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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2호_2013.10 - [Wz042_노들야학 스무해 톺아보기-II] 노들야학의 스무 살 생일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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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2호_2013.10 - [Wz042_노들야학 20주년 소개] 20주년 그 뜨겁고도 따땃한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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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2호_2013.10 - [Wz042_노들 영진위] 장애인문화예술판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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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2호_2013.10 - [Wz042_욱하는 女자]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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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2호_2013.10 - [후원소식] 9월 후원인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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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1호_2013.9 - [[Wz041_들어가며+8월노들] 온난화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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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1호_2013.9 - [Wz041_욱하는 女자] 저상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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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1호_2013.9 - [Wz041_노들 영진위] 센터 11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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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1호_2013.9 - [Wz041_노들.노들섬.노들텃밭] 기어가는 농사 이야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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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1호_2013.9 - [Wz041_나쁜 행복을 말하다] 또 다른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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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1호_2013.9 - [Wz041_듣는 노들바람] 듣거나 말거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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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1호_2013.9 - [Wz041_가비의 깎아줘] 클로저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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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1호_2013.9 - [Wz041_노들야학 스무해 톺아보기] 옛사람을 만났어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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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1호_2013.9 - [후원소식] 8월 후원인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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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0호_2013.8 - [Wz040_들어가며+7월노들] 인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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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0호_2013.8 - [Wz040_노들 영진위] 노들 명사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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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0호_2013.8 - [Wz040_노들야학 스무해 톺아보기] 노들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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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0호_2013.8 - [Wz040_노들야학 스무해 톺아보기] 원더풀 노들-김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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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0호_2013.8 - [Wz040_노들.노들섬.노들텃밭] 기어가는 농사 이야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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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웹진 40호_2013.8 - [Wz040_듣는 노들바람] 듣거나 말거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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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야학 스무해 톺아보기 프로젝트
내 푸른 청춘의 골짜기
글을 쓰신 김혜옥님은..
93년
야학 설립을 준비하던 모임의 끝물에 합류하여,
창립멤버 중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서 활동하다가
96년 2월에 퇴임했다.
3대, 5대 교사대표를 지냈다.
현재 초등학교 특수교사로 재직 중이고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장애를 소재로 한 동화 '천중번개는 곧 그쳐요'로 당선되었다.
#장면1
"폰호프!"
마을버스를 타기도 하고 전장협 누군가의 차를 빌려 타기도 하고 택시를 타기도 하며 우리는 소리친다. 오늘 뒤풀이 장소는 바로 구의역 사거리 BON호프라고. 신난다. 새로 온 최교장님이 술을 산단다. 이게 웬 공짜 술이냐? 우리는 정신없이 퍼 마신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비교적 인간다웠다. 아직은 술에 쩔지 않은 생생한 뇌세포를 가졌고 그때 우리의 간은 새빨갛고 윤기가 좔좔 흘렀으리라. 우리는 서로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였고 나누는 대화는 신선했다. 새로 온 최 교장님은 야학 교사의 모습에 대해 역설했고 우리는 그 말을 술이 우리 몸을 채워가는 속도로 체득했다.
#장면2
"수업 끝나고 한 잔 해야지?"
"당근이지."
"오늘 메뉴는....."
2교시 쉬는 시간에 이런 얘기를 하고 학생들은 3교시 수업하러 들어간다. 남아있는 교사가 처갓집 혹은 야식집에 안주를 주문하거나 정립식품에 가서 안주를 사오기도 한다.(아! 술과 안주 값은 학생들 중 누국가가 이미 주머니에 찔러줬다.)3교시가 끝나는 밤 10시, 교무실에 화려한 술상이 차려진다. 그때 우리는 늘 돈이 없었고 늘 먹을 것이 없었고 늘 술이 고팠으므로 그 것은 당연히 화려하고도 훌륭한 술자리였다. 그리고 술 안주보다 더 엄청난 '이야기 거리'가 있었다. 우리는 학생 분들의 삶을 마주한다. 가슴에 뭔가가 자꾸 고여서 술을 들이키지 않을 수가 없다. 새벽녘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고민한다.(택시비도 물론 학생들 주머니에서^^) 나는 왜 야학을 하는가? 노들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장면3
"수업 끝나고 한 잔 해야지?"
"아, 오빠(언니), 오늘은 정말 안돼. 오늘도 술 마시면 나 죽을것 같아. 오늘만 살려 줘. 제, 발, 흑흑...."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보네. 에휴. 그럴 만도 하지. 오늘은 내가 그냥 보내줄 테니 딴 길로 새지 말고 얼른 집에 가."
