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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특집_노들장애인야학 개교 30주년

낮수업-권리중심공공일자리 8년, 발달장애인의 권리를 표현해 온 시간

 

 

 박임당

권리중심공공일자리의 각종 미션 수행 중

 

 

 

 

  30주년 특별판(!) 『노들바람』에 낮수업의 역사를 소개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이참에 자료를 다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는 관련된 사업계획서도 있을 것이고, 더 중요하게는 낮수업을 진행하면서 쌓아온 무수히 많은 회의록과 『노들바람』에 쓴 글, 노들야학 홈페이지에 남아 있는 글과 사진, 영상 등도 있다. 낮수업이 어느 시점부터 매일 매일 평가 회의를 진행하면서, 모든 자료를 모으는 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작업이 되었기에 이번에는 미처 다 그러모으지 못했다.

 

  다만 낮수업 초반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자료들을 모두 다시 뒤적이면서 낮수업의 역사를 볼 수 있었고, 이에 더해 낮수업과 함께 깨지고 성장하고 또 깨지고 있는 나의 활동의 시간들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내가 갈무리하고 있는 낮수업의 역사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이 수업을 함께 꾸려온 학생과 교사들의 활약에 기대어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하게 밝혀두고 싶다.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나의 동료들이 얼마나 멋진 사람들인지, 얼마나 눈부신 변화를 보여주었는지도 같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멋진 모습도 중간중간 소개해 볼 수 있도록 하겠다.

 

 

  2015년 4월, 낮수업의 시작 ‘천천히 즐겁게 함께’

 

  2015년 노들야학에서 발달장애인 학생들은 비주류 그 자체였다. 야학은 중증 신체장애 학생들이 다수였고, 발달장애 학생은 10명도 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발달장애 학생들은 2023년 현재 노들야학의 발달장애인 구성원들과도 차이가 있었는데,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은 편이었고 재가장애인이 많았으며, 시설 경험이 있는 분이더라도 탈시설하여 지역사회에서 살아온 지 꽤 오래 지난 상황이었다.

 

  당시 노들야학 발달장애 학생들의 하루 일과는 아침 일찍부터 야학에 와서, 오후 5시 저녁 수업을 기다리며 야학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발달장애인의 이동권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시 야학 발달장애 학생들은 대부분 글을 읽을 수 없고 활동지원 시간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들에게 외출이란,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을 찾아들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을 테다.

 

  ‘낮수업’(당시 사업명은 ‘천천히, 즐겁게, 함께’)은 이처럼 제도적 사각지대에 위치한 발달장애 학생들의 낮시간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 하루 일과의 공백을 의미 있는 자립의 시간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시작됐다. 이에 더해 신체장애 학생들 중심으로 구성되어온 노들야학의 교육 시스템 안에서 자칫 소외될 수 있는 발달장애인의 특성에 걸맞은 교육의 형태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4월 말부터 시작한 낮수업의 주요 참여자는 재가 발달장애인이었다. 프로그램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3시간, 주 5일 일정으로 진행됐다. 5일 중 문해 수업은 3일(국어, 수학, 권익옹호 등), 자기표현은 2일(방송댄스, 공작)로 구성되었다. 당시 야학은 월, 화, 목, 금 주 4일 저녁 5~9시 수업을 운영하였기에, 낮수업은 강사단이 주로 진행하도록 구성했다. (나도 이때 보조강사로 노들야학에 처음 발을 디뎠다.) 이 시간의 활동들을 모아서 하반기에는 ‘노란들판의 꿈’에서 발달장애인 당사자 권리옹호대회인 ‘노들 피플퍼스트’도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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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노들 피플퍼스트

 

 

  2017년 여름, ‘인강원’ 팀의 합류

 

  소소한 변화 속에 큰 흐름을 유지해 오던 낮수업은 3년 차에 큰 지각변동을 겪게 된다. 장애인거주시설 인강원의 거주인 10명이 낮수업 학생으로 찾아온 것이다. 인강원은 2014년에 시설 비리와 인권 침해가 불거진 발달장애인 거주시설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 이후 인강원은 재단에 공익이사진이 투입되어 거주인들의 탈시설 지원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거주인 일부가 낮수업에 참여하여 지역사회 경험과 자립생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노들야학과 인강원 두 단위 간 협의가 이뤄진 것이다. 시설 거주인이라는 특성과 더불어 야학의 기존 발달장애 학생들보다 중증인 이들이 10명이나 동시에 학생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낮수업도 큰 변화가 필요했다.

