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가을 120호 - 살아 숨 쉬는 동그라미의 춤판 낮수업 소풍 이야기 / 소영
살아 숨 쉬는 동그라미의 춤판
낮수업 소풍 이야기
소영 | 쿨레칸 프로듀서로 5년째 일하고 있다.
인생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이뤄져 있다.
춤알못인 내가 우연히 엠마누엘 사누의 댄스 워크숍에 참여한 걸 계기로 점차 이 춤에 매료되었다.
춤추는 걸 좋아했지만, 인생에서 춤을 계속 추며 살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느덧 ‘춤’이란 굵직한 챕터가 내 인생에 자리 잡았다.
현재 춤웹진 몿진(Mottzine)에서 <소영의 아프리카 만딩고 춤 안내서>를 연재하고 있다. (@cava_comca)
소풍’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신난다. 최근 소풍이라는 시간을 가진 적이 언제였던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봄날의 아지랑이마냥 몽롱해졌다. 5월 어느 화요일 오후, 여느 때처럼 춤수업이 끝나고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다음 주에는 넓은 공원으로 소풍을 갈 것이라 유미가 말했다. 날씨 좋은 봄날, 낮수업 선생님들과 참여자들 모두 모여 도시락도 먹고, 다 같이 야외에서 춤도 추며 놀자고 했다. 순간, 기분 좋은 흥분감이 우리들을 감쌌다. 수업이 끝나도 발을 떼지 못하고 평소에 가고 싶던 곳 이야기로 수다를 떨다가 설렘을 안고 헤어졌다.
그리고 일주일 후, 기다리던 소풍날이 왔다. 장소는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다행히 햇볕이 쨍하고, 봄바람이 솔솔 불었다. 점심을 다 먹고 다들 쉬는 동안, 몇몇은 어디서 춤추면 돌부리에 넘어지지 않고 땡볕에 힘겹지 않게 춤출 수 있을까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위치해 넓은 그늘이 있는 곳, 그리고 공원 중심부와 떨어져 크게 소음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만한 안전한 장소를 골랐다.
연주자 보섭과 정인이 먼저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젬베와 봉고 연주를 천천히 시작했다. 리듬의 힘은 신비로웠다. 단조로운 공기에 잔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리듬의 크고 작은 물결에 너도 나도 흔들흔들 끄덕끄덕 박자를 맞춰본다. 박자에 몸을 맡기며 하늘 위를 쳐다보니, 머리 위 나무들도 구름들도 함께 춤추는 듯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공원을 산책하던 이들도 우리의 음악과 춤에 잠시 길을 멈췄다.
연주자들을 둘러싸고, 크고 동그란 원이 만들어졌다. 동그라미는 곧 ‘파티’가 시작된다는 신호다. 누군가 이미 원 안에 자리 잡고 들썩들썩 어깨와 다리를 흥겹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온다. 벌써부터 재밌다. 이 ‘파티’의 규칙은 간단하다. ‘춤추고 싶은 사람은 원 안으로 들어와 원하는 만큼 춤춘다. 다른 사람이 원 안에 들어오면 그와 함께 춤추고, 젬베의 신호에 맞춰 춤을 마친다.’ 춤추다 중간에 멈춰도 괜찮고, 리듬과 달리 움직여도 괜찮다. 춤을 멈춘다면 같이 춤추던 이도 함께 멈출 것이고, 갑자기 느리게 움직인다면 연주하던 이들도 함께 느린 리듬을 연주할 것이다. 음악과 춤의 대화가 끊이지 않는 동그라미 안에서 매번 ‘수업’인지 ‘파티’인지 헷갈릴 만큼 즐겁고도 자유로운 에너지들이 오고 갔다.
춤 수업 3년째를 맞은 지금, 참여자들은 선생님 엠마누엘이나 권금이 없어도 자신의 춤을 아주 ‘잘’ 춘다. 오히려 춤 수업에 처음 온 선생님들이 더 쑥스러워하기도 했다. 엠마누엘은 춤추기 부끄러워하는 이들을 만나면, ‘우리 모두는 매일 춤추고 있다‘고 항상 말했다. 춤은 저기 멀리 있는 어떤 TV 스타의 현란한 동작이 아니라, 내 몸 아주 가까이 있는 움직임이라는 걸 강조했다. 그리고 당신이 ‘춤출 수 있다’는 말은 당신이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움직임으로 우리는 서로 소통할 수 있으며, 이 몸의 표현은 국적과 문화, 언어를 뛰어 넘어 ‘느낌’으로 통한다.
그럼 춤을 ‘잘’ 춘다는 건 뭘까? 나는 이 날 동그라미 속에서 펼쳐지는 춤들을 촬영하다, 나도 모르게 그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춤추는 이들의 움직임으로 전해지는 감정은 단순하지만 강렬했다. 그 솔직한 느낌을 따라 내 몸도 함께 꿈틀대며, 각기 다른 사람들이 뿜어내는 리듬들에 빠져 들었다. 리듬이 점점 빨라지며 춤추는 이들의 움직임도 함께 공명하는 그 순간, 시간이 아주 짧게 멈춘 것만 같았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산책을 멈추고, 이 동그라미의 춤들을 바라보며 박수쳤던 이들 역시 그랬을 것이다. 현란하고 고난이도의 기술을 잘 수행해낸 무용수를 보고 감동하듯, 나는 이날 아주 큰 박수를 쳤다. 특히 얼굴을 마주한 채, 불꽃 튀듯 에너지를 주고받는 이들의 춤을 보면서.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춤’이 곧 자기 자신인 듯 춤추는 이들을 보며 나도 이렇게 춤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순간 자신을 느끼며 추는 춤을 보며, 나 또한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존재감’ 가득한 개성 넘치는 움직임들은 외형적으로 아름다운 동작들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의 감각을 전해 주었다.
하지만 이 감동의 순간들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껏 흥이 오른 춤판이었는데, 누군가 공원 경비실로 소음 민원을 넣었다며 공원관리자 분이 연주를 제지시켰다. 곁에서 지켜보던 이들도 아쉬운 마음에 관리자를 만류했지만, ‘한 명의 민원이라도 무시할 수 없다’는 규칙 아래 ‘공연을 하려면 미리 허가를 받아야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우리의 춤판은 마무리되고 말았다. 작은 북 두 개와 스무 명의 박수소리가 언제부터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되었을까.
나는 이 존재감 강한 아름다운 춤들을, 이 살아 숨 쉬는 동그라미의 춤판을 계속 보고 싶다. 거리에서, 공원에서, 광장에서, 무대에서. 누구든 춤추고, 누구든 말할 수 있는 이 동그라미 안에서 함께 춤추며,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나의 춤이 ‘우리가 함께 있다’는 공동체의 존재감으로 계속 키워져 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