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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만원 노역일기                                                                    노들야학 경석



투쟁하면 할수록 쌓이는…… 벌금. 그것이 쌓이고 쌓여, 또 다시 지명수배가 떨어진 박
경석 교장샘. 수배자로 살던 어느 날, 갑자기 감방에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는데… 때는 바야흐로 벌금 254억원을 내지 않은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란 작자가 하루 5억원씩 탕감 받는 ‘황제노역’을 살던 시절이었다. 아래는 허재호 씨가 5일 동안 25억원을 까는 사이, 5일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며 벌금 200만원 중 25만원을 까고 나온 우리 고장샘의 이야기다.     <한겨레21>에도 실렸다. 




             3월 29일 토요일      


 


박경석 노들야학교장

오후 3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벌금 200만원 때문에 자진 노역한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나는 2012년 10월30일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집에서 홀로 잠을 자다 새벽에 발생한 화재로 질식사(10월26일)한 중증 장애여성 활동가 김주영의 노제를 지내면서 도로의 차선을 넘었다는 이유로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고 수배 상태에 있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검찰에 출두했다. 검찰은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 1급인 나를 곧바로 서울구치소로 이동시키지 못했다. 나는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 받기 위해 리프트 차량의 이용을 요구했고 검찰은 준비하지 못했다며 곤란해했다.


검찰청 직원들은 서울시와 경기도 의왕시의 ‘장애인콜택시’에 전화했다. 모두 “이용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서울시 장애인콜택시는 서울구치소가 있는 의왕시까지 운행하지 않았고, 의왕시는 며칠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다고 했다. 검찰청 직원은 “이따위 정책이 어디 있어”라며 화를 냈다. 그는 “가까운 인접 도시에 갈 때조차 이용하지 못한다면 무슨 장애인콜택시냐”며 소리 높였다. 검찰 직원조차 어이없어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허탈했다.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이토록 무관심한 사회를 향해 우리는 2001년부터 13년이나 외치고 있었구나.



검찰은 그로부터 4시간이 지나서야 나를 구치소로 옮길 수 있었다. 나를 마중하기 위해 따라온 활동가들을 뒤로하고 구치소의 두꺼운 담을 지나 홀로 철문 앞에 섰다.
혼자 가야 하는 길은 참 외로웠다. 그러한 길이 어찌 구치소에 들어가는 길뿐이겠는가.



구치소에 들어가자마자 신원을 확인했다. 머리가 길기 때문에 묶고 있던 머리끈을 포함해 모든 물건을 맡겼다. 벌거벗고 신체검사를 한 뒤 죄수복으로 갈아입었다. 비누와 칫솔, 수건 두 장이 담긴 비닐 봉지를 받았다. 그리고 다른 비장애인과 달리 나는 오줌통 하나를 더 받았다.



토요일 밤 내가 간 곳은 독방이었다. 누워서 팔을 양쪽으로 뻗으면 완전히 펼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발을 뻗고 누우면 발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칸막이 없는 좌변기가 있었다.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좁아터진 공간의 좌변기는 절대 이용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양쪽 벽면은 스펀지처럼 푹신한 것으로 덮여 있었다. 처음 수감된 사람의 경우 정신적 충격 때문에 자살할 위험이 있어 이런 방에 유치한다고 구치소 관계자는 말했다. 나는 그곳에서 2박3일을 송장처럼 누워만 있었다.



모포는 까는 것과 덮는 것 하나씩 주어졌다. 나는 척수장애라는 사실과 장애 상태를 교도관에게 다시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욕창 때문에 수술도 몇 차례 한 상황이라 누워 있을 때 바닥에 모포 하나만 까는 것은 위험하니 침대나 매트리스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말단 교도관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세 겹으로 겹쳐 깐 모포 위에 휠체어와 분리된 채 들려서 눕혀졌다. 독방은 원천적으로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는 구조였다. 내 휠체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밤새 꺼지지 않는 형광등 불빛 아래서 눈만 깜빡여야 했다.




            3월 30일 일요일      



새하얀 형광등 불빛의 밤이 지나고 새벽이 왔다. 두 눈에 보이는 구치소 독방의 철문 구멍은 나를 숨막히게 했다.


