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여름 101호 - 420장애인차별철폐 투쟁의 날을 맞이하여 송국현 학생을 기억하며
420장애인차별철폐 투쟁의 날을 맞이하여
송국현 학생을 기억하며 노들야학 준호
마주했던 사람들의 죽음에 괴롭고 괴로운 마음을 이끌고 투쟁을 이어온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 만큼 열심히 하지 못했지만 송국현을 기억하는 한 사람으로서 글을 쓰게 되었다. 송국현 동지. 야학의 학생이기도 했고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이어온 그가 420을 며칠 앞두지 않은 4월 17일 사망했다.
420투쟁 실무기획단은 4월 16일까지만 해도 4월 고속버스 타기 투쟁을 위해 4월19일 대시민선전과 행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행진을 축제처럼 많은 시민과 함께하기 위해 차별과 관련된 스티커 붙이기와 부스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송국현 동지의 죽음으로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은 장애등급제 희생자 故송국현 동지 추모결의대회로 진행하였고 반포고속버스터미널에서 보건복지부장관의 집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투쟁으로 진행되었다.
내가 송국현 동지를 인식한 네 번의 순간은 이러하다. 3월 어느 날, 휠체어로 미어터지는 야학 복도 끝 화장실 앞에서 손잡이를 잡고 느릿느릿 걸어오는 그를 처음 본 것이다. 일단 야학 학생인지 잘 모르겠고 그의 행동으로 봐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지만 어느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인지 학생인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가 입은 옷들이나 덥수룩한 수염에서 ‘시설’에 있었다는 느낌이 묘하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것이 내가 본 송국현 동지에 대한 첫 기억이다. 4월 들어서는 야학에서 급식을 먹을 때 불안하게 식판에만 눈길을 두는 그가 안쓰러워 자리며 의자며 챙겨주었던 기억이 있고 그의 이동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가들의 배치표를 보고 그가 탈시설 장애인이며 아직 일상에서 도움 없이 생활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4월 16일 밤부터 새벽에 이르는 시간이었다. 노들음악대가 수원역에서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문화제에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갔다. 손을 소독하고 위생가운을 입고 병실에 들어가 면회를 할 수 있었다. 전신에 화상을 입고 눈만 내놓은 채 거의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예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좁은 병원벤치와 계단을 전전하며 생각은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다가 또 최악의 상황을 그리곤 했다. 그가 준혁이형처럼 또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지 않을까… 준혁이형만 생각하면 그 착하고 순하고 동글동글한 눈과 얼굴이 생각난다.
달력을 보지 않고는 그 이후의 일정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그 다음날 새벽 떠나버렸고 우리는 촛불을 들고 그의 장례식장을 지키며 보건복지부 장관의 사과와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해 회의를 하고 현장수업을 조직하고 1인 시위을 하였으며 행진과 집회와 몇번의 1박2일 투쟁을 치렀다. 송국현 동지와 함께 활동하던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들의 눈물 섞인 발언들이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다잡게 했고 장애인들의 행진을 막아서며 복지부 장관의 집을 철통 경비하는 경찰과 뒹굴고 나가떨어지고 잡혀가며 시간은 바람같이 가버렸고 장례는 광화문 광장에서 26일 만에 치러졌다. 나는 420투쟁이 끝나자마자 급성편도염으로 입원하여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나는 무기력하고 분노할 줄 모르는 것일까, 집회 집회 집회 집회로 이어지는 한 주의 일정표를 보면 기가 막혀 속으로 욕을 하다가도 집회 집회 집회 한 번 안 나오는 학생들과 이야기하다가도 너무나 무관심한 모습에 그들에게 화가 치밀기도 한다. 광화문 농성장에 있는 영정사진을 보며 속으로 울기도 하다가 송국현 동지의 일은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만 기억을 짜내려고 안달하는 것 같다.
엊그저께 같이 술을 마신 내 친구 상용이는 야학 학생이다. 나랑 동갑이다. 나는 그가 잘 살 수 있기를 빈다. 상용이는 술을 먹은 다음날 나한테 “준호야 고맙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나는 뭐가 고마운지 잘 모르겠다고 그에게 얘길 했지만 그가 나에게 말한 맥락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고맙지 않았으면 좋겠다. 야학 학생들과 평등하게 함께 투쟁했으면 좋겠다. 송국현 동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송국현 학생”이라는 표현을 썼다. 나와 인권교육을 함께 나가는 김동림형도 야학의 학생이다. 혼자 집회를 잘 나가기보다 그들과 함께 나갔으면 좋겠다.
함께 나가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투쟁만 함께하는 게 아니라 많은 것을 함께 해야 한다. 때로는 함께하는 게 치사하고 많이 힘들 때도 있다.
며칠 전 전화번호부에 있던 송국현 학생의 전화 번호를 지웠다. 투쟁이 있기 전 보내는 청솔1반 그룹 전화번호부 명단에 여태 그의 이름이 있었다. 송국현의 죽음에 대해 추모하고 투쟁을 결의하자는 문자메시지 발송명단에도 항상 송국현의 이름이 있었다. 이제까지는 항상 그를 제외하고 보냈는데 며칠 전 그의 전화번호를 지웠다. 그를 추모하고 이제는 보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화번호부를 정리할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에게 그를 보낸 투쟁의 기억보다 그를 본 기억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 보지 않았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형과 잘만 하면 친구도 될 수 있었을 텐데. 학교 인권교육을 나가면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한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동네에서 함께 살자, 친구로 살자” 이렇게 말하는데 정작 그와는 친구가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