"응, 고마워, 내일은 꼭 뒤풀이 합니다. 바이바이~"
아차산을 내려와 마을버스를 타고 구의역에서 2호선을 탄다. 학생들과의 뒤풀이를 뿌리쳤으니 오늘은 꼭 집에 일찍 가서 일찍 자야지. 안 그러면 정말 죽을 거야. 이건 사람 사는 꼴이 아니야. 다른 교사들과 전철을 타며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집한다.
전철이 성수역을 지나고 뚝섬역을 지나 한양대역에 서서히 진입한다. 눈빛들이 바쁘게 오간다.
'정말 그냥 갈 거야?'
쭈뼛쭈뼛, 멈칫밈첫, 절레절레, 망설망설 ..... 수많은 마음과 눈빛들이 왔다리 갔다리.
드디어 전철은 한양대 역에 도착하고 술과 집 사이에서 고뇌하던 얼굴 중 하나가 전철 문이 닫히기 몇 초 전 소리친다.
"내려!!"
그 말이 무슨 주문이라도 되는 듯 모두들 한양대역에서 결연한 표정으로 내리고 주술에 걸린 병정들처럼 한양대 지하 포장마차로 행진하고 만다. 시간 없다며 막차 타야 한다며 급하게 들이킨 술은 내 기억의 일부를 앗아가고 간의 세포정화능력을 소리없이 말살시킨다. 물론 술 몇 잔 더 들어가면 막차고 뭐고 밤을 하얗게 세운 날이 부지기 수.
어떤 날은 한양대역에서 내리지 않고 무사히 왕십리역까지 갔다. 마의 한양대역을 지났어! 오늘은 정말로 집에 가는 구나!
하지만 아직은 한양대 지하포장마차를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인 왕십리역, 악마의 속삭임은 여지없이들리고 만다.
"내려!"
우리는 낄낄거리고 히히거리며 한양대 지하포장마차까지 달려간다. 그리고.... 기억이 안 난다. 이십여 년 가까이 지나서 기억이 안 나는 것이 아니라 술자리에서 했던 그 많은 이야기들이 다음날 기억이 안 나기 시작한다. 대화는 더 이상 신서하지 않은 재탕에 재탕이었고, 누군가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목에 핏대를 세웠고 주먹질을 했고 누군가는 한강물이 넘쳐날 정도로 울었고 누군가는 변기를 붙들고 밤새 토악질을 해댔다. 우리 몸과 뇌는 그렇게 알코올에 소독되고 절여져 갔다. 그리고 점점 더 많아지는 하얗게 새운 많은 밤들, 까맣게 지워지는 기억들, 쓰다보니 어느 시절엔 한 동안 천호동의 '酒家'로 향한 적도 있었다. 부활의 '사랑할수록'을 기타치며 목 놓아 부르던 박 교장님이 생각나는데 이건 또 언제일까?
술의 역사, 뒤풀이의 역사 말고 다른 얘기를 쓰고 싶었다.
우리가 야학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을 때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술로 우리를 변화시킨 최교장님 이야기라든가, 야학 초기 학생들이 힘들다고 수업에 빠지거나 야학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이들을 만류하고 다녔던 일(그리하여 결국 명학 오빠를 십 수 년 넘는 장수학생으로 만들었고, 그 때 내가 세게 굴었다고 나를 순악질 여사라 부른 사람도 생겨났다는, 그 고왔던 얼굴에 어떻게 그런 별명을 ㅠ.ㅠ)이라든가.
검시 날, 점심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 자취방에서 밥도 하고 제육볶음을 만들어서 날랐던 험난한 시저르 언젠가 검시 점심시사를 위해 우리 집에서 밤새 김밥을 쌌던 일도 있었다. 야학 수업 후 12시가 다 되어 자취방에 도착한 우리는 술을 홀짝이며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안신연, 박성희, 오현숙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김밥을 썰고 다른 사람들은 김밥을 쌌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김밥의 내용물이 하나 씩 없어졌다. 알콜에 절은 몸들이 졸음을 참아가며 김밥을 싸니 그게 온전한 김밥일 리 없지. 점점 단무지가 빠진 김밥, 시금치가 빠진 김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단무지 없는 김밥은 김밥이 아녀~ 잘 좀 싸 봐."
다들 깔깔깔 웃고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잘 싸기 시작. 새벽이 될수록 또 다시 김밥 재료가 하나 둘 탈출한다. 우리는 또 다시 까르르 웃고 어느 새 또 빠느리고 나중엔 써는 사람도 혼수상태라 뭐가 빠졌는지도 모르고 막 썰음. 분명 힘들었을 테지만 힘든 줄 모르고 웃고 떠들면서 밤새 김밥을 쌌던 어느 날 밤 얘기라든가.
손 모씨의 아들 모경오 씨가 첫 검시를 본 날. 검시 시험지 앞면만 풀고 '다 풀었다. 만세'
하고 20분만엔가 나왔을 때 뒷면에도 문제 있다며 시험장으로 다시 밀어 넣었던 일이라든가.
