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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비마이너]

2024년 12월 3일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다.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으며, 읽기의집 집사이기도 하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12월 3일. 유엔이 정한 ‘세계장애인의 날’이었다. 장애인들이 출근길 지하철행동을 시작한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전장연은 오후에 국회 앞에서 장애인 권리 입법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밤에 국회의사당역에서 노숙을 할 예정이었다. 내가 속한 노들야학 사람들 상당수가 이 투쟁에 결합하기로 했다. 그런데 전날 자정 무렵 야학에서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12월 3일의 일정을 조정해야겠다고, 이런 ‘힘든 마음’으로는 투쟁에 결합하는 게 무리라고.

 

  12월 3일. 우리는 상중이었다. 서울대병원 영안실에는 야학 학생인 지민이 누워있었다. 발달장애인이었던 지민은 야학에서 붙박이처럼 지냈다. 사람들이 ‘노들에 살어리랏다상’을 수여했을 정도다. 지민은 서울시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해고노동자’이기도 했다. 수줍음이 많아 뒤로 숨던 지민은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참여하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노들음악대의 일원으로 여기저기 공연도 다녔다. 하지만 코로나로 휴교 상태가 길어졌을 때 술을 찾았고 이후 좀처럼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서울시의 사업폐지로 해고노동자까지 되었다.

 

  12월 3일. 저녁에 지민의 장례식이 열렸다. 지민의 친구였던 성숙은 “지민아 왜 갔어, 왜 갔어” 소리 지르며 울었고, 지민과 오랜 시간을 보낸 교사 승천은 “내가 형 좋아하는 걸 알았는데, 탁구도 좋아하고, 배드민턴도 좋아하고, 내가 형 좋아하는 걸 잘 알았는데...”하며 훌쩍였다. 음악대의 화경은 형과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불렀다. “장막을 걷어라. ...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12월 3일. 동료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는 국회 앞 농성장으로 가지 않고 집으로 왔다. 너무 큰 피로가 덮쳤다. 책상에 앉아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한 청년의 영정 사진이 있었다. 이주청년 강태완씨였다. 기사를 검색하고 몇 줄 읽지도 못했는데 눈물이 차올랐다. 김제의 특장차 생산업체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는 시험 중이던 기계장비들 사이에 끼어 숨졌다. 갈비뼈가 모두 부러졌고 양쪽 폐가 찢겨나갔다. 

 

  2024년 12월 3일. 태완은 아직도 원광대병원 영안실에 누워있었다.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그는 1998년에 한국에 왔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인 엄마를 따라온 미등록 이주아동이었다. 엄마는 학교에 가는 아이를 잡고 신신당부했다. 어떤 문제도 일으키면 안 된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고. 아이는 친구에게 맞아도 항의를 못했고, 창문 앞에 누군가 폐지를 모아 불을 붙였을 때도 신고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는 불안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 강제 퇴거를 막아주던 학생 신분이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20년 그는 자진출국하면 재입국기회를 주겠다는 법무부 방침에 따라 ‘낯선 나라’ 몽골에 갔다. 그러고는 한국의 대학에 유학생 신분으로 들어왔고 취업까지 성공해 ‘친숙한 나라’ 한국에서 제한된 시민으로나마 살 길을 찾았다. 그리고 8개월 만에 사고를 당했다. 전화를 받고 달려온 엄마는 “경찰에 잡힐까봐” 병원 주변만 맴돌며 울었다고 한다. 몽골대사관의 중재로 경찰이 체포하지 않겠다고 확인해 준 뒤에야 아들 시신 곁에서 통곡했다.

 

  2024년 12월 3일. 늦은 밤 지민과 태완을 떠올리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내가 들어와 외쳤다. “계엄이 선포됐어!” 나라를 거대한 수용소로 만들고 시민들의 시민권을 제한하는 포고령이 발표되었다. 장애인들이 낮에 기어오르던 국회의사당 계단에는 무장한 계엄군이 들이닥쳤고, 밤샘 농성장이 차려진 국회의사당역의 지상에는 분노한 시민들이 밀려들었다.

 

  2024년 12월 7일. 국회의사당에서 본 촛불은 2016년의 광화문 촛불과 달랐다. 8년 전에는 흑과 백, 어둠과 빛이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진실도 하나였고 염원도 하나였다. 2024년의 촛불은 형형색색이다. 포고령은 모노톤이었지만 케이팝은 컬러풀했다. 우리가 살고 싶은 행복의 나라가 그런 것처럼. 

 

  이 촛불에 기대를 걸어도 좋을까. 그러고 싶고 또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곳이 환상적 콘서트장이 아니라 행복의 나라가 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밤에 계엄군이 짓밟고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는 자리가, 낮에 시민권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앉았던 자리라는 것, 낮에도 밤에도, 어제도 오늘도 수용소의 포로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16년 광화문역, 2024년 국회의사당역에 장애인농성장이 차려져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숨죽이며 26년을 계엄 속에서 살아온 이주아동 태완은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다.

 

 

  (*강태완님의 장례는 회사측이 유족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한 달 만인 12월 13일에 치르기로 했답니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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