 

  재가장애인의 자립생활 지원과 가족의 돌봄 부담 경감을 이야기하던 낮수업의 목표가 시설 거주 장애인의 탈시설-자립생활 지원으로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물론 인강원팀의 합류 이전에도 소소한 변화는 계속 있었다. 저녁 수업의 보충수업 같은, 저녁 수업의 발달장애인 버전 같은 수업들은 이내 좀 더 다양한 활동형의 수업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직업에 관한 탐구, 아프리카댄스, 핸드드립 커피 수업, 각종 도구를 통해 자기표현을 담은 출판물을 만드는 진(Zine) 수업, 텃밭 수업 등 각종 체험형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인강원 팀은 제일 먼저 아프리카댄스 수업에 결합했다. 라이브 연주에 맞춰 서로의 몸짓을 즐기고 소통하는 장이었던 아프리카댄스는 사람이 많이 모여 에너지가 증폭되는 환경을 환영하는 수업이었다. 수적으로도 많고 낯설기도 한 장애 학생들의 갑작스러운 합류가 물론 쉬운 결정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함께하는 시간의 에너지와 소통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긴 선택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들은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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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아프리카댄스 수업

 

“그렇게 순식간에 퍼진 행복 바이러스에 우리는 신나게 땀 흘리며 춤췄다. 감정의 교류, 에너지 발산과 표현, 춤과 음악을 통한 몸의 대화는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간다. 내가 나이고, 네가 너인 상태에서 우리는 함께 울고 웃으며 우리의 존재함을 끊임없이 표현한다. 이러한 우리의 움직임이 슬픈 사회를 향한 저항 방식의 일환으로 자리잡기를 바라며, 행복의 흥을 다 함께 터뜨리는 날을 상상해본다.” (권금)

 

  당시 담당 강사였던 권금 샘이 남겨 준 수업 소개의 일부이다. 함께 모여 춤추는 시간의 역동적이고 시끌벅적하면서도 개운한 그 어떤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각자의 표현 방식으로 함께 춤을 추며 만들어가는 왁자지껄한 움직임이 발달장애인이 이 사회에 자기 자신으로 함께 존재함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내용, 그리고 그 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비장애인 중심 사회를 향한 하나의 저항 방식이기도 하다는 소개를 읽다 보면, 권금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활동의 가치와 의미를 진작 알고 있었던 듯하다.

 

  2018년 1월, 낮수업 강사단이 처음으로 다 같이 모여 간담회를 진행했다. 간담회 회의록을 보면 반년간의 복작복작한 일상도, 긴 호흡에서 장애인 노동권 의제가 어떻게 투쟁으로 만들어져 왔는지도 엿볼 수 있다. 사실 이 글을 준비하기 위해 회의록을 발굴해 들춰봤을 때 깜짝 놀랐는데, 당시 박경석 고장샘의 기조 말씀(?)이 마치 미래를 미리 보고 온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회의록이 그의 스피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인지 매우 듬성듬성하여서 조금 정리해서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탈시설 투쟁을 계속 하고 있는 현재 진보적 장애운동의 상황에서 성인 발달장애인의 교육은 매우 중요하고, 노들야학은 사업비를 딸 수 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자체 예산을 들여서라도 교육을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시설 비리가 있는 기관들에서 탈시설을 준비하고 있는 장애인이 많이 있으나, 이들을 위한 예산이나 지역사회에서 지원하는 기관이 서울시에조차 별로 없다. 평생교육센터는 재가장애인도 다 받지 못하여 대기가 넘치고 있다. 우리가 탈시설을 지원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장애인시설 거주인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지역사회 참여를 통한 삶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들이 앞으로 탈시설해서 지역사회로 나오면, 교육프로그램 참여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 형성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지역사회에 나왔을 때 야학에서 공부를 하게 됨으로써 투쟁의 과제와 지역사회의 연결망을 만들어가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물론 노들야학은 발달장애인 관련 경험이 많지 않고 감당이 어려울 수 있지만, 야학이 버텨온 20여 년의 경험들로 잘 만들어 나가보자.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 이야기이지만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점거 농성을 하고 있는데, 공공일자리를 요구하고 있고 발달장애인의 활동을 일로 인정해달라고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일자리인 것이다.” (박경석)

 

 

  2020년 7월, 권리의 표현물이 지역사회로 나가다

 

  투쟁으로 일궈온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2020년 7월 서울에서 첫 발을 내딛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중증장애인의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생겨난 일자리로, 서울시에서 시범 사업으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에 근거를 두고 있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가 대한민국 정부에 권고한 사항인 장애인의 인식 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장애인의 노동을 통해 수행하는 일자리인 것이다.

 

  이 일자리는 장애인 권익옹호 활동, 장애인 인식개선 활동, 문화예술 활동 세 가지 직무로 구성된다. 세 가지 직무들은 노들야학에서 그동안 학생들이 노동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에서 적절한 역할을 가질 수 있도록 활동하는 가운데 발굴한 일자리와 활동들이 표본이 되어 만들어졌다. 중증장애인, 발달장애인이 할 수 있는 활동을 개발하고, 이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노동으로 인정하라는 투쟁의 결실이기도 한 것이다.

