 이름도 향유의 집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거기 사람들이 지원주택을 통해서 나오려고 합니다. 베데스다라고 불렸던 지금의 향유의 집은 반드시 폐쇄돼야 합니다. 그 힘을 만든 것은 바로 마로니에 공원의 이들이었고 우리 함께 싸운 동지들이 아니었나합니다. 그 투쟁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밑거름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런 꿈조차 꾸지 못하고 그냥 주어진 시설 속에서 잘 운영하면 되는, 그 안에 살았어야 할 사람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여전히 시설은 시퍼런 권력으로 살아있고 우리를 보호한다고 하면서 복지를 이야기하고, 그 속에서 나오려고 하는 사람들을 탈시설을 이야기하는 여러분을 또 다시 반인권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나오려고 하는 사람들조차 왜 선택을 강요하냐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시설이 싫어요. 싫어요. 감옥 같아요.”라고 이야기하는 정용형의 이 이야기를, 그리고 시설을 감옥이라고 이야기했다고 명예훼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세력들을 우리는 또 마주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동지를 또 이렇게 보내고 정용형한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조금 더 같이 있다가 장애인거주시설폐쇄법 하나 만들고 갔으면 좋았겠다는 동생의 야속한, 정말 화가 나는 바람이 있습니다. 200964일날 나왔고 20196410주년을 했고 202964일에 장애인거주시설폐쇄법 하나 만들고 우리가 꿈꾸지 못했던 그때 괜히 만나가지고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탈시설 자립생활이라는 이런 언어를 아직 법적으로도 제대로 집어넣지도 못하고 있는 서러움 속에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통해서 같이 그 마음 잘 나누고 정용형을 잘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노들장애인야학 고장 박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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