아침을 먹지 않은 채로 교도관을 불러 다시 한번 부탁했다. 정말이지 나는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내장애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했다.
괜한 동정을 받는다는 기분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나는 구치소에서 만나는 교도관마다 내 장애 상태를 반복 설명하면서 생리현상을 해결할 수 있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서울구치소앞에서 노들야학 수업 광경



“교도관님, 나는 소변 조절이 자유롭게 되지 않습니다. 잠자는 도중에 소변이 흘러넘쳐서 모포를 적실 수 있습니다. 모포가 젖지 않도록 조치가 필요해요. 흘러넘친 소변 때문에 몸을 씻어주어야 하는데 화장실에는 가기도 힘들고 내가 씻을 수도 없게 되어 있어요. 조치를 좀 취해주세요.”(야학에서 이 사실을 알면 나를 ‘오줌싸개 교장샘’이라 할까 쑥스럽다.)



교도관은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내일 의사 선생님의 진단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앵무새처럼 답했다. “나는 의사 선생님의 진단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오늘 당직 책임자에게 지금 흘러넘친 소변을 처리하고 샤워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당직 교도관은 “여기가 당신 집인 줄 아냐”고 고함쳤다. “벌금 내면 되지 왜 벌금을 안 내고 사람 귀찮게 하는 겁니까.”



머리가 핑 돌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참 옥신각신했지만 나는 그저 장애를 핑계로 엄살떨고 있는 한 명의 ‘골통’으로 취급됐을 뿐이다. 모포는 소변에 푹 젖었고 그대로 누워 있기가 너무 힘들어서 다시 한번 요청했다. 잠시 뒤 직급이 조금 높은 사람이 왔다. 그는 문도 열지 않은 채 문구멍에 대고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가버렸다.



“사소한 것으로 꼬투리 잡아서 귀찮게 하지 마시오. 경고합니다!”



경고? 귀찮게 하면 지금보다 더 힘든 곳으로 보내겠다는 뜻인가? 더 힘든 곳은 어디지? 나는 그렇게 방치된 채 2박3일을 지내야 했다. 재소자에게도 인권은 있다. 그래? 개뿔이다. 인권은 무슨 인권. 그때부터 나는 밥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교도관들의 비웃음만 돌아왔다.





            3월 31일 월요일      



날이 밝자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진정서를 작성해 접수했다. 교도관은 “지금 진정서를 쓴 수감자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어요. 인권위 직원이 나온다면 아마 당신의 40일 노역이 다 끝난 뒤일 것”이라며 기계적 말투로 접수했다. 이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막막했다.


아침에 면회 온 동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인권위에 긴급 진정을 부탁했다. 동지들은 “오늘 저녁 노들야학 수업을 아예 구치소 앞에서 현장수업으로 진행한다”고 전해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고마웠고 힘이 났다.


면회를 마치면 의무반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드디어 의사를 만났다. 내가 요구했던 모든 것은 의사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했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자를 만난 셈이다. 그러나 그가 조치해준 것은 다른 구치소 방 환경과 똑같은 병동 구치소로의 이동뿐이었다. 여전히 나는 한 마리 짐승으로 방치됐다.





            4월 1일 화요일      



아침에 인권위에서 긴급조사를 나왔다. 구치소 내부의 진정 절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외부 동지들의 긴급 진정이 받아들여져서다. 나는 인권위 조사관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조사관들은 구치소 소장을 만나보겠다 했고 내가 있는 방도 보고 갔다.


오후에는 구치소 소장을 면담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공식적인 사과와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다. 소장은 “사과 문제는 상대적인 것”이라며 “앞으로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얼버무렸다. 그때 부터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복역 중인 방으로 옮겨졌고,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구치소에서 욕창 방지용 매트리스를 사다 깔아주었다. 몸도 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노역 없는 노역살이는 고통스러웠다. 휠체어 없이 누워만 있는 시간은 더할 수 없이 괴로웠다. 나는 구치소 입감 첫날부터 노역 일거리를 요청했다. 봉투접기라도 시켜달라고 했으나 구치소 쪽은 일거리가 없다며 거절했다. 한 해 4만 명이 단지 벌금 낼 돈이 없어 노역형을 살고 있다. 하지만 구치소에선 그들에게 시킬 노역거리가 없어 사실상 징역형을 살게 하는 것이 한국 벌금 시스템의 웃지 못할 현실이다.