 

  중증장애인 노동자들은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통해 지역사회에서 노동자가 되어 자신의 생산물을 내어놓는 주체로서의 자리를 가질 수 있다. 탈시설 장애인에게 꼭 필요한 것이 지역사회 연결망이라고 할 때, 이들이 노동자로서의 연결망을 가지게 되면 더 적극적인 위치에서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증장애인들이 더 이상 서비스의 수혜자로서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산물을 통해 지역사회와 만난다. 기자회견, 토론회, 행진을 비롯한 권익옹호 거리 캠페인,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협업하여 준비하는 장애인 인식개선 강의, 중증장애인의 문화예술 캠페인.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은 장애인의 권리를 알리고, 지역사회에 장애인 차별의 현실과 장애인 비장애인이 함께 사는 삶이 필요성을 교육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만나는 문화예술의 장을 형성해 만남과 소통의 방식을 익힐 수 있도록 한다. 이 세 가지 직무를 통해 지금껏 장애인과 함께 살 준비를 하지 못한 지역사회가 중증장애인과 캠페인을 통해 만나고, 지역사회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준비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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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중심공공일자리 행진 (사진: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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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중심공공일자리 권익옹호 캠페인 (사진: 김흥구)

 

  이러한 노동을 위해서는 일자리를 처음 가져보는 중증장애인에게 말 그대로 ‘맞춤형’의 노동과 직무가 고안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적절히 지원할 수 있는, 중증장애인이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 인력과 근로지원인의 역할이 필요하다. 또한 각자의 장애 상태에 맞는 적절하고 반복적인 교육과 연습도 필요하다. 노동, 지원, 연습. 이 세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에야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비로소 ‘권리중심’의 ‘중증장애인 맞춤형’이라는 가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노들야학에서는 첫해 26명의 인원을 배정받았고, 주 20시간 권익옹호를 중심 업무로 하는 시간제 일자리와 월 56시간(주 14시간 이내) 문화예술 노동을 하는 복지형 일자리로 나누어 노동자를 고용했다. 시간제 일자리는 주로 지역사회에서 살고 있는, 뇌병변장애인과 지역사회 거주 경험이 많은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복지형 일자리는 인강원 등 장애인시설에 살면서 탈시설을 준비하고 있거나, 탈시설한지 얼마 되지 않은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문제가 있었는데. 중증장애인의 노동이니만큼 지원이 매우 중요함에도, 복지형 일자리의 경우 부족한 노동시간 때문에 근로지원인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근로지원인 서비스는 월 60시간 이상 노동을 하는 경우에만 신청할 수 있다. 월 56시간 노동의 부족한 점은 또 하나 있는데, 주 15시간 이상 노동해야 받을 수 있는 주휴수당 지급 기준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복지라는 이름으로 최저의 노동시간과 최저의 급여가 세팅된 것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야학에서는 복지형 일자리의 부족한 4시간을 자체 예산을 부담해 채우기로 결정했다. 국가와 지자체가 제공하는 최저의 노동시간과 임금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만든 일자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구성해낸 것이다. 복지형 일자리는 월 60시간 노동을 하게 되었고, 근로지원인과 주휴수당을 모두 지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2020년 7월부터 6개월간이긴 했지만, 이제 노들의 낮은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으로 북적이는 시간이 되었다. 이제 갓 첫 삽을 뜬 사업이라 정돈된 것이 많지 않았고, 노동자들도 근로지원인들도, 그리고 야학 사무국의 활동가들도 모두 미지의 세계를 만난 것만 같았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사업을 총괄하고 있던 내가 출근해서 앉아있으면, 매일 백 서른 마흔 한가지의 질문을 하러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나 또한 미지의 세계를 만난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쏟아지는 질문들에 말끔한 답변을 준비할 수 없어서 매일 좌절했고, 각종 초기 세팅 업무에 나날이 시달리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업무도 큰 틀은 정해져 있으나 매일, 매주, 매달의 구체적인 맞춤형 업무를 고민하고 구성해 나가야 했기에, 담당 사무국 활동가들과 강사단 역시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회의를 하다가 억울해서 울어버린 적도 있고, 업무에 실수가 있어 계속 수정을 반복해야 해서 업무량도 도통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시작한 다른 기관들의 사정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긴 어려웠다. 다 함께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잘 꾸려나가기 위해 힘을 모아 만든 권리중심공공일자리협업단(아래 협업단)에서 함께 이 미지의 세계를 돌파해 나가고 있었는데, 매주 열리는 사업 담당자 회의에서는 우는 사람이 계속 바뀌었다.

