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자료실

조회 수 1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고병권의 비마이너

그의 선물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다.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으며, 읽기의집 집사이기도 하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내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대표를 처음 만난 것은 2007년이다. 동료들과 만든 잡지 창간호에 그의 인터뷰를 싣고 싶었다. 당시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한강대교를 기어가던 장애인들의 시위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터였다. 그는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문제는 날짜였다. 2001년 이동권 투쟁이 시작된 이래 그는 바쁘지 않은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때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국회통과를 앞둔 시점이라 더 바빴다. 날짜 잡기와 미루기가 반복되었다. 그가 바쁜 만큼 나도 초조했다. 인터뷰 날짜가 옮겨질 때마다 잡지 창간 일정이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터뷰하기를 잘했다. 그날 나는 단번에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그의 말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가 이번에 책 <출근길 지하철>(위즈덤하우스)을 펴냈다. 부제가 ‘닫힌 문 앞에서 외친 말들’이다. 이 부제는 내가 자주 보았던 풍경이기도 하다. 지하철플랫폼에서 그가 발언을 시작하면 서울교통공사 직원이 곧바로 방해 방송을 시작한다. 그리고 열차가 도착하면 보안관들은 장애인들의 탑승을 막은 채, “일반승객 있어요?” “열차 타실 시민분 계세요?”를 외치며 비장애인들만을 탑승시킨다. 박경석의 말은 문 너머에 닿지 않는다. 탑승을 거부당한 동료들만이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보안관들은 이들을 아예 역사 바깥으로 끌어낸다.

 

  벽이 되어버린 문 앞에서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했던 걸까. 이 책에는 당시 그가 했을 법한 말들이 담겨 있다. 왜 욕먹을 게 빤한 출근길 지하철 행동에 나섰는지, 왜 좀 더 온건한 방법으로 시민들의 지지를 구하지 않았는지, 장애인들이 요구하는 탈시설이나 권리중심일자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그가 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었음을 알 것 같다. 그에게는 간절히 전하고픈 선물이 있었다. 한 편의 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천둥과 소낙비와 바람의 시. 이 시 한편을 다 전할 수 없다면 폴 발레리가 쓴 한 줄의 시구라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이 시구는 한 장애인 청년이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처음에는 무서웠고 다음에는 끔찍했던, 그러나 끈질기게 싸워왔던 어떤 것이 이제야 끝났음을 말해준다. 무감각 말이다. 

 

  이 이야기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행글라이더 사고로 하늘에서 추락한 청년. 정신을 차려보니 하반신에 감각이 없었다고 한다. 죽은 신체를 만지는 기분. 그는 믿기지 않는 듯 칼로 허벅지를 계속 그어댔다. 그러다 두려움이 엄습하면 감각이 남아 있는 팔을 담뱃불로 지졌다.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래서 팔이 항상 부어있었다. 그런데 담뱃불에 지져진 팔이 다음에는 자포자기의 표시가 되었다. 자신은 그런 팔을 가지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라고. 그는 자기에 대해 무감각해졌고, 사람들에 대해 무감각해졌으며, 세상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그는 애인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은 채 이별을 통보했다. 그때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도 알 수 없는 사물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어떤 감각이 살아났다. 휠체어를 막아선 도로의 경계석, 그를 외면하는 버스와 택시, 어디선가 달려 나와 그를 놀리고 도망치는 아이들. 그는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장애인복지관을 다닐 때도 다리에는 여전히 감각이 없었지만, 어떤 무감각에 반응하는 예민한 감각이 생겨났다. 장애인들에 대한 세상의 무감각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천둥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장애인운동가 친구들이 죽던 날, 그들이 자신의 감각을 깨운 번개였다는 것을 뒤늦은 천둥소리로 알았다고.

 

  이후 그는 노들야학에서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차별의 무게를 짊어진 중증장애인들을 만났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들, 신변처리부터 모든 것을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 시설에 오래 갇혀 있던 사람들. 그들 한명 한명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그러자 마음에 소낙비가 내렸다. 우리 사회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처분해왔던 사람들, 아무도 듣지 않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 이들에게 다가가자 세상이 선명해졌다. ‘모든 사람은 비용, 효율, 성과보다 존엄한 존재다.’ 싸움의 어느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고 했다. 삶의 감각이 돌아온 것이다. “제가 싸움의 현장에서 느끼는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여러분에게도 선물로 안겨드리고 싶어요.”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무감각한 열차 앞에서 그는 이 선물을 들고 그렇게 외쳐댔던 것이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고병권1.jpg

 