저녁에는 당뇨에 따른 저혈당 증세가 찾아왔다. 더 이상 단식을 이어가기가 버거웠다. 일요일 저녁부터 시작한 3일째 단식을 마무리했다.





            4월 2일 수요일      



나는 시민들의 모금으로 벌금을 내고 5일 만에 구치소를 나올 수 있었다. 5일간의 노역 대가인 25만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벌금을 납부했다.


나의 구치소 노역 소식을 듣고 126명이 ‘소셜펀치’(www.socialfunch.org/nofain)와 계좌이체로 무려 1084만4533원을 모아주셨다. 이 돈으로 나를 포함해 김주영 노제 과정에서 18명에게 부과된 벌금 1535만원의 상당액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은 탈세와 횡령으로 부과받은 벌금 254억원 중에서 5일간의 노역으로 25억원을 탕감받았다. 나는 도로 차선을 넘었다는 이유로 부과받은 벌금 200만원 중 5일간의 노역으로 25만원을 탕감받았다. 노역을 많이 살수록 탕감액 격차가 천문학적으로 벌어지는 구조다. 그 구조의 핵심엔 야만스러운 돈 냄새를 풀풀 풍기며 우리를 지배하는 ‘법질서’의 실체가 도사리고 있다. 노들야학이 3월31일 구치소 앞에서 현장수업을 할 때 인디 뮤지션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불러준 <돈만 아는 저질>이란 노래가 있다. 내 귀엔 사법부를 위한 찬송가로 들린다.


벌금의 불평등은 헌법 제11조 1항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다. 헌법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헌법 위반이라고 아무리 외친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구치소에 간 것은 돈이면 무엇이든 되는 현실과 제도 앞에서 너무 쉽게 ‘평등’을 포기한 채 살고 싶지 않아 세상을 향해 날리는 ‘똥침’이었다. 어떤 상황이 닥치고 어떤 곳에 있더라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싶지 않은 작은 저항의 ‘몸부림’이기도 했다.


구치소에서 고병권 선생님이 쓴 『살아가겠다』를 읽었다. 책에는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전태일의 이야기가 나온다.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시장에 나가 등불을 들고 “인간을 찾노라”라고 한 것처럼, 나는 구치소에서 등불을 들고 “평등을 찾노라” 말하고 싶었다. 비록 혼자만의 ‘원맨쇼’로 치부될지라도.


장애인인권운동을 시작한 이래 법원은 내게 2001년부터 2012년까지 23차례의 벌금을 선고(2874만원 납부)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는 나를 비롯한 90명에게 6845만원을 부과했다. 나를 구치소에서 꺼내준 시민들의 모금은 나를 포함해 장애인운동을 하다 벌금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연대’라고 생각한다. ‘나를 아는 모든 나’, 그리고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게 부치는 전태일의 유서처럼 ‘그대 영역의 일부’로서 장애인들을 받아들여주길 요청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평등과 연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 아닐까.



고 김주영동지 노제 불법 규정 및 장애인운동 벌금탄압 규탄 박경석대표 자진노역 결의 기자회견 장면



이제 4월10일이면 또 재판이 시작된다. 김주영이 죽은 해(2012년) 12월2일 ‘세계 장애인의 날’을 맞이해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1박2일을 머물며 ‘높으신 의원님들’께 주영이의 죽음을 알리고 장애인활동보조 예산을 올려달라고 기자회견을 한 일 때문이다. 검찰은 공동주거침입죄로 나와 2명의 장애인을 기소했다. 이미 3명의 장애인에게는 350만원의 벌금이 부과(계속 발생 중)된 상태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장애인인권운동 벌금 모금 : 국민은행 477402-01-195204 (박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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