 

  코로나19가 서울지역에 본격적으로 기세를 떨쳤던 것 역시 이 일자리를 위태롭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사업 공모가 늦어진 것도, 일자리를 진행하는 가운데 휴업과 출근을 반복하며 견뎌왔던 시간들도 모두 코로나19 확산의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럼에도 출근은 해야 했고, 이 일자리의 가치와 의미를 알리기 위해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애를 썼다. 공원 행사에 부스를 세우고 포토존도 만들어 장애인 인식개선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고, 노동자들의 문화예술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간간히 진행된 외부 공연에 초청되기도 하고, 자체 행사에서 행진을 기획해 우리만의 피켓을 들고 함께 행진하기도 했다. 혜화역 근처에서 저상버스 인식개선을 위한 캠페인도 수시로 진행했다.

 

  이토록 불안정하고 시끌벅적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일자리가 평생 처음 월급을 받고 노동을 한 경험이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노동시장에서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고 외면당해 왔던 쓰라린 기억을 보듬어주는 경험이 되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렇게 힘들었음에도 모두가 포기하지 않고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의미 있는 일자리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6개월이었다.

 

 

2021년, 권리중심일자리 팀 분화기

: 권익옹호팀/ 피플뻐스팀/ 탈탈탈팀의 탄생 그리고 재택근무

 

  2020년 첫 해, 시간제와 복지형 두 팀으로 나뉘어 진행된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12월 말일자로 계약이 종료되며 아쉬운 마무리를 했다. 이 일자리가 공모 사업이었기에 노들야학이 위탁기관으로 다시 선정이 되어야만 일자리를 이어갈 수 있었고, 당시에는 예산이 한정되어 있어 다음 해 초부터 바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2021년 상반기, 일자리 운영에 대해 사무국 담당자들이 모여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제일 먼저 나온 이야기는 시간제 일자리 구성원들 간에 존재하는 만족도의 차이에 관한 부분이었다. 시간제 일자리 팀은 권익옹호 업무 위주로 진행이 되었는데, 뇌병변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이 섞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장애인권에 관한 용어들이나 현재의 투쟁 이슈들을 따라가며 소통하는 수위를 어느 정도로 잡아야할지 어려운 측면이 있었고, 양쪽 그룹 모두 일자리 진행에서 만족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시간제 일자리 팀을 장애 유형별로 분리해서 뇌병변장애인 그룹은 기존 업무를 그대로 수행하고, 발달장애인 그룹은 새로 한 팀을 만들어 권익옹호에 더해 문화예술 업무를 좀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구성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시간제와 복지형의 두 팀을 운영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는데 세 팀이라니! 지원자로서 일이 늘어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있었지만, 오히려 노동자에게는 적절한 지원을 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실제로는 업무에 대한 부담감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중증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 중증장애인 맞춤형이라는 가치를 더 중시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이제 세 팀이 꾸려졌다. 권익옹호 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뇌병변장애인이 주된 구성원인 ‘권익옹호팀’, 지역사회 경험이 비교적 많은 발달장애인 노동자로 구성된 ‘피플뻐스팀’, 장애인시설에서 탈시설-자립생활을 준비하고 있거나 최근 탈시설한 발달장애인 노동자로 구성된 ‘탈탈탈팀’.

 

  권익옹호팀은 작년 한 해 진행했던 것보다 좀 더 밀도 있게 권익옹호 활동을 진행한다. 새로 생겨난 피플뻐스팀은 짐작할 수 있다시피 발달장애인 권리옹호 운동인 ‘피플퍼스트’를 우리 식대로 발음한 팀명이고, 발달장애인 권익옹호 직무와 문화예술 직무를 반반 섞어서 진행한다. 탈탈탈팀은 탈시설을 강조하는 의미로 지어본 팀 이름이고, 문화예술 직무를 중심으로 진행한다.

 

  2021년 일자리는 이 세 팀의 활약으로 4월부터 힘차게 시작했으나, 코로나19는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휴업을 계속 진행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어렵게 만든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계속 휴업을 한다면 휴업수당은 받을 수 있겠지만, 중증장애인은 재난 상황에서는 또 다시 일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어찌됐든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위험으로부터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방식을 만드는 것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협업단에서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담당자들은 각 팀별로 지속가능한 노동의 방식,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하면서도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 보기로 했다. 전례 없는 중증장애인의 재택근무가 준비되었다.

 

  지금도 온라인 화상회의 프로그램인 ‘줌’을 통해 진행된 재택근무를 떠올리면 목청이 아픈 듯 느껴진다. 실제로 만나서 업무를 진행하는 것보다 몇 배의 집중과 소통을 해도 그 효과는 반에 반도 안 되었다. 몇 년 만에 우리만의 인사법을 함께 개발해 낸 발달장애인 노동자는 온라인에선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았다. 작은 태블릿 화면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노동자는 강사진이 애타게 불러도 아랑곳없이 방 안을 돌아다녔고 종종 화면 밖으로 이탈했다. 가정에서 줌 접속과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던 근로지원인들은 진땀을 흘렸다. 사실 발달장애인 노동자들 모두가 원활하게 줌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자체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아주 기본적인 세팅을 완료했다한들 문제가 끝난 것도 아니었다.

