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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활동지원사입니다]

운명을 믿으시나요? 

 

 

 

 문가빈

박경석 고장샘 활동지원사

 

 

 

 

  운명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언제나 운명처럼 다가오는 일들과 뒤돌아보지 않고 뛰어드는 나. 내 삶은 어쩌면 언제나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기말고사를 3일 남겨두고 새벽부터 고속버스에 몸을 실은 12월 14일. 알바까지 째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갔다. 서울의 공기는 낯설고 추웠다. 막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사회자가 다음 발언자를 소개했다. 뭐라고 소개했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그러다 그냥 어느 순간 무대를 바라봤고, 어떤 사람이 바닥에 누워있었다. 이름은 잘 모르지만 아무튼 낯익은 얼굴이었다. 

 

  지금도 발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데, 한 가지 문구가 내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민주주의!’ 나는 집회가 끝나고도 그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도대체 잘 모르겠어서 한참을 국회의사당 주변만 맴돌았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것보다도 나는 그것이 더 궁금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 대신 지하철을 타러 내려갔다. 그런데 거기 그 사람이 또 있었다. 흰머리 장애인 할아버지. 놀랍고 반가워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곳은 T4 철폐 농성장이라고 했다. 유인물을 몇 장 나눠줬고, 서명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서명을 하고 모금을 좀 하려는데 그 할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부산에서 왔으면 돈도 없을 것 같은데.” 실제로 돈이 없어서 주머니 속 구겨진 칠천 원을 모금함에 넣는 참이긴 했지만 짜증이 났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눈치도 없이 계속 말했다. “집에 돌아갈 돈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또 넣지 말라고는 절대 안 했다. 기분이 나빠서 마지막 남은 책 한 권도 사고 싸인도 받았다. 떠나는 길에 빈말처럼 말했다. “다음에는 전장연 집회에도 연대하러 올게요.” 진짜로 갈 생각은 별로 없었다. 

 

  한데 예의상 뱉은 그 빈말이 족쇄가 되었나 보다. 승강장에서 끌려나가는 사람들의 영상이 매일같이 눈에 걸렸다. 그 모습들이 꿈속까지 쫓아올 때쯤에는 정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1월 3일 한강진에서 열리는 윤석열 체포 집회도 갈 겸 하루 일찍 서울로 떠났다. 조금 저렴한 심야버스를 타고 새벽 네 시,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시간을 죽이다 지하철 첫차를 타고 안국역에 도착했을 때는 여섯 시였다. 선전전까지 두 시간을 더 차가운 승강장에서 떨며 기다렸다. 

 

  선전전이 끝나고 난 뒤에는 동덕여대로 행진을 했고 그 다음에는 또 시청 앞에서 뭐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 가야 하는 줄 알고 다 따라갔다. 우동민 열사 추모제였다. 누군지도 모를 그 사람을 추모하면서 기웃거리다 보니, 어쩌다 또 그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거기서 나한테 말 거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명함을 줬다. 자기는 박경석이라고 했다. 얼떨결에 나는 또 약속을 했다. “내일도 올게요.” 

 

  그래서 또 갔다. 혜화역 4번 출구 주변 이상한 냄새가 나는 모텔에서 잠을 자고 아침부터 승강장으로 향했다. 안국역 다이인 행동에 비해서는 참여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인지 더 춥고 외로웠다. 이따금 지나치는 무관심한 눈빛, 스크린도어가 열릴 때마다 보이는 출근길의 시민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상하고 유별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승강장은 십오 분만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깨끗이 비워졌다. 마침내 나의 몸이 개찰구 밖으로 던져졌을 때, 꿈을 꾸는 것처럼 얼떨떨했다. 진짜 내가 여기에 왔구나 싶어서. 영상으로만 보던 그곳에서 내가 같이 끌려나가고 있구나 싶어서. 

 

  박경석 씨는 온다고 해 놓고 안 왔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떠나려는데 누가 말을 걸었다. “혹시 부산에서 오신 분이세요?” 처음에는 내 사투리가 많이 심해서 외지인 티가 나는 줄 알았다. 알고보니 박경석 씨의 부탁을 받고 날 찾은 사람이었다. 그는 일정이 있어서 아침 선전전을 못 갔으니 커피라도 한 잔 마시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래서 또 만났다. 만날 때마다 커피 한잔 사 줄 테니 연락하라고 했다. 나는 사실 커피는 마시지도 않는데. 

 

  그 무렵즈음에 나는 많은 새로운 일을 겪었다. 지하철 승강장에서는 강제퇴거를 당하고, 한강진에서는 시위 도중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연행되는 걸 지켜보았다. 계엄령을 내린 윤석열은 따뜻한 집에 누워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건지 화가 나고 슬펐다. 내가 전혀 몰랐던 이 세상이 너무 미워서 꼰벤뚜알 수도원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친구도,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차가운 서울 바닥이었다. 그때 불현듯 커피 한잔 사 주겠다는 그 말이 떠올랐다. 아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커피가 밥이 되고, 밥이 술이 되고. 휠체어를 한 번 밀어 보겠느냐고, 활동지원사 교육을 들어 보겠느냐고, 나는 또 알겠다고. 점차 서울에 올라오는 빈도는 늘어나고, 부산에 돌아가면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떠나고, 훌쩍 떠나가고 싶고. 그 새로운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이, 문장들이, 꿈들이 자꾸만 떠오르고, 나를 뒤돌아보게 만들고……. 

 

  이대로 모든 평범한 일상을 견딜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떠났다. 내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것을 향해서. 학교와, 친구와, 동료와, 가족과, 새로 계약한 자취방과, 사랑하던 바다를 모두 그 세상에 두고. 그렇게 박경석 씨의 활동지원사가 되었다. 

 

  그 무렵에 자주 듣던 음악이 있다. 좋아하던 선배가 알려준 음악. <The Adults Are Talking> 거기 이런 가사가 있다. 

 

Don't go there 

'cause you'll never return

(그곳에 가지 마 

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엄마도 그렇게 말했다. 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저 가사가 오히려 내 등을 떠미는 것처럼 들렸는데, 어떻게 떠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You are saying all the words I'm dreaming 

(너는 내가 꿈꾸는 모든 말을 하고 있어)

 

  내가 꿈꾸던 모든 말이 있는 그곳으로. 늘 새로운 세상을 찾아 헤매던 내게 이제는 새로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말하는 그곳으로. 잘못된 세상에 순응하지 말고 자꾸만 균열을 내자고, 소리치자고, 모든 것은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어쩌면 이제 처음과 같은 떨림은 많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꽤 일상적인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지겨워 눈 감고 싶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뒤에서 휠체어를 밀며 마주치는 모든 새로운 것들을 나는 언제나 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열심히 이어붙여, 나의 새로운 세상을 계속해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내가 여기서 배운 모든 것들을 잊지 않기를. 그리고 계속 꿈을 꾸기를. 단단하게, 투쟁이다.

 

문가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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