고병권2.jpg

2024년 7월 25일, 《출근길 지하철: 닫힌 문 앞에서 외친 말들》 북토크가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진행됐다. 사진출처 비마이너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1156 2024년 겨울 140호 - [나는 활동지원사입니다] 함께 나누어 나갑니다 - 두 사람이 보낸 2024 여름가을의 시간 / 이제연 나는 활동지원사입니다 함께 나누어 나갑니다   두 사람이 보낸 2024 여름가을의 시간      이제연 늦가을을 좋아합니다           대학 재학 중 친한 친구를 따... file
1155 2024년 겨울 140호 - [오 그대는 아름다운 후원인] 연대하는 밥상을 지지하는 모두의 부엌 _이름 님, 모자 님 인터뷰 / 영희 오 그대는 아름다운 후원인 연대하는 밥상을 지지하는 모두의 부엌   ‘모두의부엌’ 이름 님, 모자 님 인터뷰      도움 하나 인터뷰, 정리 영희           어느 ... file
1154 2024년 겨울 140호 - 고마운 후원인들 고마운 후원인들       노들과 함께하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24년 10월 1일 ~ 12월 31일 기준)        CMS 후원인 (주)피알판촉 hamamura misat...
1153 2024년 가을 139호 - 노들바람을 여는 창 노들바람을 여는 창      한혜선 &lt;노들바람&gt; 편집인           이번 가을호는 4월부터 6월까지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노들바람이 계간지라 시차가 존재한다고는 ...
1152 2024년 가을 139호 - [형님 한 말씀] 후원자님께 드립니다 / 김명학 형님 한 말씀 후원자님께 드립니다      김명학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올여름도 많이 더웠던 여름날이었습니다. 여... file
1151 2024년 가을 139호 - 나의 첫 노들 모꼬지 / 김다현 나의 첫 노들 모꼬지       김다현 노들에 서성이고 있어요. 누군가를 잃고 살아가고 견디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싶어요.         “동네 나와서 첫 글자 ... file
1150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지옥행 420급행열차를 타라 / 서한영교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지옥행 420급행열차를 타라       서한영교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lt;1981년 4월 20일&gt; 조선일보, 1981년 4월 21일   ... file
1149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해복투 노동자 이수미입니다 / 이수미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해복투 노동자 이수미입니다       이수미 노들야학 총학생회장. 오세훈 서울시장,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최중증장애인 노동자 ... file
1148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검고, 희고, 붉은 머리카락 / 황시연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검고, 희고, 붉은 머리카락       황시연 청솔1A반 수학 교사입니다. 뒷머리를 바짝 깎아 올린 상고 머리를 하고 다닙니다. ... file
1147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그날 혜화역 / 김은호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그날 혜화역       김은호 2024-1학기 노들야학 교사 인준에 도전하였으나 장렬히 실패하고만 사람. 2학기를 맞아 재도전해보... file
1146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서울교통공사, 서울혜화경찰서, 장애인의 이동권을 막다 / 유진우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서울교통공사, 서울혜화경찰서 장애인의 이동권을 막다       유진우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2021년 12월 ... file
1145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부당한 연행, 그리고 ‘감방’에서 보낸 이틀 / 서기현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부당한 연행, 그리고 ‘감방’에서 보낸 이틀       서기현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 소장             2024년 4월 20일, 나는 장... file
1144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날 투쟁 참여하면서 느낀 점 / 남대일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날 투쟁 참여하면서 느낀 점       남대일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 동료지원팀 활동가           올해... file
1143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제22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박종필’상 관객상 수상 / 편집부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제22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박종필’상 관객상 수상        편집부             제22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가 4월18일부... file
1142 2024년 가을 139호 - [420 특집] 나의 420_노들야학 ‘자립의 시’ 수업 학생 글 / 엄세현, 김민정 2024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특집 나의 420  노들야학 ‘자립의 시’ 수업 학생 글         투쟁의 스위치 -엄세현 (불수레반)     올해 두 번째 참가했다   항상... file
1141 2024년 가을 139호 - 두고봐라 오세훈아, 결국엔 탈시설이 이긴다_서울시 탈시설지원조례 폐지에 부쳐 / 민푸름 두고봐라 오세훈아, 결국엔 탈시설이 이긴다  서울시 탈시설지원조례 폐지에 부쳐      민푸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6월 18일, ‘서울시의회 보... file
1140 2024년 가을 139호 - 포체투지에 참여하는 이유 / 재범 포체투지에 참여하는 이유      재범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 권익옹호팀 활동가           지난 6월25일(화) 2년 전 박원순 시장 때 우리의 투쟁으로 만들어 낸 탈... file
1139 2024년 가을 139호 - 와글와글 5.18 광주 역사 기행 / 박유리 와글와글 5.18 광주 역사 기행       기행 참여 김홍기, 박유리, 박찬욱, 이수경, 조상지, 허종양 인터뷰 참여 김홍기, 박유리, 박찬욱, 이수경, 조상지, 이하늘 ... file
1138 2024년 가을 139호 - 광주 이야기 / 김홍기 광주 이야기       김홍기 노들야학 불수레반 학생.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노동자           오늘은 광주에 가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해서 준비를 빨리빨... file
1137 2024년 가을 139호 - 사진으로 보는 2024 제25회 서울퀴어퍼레이드 / 편집부 사진으로 보는 2024 제25회 서울퀴어퍼레이드       편집부           2024년 6월 1일, 서울 남대문로 및 우정국로 일대에서 열린 제25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노... fil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9 Next
/ 59
© k2s0o1d5e0s8i1g5n. ALL RIGHTS RESERVED.
SCROLL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