 

  2021년 야심차게 신설한 타악기 연주팀인 ‘노들쿵쿵차카차카팀’은 실제로 만나서 진행해도 맞추기 어려운 악기 연주의 박자를 미세한 시간차가 있는 줌에서 연습하기 위해 애를 먹었다. 시작부터 제대로 모여서 연주의 초석을 다질 기회가 많지 않았던 팀이기에, 온라인에서 뭔가를 하는 것이 더더욱 쉽지 않았다. 고가의 악기를 각 노동자의 가정으로 하나씩 가져다드릴 수도 없었고, 가져다드린다 한들 소음 민원은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제대로 된 연주가 온라인을 통해 가능할리 없었다. 연습 전 몸 풀기와 소악기 만들기 등을 진행하고, 간단한 버전의 드럼패드를 사서 각자 연습하고 타악의 박자를 익히는 연습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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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쿵쿵차카차카팀의 재택근무

 

  발달장애인 노동자를 위한 재택근무 패키지도 꾸렸다. 택배를 각 노동자의 집으로 보냈던 날도 기억이 난다. 우체국 박스에 색연필, 사인펜, 스케치북 등 간단한 미술 도구와 여분의 용지, 권리의 언어가 담긴 각종 문구들을 프린트해서 넣었다. 집에서 각자 권리 문구가 프린트된 용지를 따라 쓰기도 하고, 각종 드로잉을 더해서 다함께 들고 권리옹호 인증샷을 찍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온라인으로 댄스 공연을 하기도 했다! 온라인 댄스 공연이라니 어리둥절하지만, 대형 LED 화면에서 재생되는 공연 영상을 줌으로 함께 만든 것이다. 줌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능인 교실의 강사단만 화면에 크게 띄우기, 2개의 화면만 크게 띄우기, 6명이 각각 출연하는 6개의 화면을 띄우기 등을 실행하고, 모두 함께 춤을 추고 있는 화면을 모아서 띄우면 군무가 가능했다! 정말 코로나19 시대의 기상천외한 온라인 공연이었다. 이 영상은 노들야학 유튜브에 가면 볼 수 있다.

 

  연중 기획했던 오프라인 행사들은 모두 영상과 온라인으로 대체됐다. 댄스 공연은 댄스 필름 「아이 엠 마이 스타(I Am My Star)」 제작으로 변경됐고, 노들쿵쿵차카차카팀의 공연은 관객이 없는 유튜브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그림책 만들기 워크숍 북 콘서트도 모두 온라인. 우리의 진(Zine) 작품이 제주도에 전시되었으나, 전시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매년 기획하고 있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다큐멘터리는 애초의 기획 의도와는 다르게 재택근무 이야기가 많이 담기게 되었고, 노동의 생기 있는 현장을 많이 담지 못해 아쉬웠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각 팀은 최선을 다해 재택근무와 현장 출근을 병행했고, 줌 화면 집중이 어려운 발달장애인 노동자들 중 일부는 현장으로 출근하는 등 상황에 맞게 변화를 꾀하면서, 위기 상황의 맞춤형 시스템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노동자와 지원자 할 것 없이 모두 돌아가며 코로나19에 감염되었고, 감염자가 발생할 때마다 각 노동자와 지원자들은 선별진료소를 찾아 수시로 코를 쑤셔댔다. 언젠가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이 시민들을 거리에서 직접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마음껏 펼쳐지는 때가 오리라는 믿음으로, 이 힘든 시기를 노동자, 근로지원인, 사무국 활동가와 강사진들이 힘을 합쳐 버텨내었다.

 

 

  2022년, 권리중심공공일자리의 안정기와 연극 「등장인물」

 

  2022년에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사상 가장 많은 노동자가 고용되었다. 노들야학은 모두 30명의 중증장애인 노동자가 매일 출근하는 일터가 되었다. 그리고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드디어 꿈에만 그리던 일 년짜리 일자리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2021년 12월 마지막 날에 계약을 종료하고, 2022년 1월 1일자로 다시 고용될 수 있었다. 2022년을 마무리하고 난 후에는 퇴직금도 지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그토록 바랐던 코로나19의 종식이 눈앞에 있었다. 그동안 갈고 닦아온 우리들만의 노동을 시민들 앞에 펼쳐낼 수많은 제안이 야학으로 들어왔다.

 

  여러 학교들에서 인권강의 의뢰가 있었고, 거리에서 권익옹호 캠페인을 전개하며 시민들에게 장애인의 권리를 알렸고, 문화예술 공연 섭외가 수시로 들어왔다. 노동계와 장애인 문화예술 연구팀들로부터 인터뷰 요청도 많았고, 지면과 웹상에 야학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사례가 소개되었다. 그동안 제작된 두 편의 다큐멘터리가 각 지역 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영화의 이야기 손님으로 야학의 노동자들과 지원자들이 초청되었다.

