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가을 120호 - [교단일기] '선'과 '속도' / 충근
[교단일기]
‘선’과 ‘속도’
충근 | 디자인하는 것을 좋아하는 디자이너.
사회 속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의문을 품고,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이를 시각화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일상에서 만나는 선들은 대부분 직선에 가깝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책상도, 책상 위의 컴퓨터 화면도, 창문도, 창문 밖의 건물들도 모두 곧다. 내가 종이 위에 그려온 선들도 그랬다. 초·중·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그린 도형들은 완전한 대칭을 이루는 형태이거나, 완전무결한 규칙이 있는 그래프들이었다. 요즘은 컴퓨터를 이용해 선을 그리는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간단한 클릭 몇 번으로 완벽한 동그라미와 세모가 그려지고 깔끔한 표가 만들어진다.
진(Zine)수업에서 만난 학생들의 선은 달랐다. 진(Zine)수업은 현재 노들야학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진행하는 낮수업이다. 나는 지난 해 2학기부터 1년 가까이 선생님으로 수업을 함께 해오고 있다. 학생들은 각자가 표현하고 싶은 대상이나 관심사를 자유롭게 그림이나 글로 표현해 진(Zine)을 만든다. 집, 사람, 자동차, 꽃과 같은 구체적인 대상이나 점, 선과 같은 추상적인 형태들은 종이 위에 색연필로 그려지기도 하고 천 위에 펜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림들은 낱장의 종이일 때도 있고 책의 형태로 엮이기도 하며, 동그란 뱃지가 되기도 한다.
진수업 학생들이 그린 선이나 형태는 흔히 말하는 동그란, 세모난, 네모난 등의 단어들로 묘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언젠가 수업 중에 한 학생분이 그린 그림을 말로 표현하려다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그림을 자세히 보니 동그라미 모양도 아니었고 세모도, 네모도 아니었다. 분명히 어떤 형태를 지니고 있긴 했지만 기존에 내가 알고 있는 단어로는 묘사하기가 어려웠다. 굳이 말해야한다면 ‘두루구불웅둥퉁훙’한 모양이랄까. 결국은 그림을 가리키며 어떤 모양이 아니라 그냥 ‘이 모양’이라고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틀에 맞춰 바라보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었다.
진수업에 함께한 지 얼마 안됐을 무렵,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겼다. 몇몇 학생들은 매주 똑같은 대상을 그리거나, 똑같은 방식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이 모습을 보고 “계속 같은 그림을 그리다보면 지루하지 않을까? 다른 시도를 해보면 더 재밌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수업을 오래 진행하신 선생님의 말로는 몇 학기째 같은 형태의 그림을 그리는 학생분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몇 주, 몇 달을 함께 수업하다보니 다른 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매번 똑같다고 생각했던 그림도 무언가 조금씩 달랐다. 펜을 쓰는지 붓을 쓰는지에 따라서도 표현하는 방법이 달랐고 종이의 크기나 재질에 따라서도 다른 그림을 그렸다. 지속적으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작은 변화들이었다. 나중에는 기존에 그렸던 그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학생도 있었다. 앞서 말한 몇 해째 같은 그림을 그려왔다는 학생은 지난 학기부터 새로운 그림 도구를 이용해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눈에 띄는 속도가 아닐 수는 있겠지만 학생분들은 분명 각자의 속도에 맞게 나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학생들의 이러한 모습들에서 나를 발견한다. 나는 글자와 이미지를 다루며 포스터나 책 등의 시각물을 만들어내는 디자이너이다. 그 중 내 관심사는 이미지보다는 글자, 특히 한글에 있다. 그래서 내가 디자인한 대부분의 작업들을 보면 이미지가 없이 한글이 전면에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글자만 있는 밋밋한 작업일 수도 있겠다. 가끔은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화려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한글을 가지고 노는 게 더 재밌다. 이미지가 정말 필요하다면, 억지로 만들려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만들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최근에는 이미지 작업의 필요성을 느끼고 글자 이외에 다른 요소들을 활용하는 방법들을 시도하고 있다. 아마 멋진 이미지를 만들어내려면 몇 년이 더 걸릴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나의 ‘속도’에 맞게 나다운 ‘선’을 그려나가면 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