 

  노들야학에서 기획한 전시와 공연의 스케일도 커졌다. 서로 다른 문화예술 직무들의 생산물을 모으고 협업한 작품이 기획되었다. 4월에는 댄스 필름 「아이 엠 마이 스타(I Am My Star)」를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노들에스쁘와팀에서 장애인문화예술원 이음의 갤러리를 빌려 댄스 필름을 필두로 전시와 공연 「어라운드」를 기획했다. 갤러리에는 자립생활 그리기 진(Zine)의 작품과 노들노래공장의 추천곡 리스트도 전시되었다. 전시를 여는 날과 닫는 날에는 노들에스쁘와팀의 공연도 갤러리 한복판에서 열렸다. 연주팀을 섭외해 라이브 음악과 함께 노동자들의 커뮤니케이션 댄스 서클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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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에스쁘와팀의 「어라운드」의 닫는 공연

 

  11월에는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노들야학 낮수업-권리중심공공일자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연극 「등장인물」을 무려 세종문화회관에서 상연했다. 「등장인물」은 오랜 기간 노들야학의 교사로, 권리중심공공일자리 강사로 활동해온 신재 연출가의 기획으로 시작되었다. 「등장인물」의 배우는 모두 노들야학 낮수업-권리중심공공일자리 문화예술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살고 있거나 탈시설한지 몇 년이 채 안된, 지역사회에서 자립생활 적응기를 보내고 있는 중증 발달장애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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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외벽에 걸린 「등장인물」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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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등장인물」의 공연 모습(사진: 서울시극단)

 

  배우들이 노들야학에 온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매일의 노동을 함께 수행한다. 월요일에는 ‘노들노래공장’에서 뮤지션 만수(이민휘)와 함께 다 같이 모여 만들고 싶은 노래의 주제를 정하고, 집단적 작사/작곡 작업을 통해 노래 한 곡을 뚝딱 만들어낸다. 화요일에는 ‘노들에스쁘와’에서 동그랗게 마주보고 서서 각자의 고유한 움직임을 발산하고, 그 움직임을 바탕으로 상호 소통의 춤을 춘다. 수요일은 휴무. 목요일에는 두 개의 교실로 나뉘어 들어가 강사진이 미리 준비해둔 미술 도구와 종이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 자신의 자리로 가서 ‘진(Zine)’ 작품 생산 활동을 한다. 진(Zine)은 창작자가 자신의 표현을 담은 작품을 다양한 형태의 도구를 사용해 생산하고, 생산과 유통 과정 전반을 관할하는 매체라고 진(Zine)의 오랜 강사인 유선 선생님이 『노들바람』 지면에 소개해준 바 있다. 금요일에는 두개의 직무로 나뉘는데, ‘일상 등장 워크숍 짜잔’에서는 자기표현과 감각, 소통하기의 방식을 실험한다. ‘발달장애인 직접행동’에서는 문화예술의 요소를 첨가한 발달장애인만의 권익옹호 캠페인 방식을 탐구한다. 이렇게 쌓아온 매일 매일의 작업들에서 무대화할 수 있는 요소들을 뽑아 한편의 극으로 구성한 것이 「등장인물」이다.

 

  동그란 원형으로 배치된 책상과 의자가 있고, 배우들이 이미 각자의 자리에서 두꺼운 스케치북에 자유롭게 진(Zine)을 그리고 있는 장면 안으로 관객들은 입장한다. 조력자들은 각종 극 안의 상황을 지원하기 위해 배우들 사이 듬성듬성 앉아 있다. 관객들은 이 원을 둘러싸고 있는, 평면의 무대와 눈높이가 거의 같은 의자들에 둘러앉는다. 입장이 이루어지는 시간 동안 배우와 관객은 원하는 만큼 소통한다. 이것이 공연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배우들은 자유롭게 관객과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한다. 무대 뒤 대형 화면과 객석 사이사이에 비치된 작은 모니터에서 배우들의 소개 영상이 재생된다.

 

  소개 영상이 끝나면 무대 한쪽 끝에 배치된 녹음실 자리에 노들노래공장 강사인 뮤지션 만수가 자리를 잡는다.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 온 수많은 곡들 중 「사랑의 마음」과 「시원한 여름」이라는 두 곡을 배우들이 돌아가며 녹음하고, 실시간으로 그 소리를 쌓아 합창의 음원을 만들고 함께 들어본다. 녹음의 순서는 정해져 있지만 당연하게도 배우들의 컨디션과 그날의 기분은 정해져있지 않다. 이러한 조건에 따라 매일매일 달라지는 배우들과 만수님의 인터뷰 내용이 이 극의 재미를 구성한다. 만수 님은 원하는 친구가 공연을 못 오게 되어 아쉬워하는 배우를 위로하며 노래를 녹음해 선물로 보내자는 제안을 하기도 하고, 녹음을 하다가 잠에 빠져버릴 것 같은 배우를 깨우기도 한다. 관객들은 우리가 만든 노래 가사를 곱씹기도 하고, 무대에서 잠들어버리는 배우의 모습에 웃음짓기도 한다.

 

  음원 레코딩 시간이 끝나면 가운데에 놓여 있던 의자와 책상이 원 바깥으로 옮겨지고, 컨택 즉흥(Contact Improvisation)1)을 위해 배우 신승연과 짜잔팀의 강사인 안무가 고권금이 신발을 벗어두고 원 안으로 들어온다. 권금이 바닥을 두드리며 움직임을 시작한다. 이는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한 신호이다. 어디에서 움직임을 시작할지, 어떤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작할지 정도가 정해져 있지만, 매 회차 공연에서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이며 어떤 동작을 만들어 내는지는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이때 자립을 준비하고 있고 자립을 하고 싶은 시설거주인인 배우 신승연이 극장 연습실로 출퇴근하는 버스 소리, 버스 안에서 권금과 나눈 이야기들, 파도의 춤을 추고 싶다는 이야기들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이러한 최소한의 약속들 사이에서 둘은 그날그날 할 수 있는 가능한 만큼의 움직임을 함께 만들어낸다.

1) 신체 간의 컨택을 통해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발생시키며 움직이는 즉흥 무용 방법론.

 
  컨택 즉흥이 끝나면 책상은 무대 바닥에 그려진 삐뚤빼뚤한 원 바깥으로 밀어두고, 의자는 원 안쪽에 서로 마주볼 수 있게 배치한다. 배우들은 옮겨진 의자에 각자의 속도대로 옮겨 앉는다. 노들에스쁘와의 안무가 엠마가 객석에서 원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는다. 엠마가 발을 구르며 프랑스어로 0과 100을 의미하는 “제로-썽(Zéro-cent)”을 외치면 커뮤니케이션 서클의 약속이 시작된다. 배우들이 함께 구령에 맞춰 발을 구르지만, 관객들도 슬그머니 동참한다. 발 구르기가 끝나면 엠마는 지용이 형을 시작으로 배우들에게 돌아가며 춤을 가르쳐달라고 하고 모두가 그 동작을 함께 한다. 이 시간의 마지막 순서인 연옥 누나의 뜀뛰기 동작이 고조되면 신나는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다 같이 원을 돌며 춤을 추다 멈췄다 춤을 추다 멈췄다 하다가, 지용-영교의 음악이 흘러나오면 둘을 제외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제는 커뮤니케이션 댄스의 시간이다. 배우들은 두 명씩, 혹은 마음이 내킨다면 다른 구성으로 소통의 춤을 춘다. 각자의 신체 가동 범위와 각자의 흥과 각자의 표현을 상대방과 소통하며 춤춰온 시간들을 펼쳐 보인다. 걸음이 느린 임실 배우는 좁은 보폭의 걸음 그 자체가 춤이 되고, 무언가에 의지해서 걸어야 하는 지용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서 영교와 함께 밀고 당기며 소통의 춤을 만들어 낸다. 주희 배우와 짝이었던 나는 매 회차가 진행될수록 고조되어가는 그의 리드에 따라 움직인다. 5회차 쯤 그가 마침내 나를 바닥에 굴려주었을 때, 오랜 기다림 뒤 마침내 그 기다림이 끝났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쾌감에 푹 빠져버렸더랬다.

 

  커뮤니케이션 댄스 시간이 끝나고 다 같이 흥겨운 춤을 추고 나면, 모두가 원 중앙에 모여 소곤소곤 서로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는 ‘하나, 둘, 셋’에 맞춰 관객들에게 “감사합니다!”를 크게 외치고 무대를 빠져나간다. 저 멀리 자기 조절의 책상에 앉아 유튜브를 보고 있던 지선도 벌떡 일어나 여기에 합류한다. 관객들은 크게 박수를 쳐주고, 공연장 건물 밖으로 나간 우리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근로지원인으로부터 겉옷과 소지품을 받아 걸치고 세종로 거리로 나아간다. 무대를 빠져나가는 순간부터 광화문 광장에서 각자의 집을 향해 흩어질 때까지의 과정은 공연장 안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그리고 이는 ‘퇴장’이 아닌 지역사회로의 ‘등장’으로 이름 붙여진다.

 

 

  2023년 현재,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탄압받고 있다

 

  2022년에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결과물들은 낮수업으로 시작해서 권리중심공공일자리로 발전해온 궤적들을 한번 중요하게 매듭지어주는 것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연극 「등장인물」의 자장하에 연말연시를 보냈던 우리는 앞으로 이 일자리를 통해 하게 될 많은 것들을 더 큰 규모로 상상해나가고 있었다. 우리도 언젠가 제대로 된 공연을 해보리라 생각했던 것이 실현되었듯,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어쩌면 허황돼 보이기까지 한 미래들이 구체적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 꼭 올 것만 같다.

 

  2023년에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한 건 아니다. 정권이 바뀌고 정세는 급격히 달라졌다. 서울시의 경우 우선 기관별 고용 인원을 대폭 줄인 형태로 사업 공고가 나왔다. 그 사이 전국 각 지역에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생겨났지만, 최초의 실행자였던 서울시는 이러한 흐름에 역행하는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계속 요구해 왔던 운영비 증액(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운영비가 거의 없는 수준의 사업이다)과 전담 인력 증원(2022년 기준, 30명의 노동자에 대해 인건비가 책정된 전담 인력은 1인에 불과하다) 등도 반영되지 않았다. 노들야학은 2023년에 선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일단 선정은 되었고, 18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게 되었다. 2022년 고용 인원 30명 중 12명의 노동자가 노들야학이 아닌 다른 기관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했다.

 

  노들야학 메일함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요구들이 서울시를 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정한 과거 어느 날의 일자리 기록과 사진을 내놓으라는 요구들이었다. 매일 매일의 사진이 사업 관련 서류로 요구된 것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날도 있었고, 필요한 자료들의 양도 과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 정리해서 보내면, 요청은 또 다시 반복돼서 자료를 다시 다듬어야 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과거 사업에 대한 모니터링이 시작됐다. 이미 이전에 서울시청의 공무원들이 와서 보고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모니터링을 마친 것들이었다. 그때 모니터링을 마치고 함께 도장 찍고 사인한 서류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다시 문제 삼기 시작했다.

 

  발단은 여당 소속 시의원의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서 진행한 캠페인의 불법성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권리중심일자리에 대한 공격은 거세졌고, 국회의원까지 이러한 탄압에 가세했다. 짧은 제출 기간 내에 너무나도 많은 자료를 내놓으라는 요구가 수시로 빗발쳤다. 뉴스와 기사에서 권리중심공공일자리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되는 일이 잦아졌다. 이러한 탄압은 결국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대한 고소·고발로 이어지고, 서울시는 이 일자리가 지향하는 중요한 가치를 훼손하기에 이르렀다. 7월 1일부로 장애인 권익옹호 캠페인을 금지시킨 것이다. 서울시는 올해 초부터 이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도 말해왔다. 권리중심의, 중증장애인 맞춤형의, 공공일자리의 근거를 이후에 부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지워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가치들을 지켜나가기 위해 올해도 많은 것들을 계획했고 수행해나가고 있다. 노들노래공장의 홈페이지가 개설되어 우리가 만든 노래들이 수시로 업데이트 되고 있고, 「어라운드」는 더 스케일이 커져서 돌아왔다. 올해만 네 번,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리는 커뮤니케이션 서클 「어라운드 마로니에」가 계획되어 있다. 그중 이미 진행된 두 번은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도, 높은 습도의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공원을 지나는 시민들이 둘러싼 가운데 소통과 춤의 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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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운드 마로니에」 공연 모습1 (사진: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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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운드 마로니에」 공연 모습2 (사진: 정택용)

 

  올해부터 새로 시작한 피플뻐스팀의 ‘버티는몸’에서는 지난 8월 말, 강원도 영월에 가서 댄스 필름을 촬영하고 왔다. 댄스 필름과 촬영 사진을 모아 전시와 공연을 기획하고 있고, 일정이 맞으면 댄스 필름은 해외 페스티벌에 출품해 볼 계획이다. 쿵쿵차카차카팀은 각종 초청 공연 섭외가 꽤 많아서 악기를 짊어지고 다니며 여기저기서 공연을 하고 있고, 팀의 로고도 제작할 계획이다. 2022년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다큐 「일로 만난 사이」는 전국의 지역영화제를 돌고 있다. 5월에 처음 이야기 손님 초대를 받아 두 분의 노동자가 무대에 올랐고, 10월에는 또 다른 노동자들이 무대에서 자신의 노동에 대해, 탈시설과 자립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이다.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우리의 노동을, 우리의 낮수업-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노들야학 개교 30주년을 맞이한 의미 있는 해에, 그리고 2022년 너무나도 알차게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꾸리고 살아냈던 우리들에게 이렇게 가혹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걱정하지만, 또 서로 잘 이겨내 보자며 위로하고 응원하고 싸우는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우리의 방식으로 시민들과 만나며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노동자로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멋진 작품들을 계속 만들어나가 볼 것이다. 앞으로도 힘들고 거친 길이 되겠지만, 그 길에서 여러분들이 함께 싸워주고 우리와 노동의 결과물을 통해 만나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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