언젠가 송추인가 장흥으로 MT갔을 때 새벽녁에 술을 많이 마신 심모 군이 사라졌다. (아니 권모 군이던가?) 온갖 곳ㅇ르 다 뒤지고 설마 저 물 속에 뛰어든 건 아니겠지 하며 계곡 가에서 걱정하고 있을 때 그를 찾았다는 소식. 우리 옆방에 MT 온 여대생들 방에서 고이 자고 있었더라는 어이없는 일이라든가.
진형이, 병설이, 연구, 성규, 도식이형, 일안이랑 제천으로 기차여행 갔던 일이라든가.(그때 기차에서 어떤 아줌마가 나한테 저런 장애인들과 같이 여행가냐고. 무섭지 않냐고 물어봐서 나로 하여금 우리 일행을 잠시 '낯설게 하기'기법으로 보게 했다. 근데 낯설게 봤떠니 일행 모두 장애인으로 보이더라는.^^)그 날 밤, 강가에 텐트를 치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간밤 비바람에 텐트는 다 찌그러지고 강물이 불어 거의 텐트 있던 곳까지 왔다고 했다. 하마터면 조난 당한 장애인들이란 타이틀로 TV에 나올 뻔 했다. 난 그때 알콜에 찌든 간이 문제를 일으켰는지 온 몸이 가렵고 비실거리는 상태로 따라 나선 여행이라 그 난리 통에도 잠만 잤다. 태풍보다도 그 무서운 장애인들 틈에서 내가 어떻게 그렇게 태평하게 잠을 잤던 거지?ㅋ
술에 취해 휠체어에서 낙상한 손모 씨의 어느 날 밤도 있고(하긴 휠체어와 한 몸이면서 술에 취해 유체이탈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언젠가는 우리도 젊은 아이들이 노는 곳에 가보자 하여 대학로에 있는 콜라텍(??)인가 뭔가 하는 곳이 갔는데 종업원이 박 교장님을 보더니 입장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광분하여 '장애인 차별' 한다고 막 따졌는데 종업원 왈 그게 아니고 박 교장님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안 된다고.(그때 이미 흰머리 도사였으니 아마도 그게 진실이었을 듯)그렇지만 이미 휠체어라 안 된다고 판단한 우리 중의 누군가는 바다에 드러누우며 항의하였고 나머지 일행들은 이 서글픈 장애인 차별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울고불고 하면서 대학로를 싸돌아다녔던 얘기라든가.(아, 그때 박 교장님은 대학로 근처 이화동 사거리를 지날 때마다 언젠가 야학을 그 곳으로 이전할 거라는 그때 생각에 정말 꿈같은 소리를 했었는데, 꿈은 이루어진다! 박교장님은 위대하다!)
주로 술 취한 여교사들을 집에 데려다주던, 일개 교사였던(아니다. 그때 박경석은 교사도 아니었고 운전기사도 아니었고 도대체 뭐였나? 교장 자리 꿰차려고 노들 주변에서 염탐하는중? 이젠 사실을 밝히라. 박 교장!!) 많은 술 취한 여교사들의 애마, 박기사이 엑셀 7297. 많은 낭자들이 그 차에 하도 오바이트를 해대서 결국 그 차를 폐차시켰다는..(물론 그 이후에산 씨에로도 비슷한 처지였다는 썰도 있고, 나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대체 누가 그렇게 오바이트를 해댄 거냐고?)뭐 그런 이야기라든가.
그런 소소한 것들을 잘 끄집어내어 재구성해서 쓰고 싶었다. 초창기멤버로서 지금과는 너무 다른 그 때를 세밀하게 그려내어 그 시절ㅇ르 함께 한 이들을 향수(?)에 젖게 하고 후배들에겐 '옛날 옛적, 노들이 담배 피던 시절'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앞에 쓴 대로 나는 매일 같이 반복되던 뒤풀이 몇 장면만 선명하게 기억할 뿐. 그 실절에 대한 내 기억들은 도무지 어슴푸레 하고 분절되고 뒤섞여서 언제인지도 모르곘고 누구랑 같이 였는지도 모르겠고... 오로지 생각나는건 술, 술, 술, 뒤풀이, 뒤풀이.
고 놈의 알콜로 노들에서의 추억을 무던히도 쌓았지만, 고 놈의 알콜 때문에 많은 기억을 잃고 말았다. 어느 날 부턴가 뒤풀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삼분의 일도 기억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분명 그날 밤 술자리에 같이 있었는데 그날 밤의 난리 부르스를 마치 그곳에 없었던 사람인양 다음 날 다른 이들로 부터 듣게 되는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노들에서 베린 몸, 돌리도!!
하지만 분명한 건,
술이 내 뇌세포를 아무리 갉아 먹었어도,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분명히 기억하는 건,
나는, 우리는, 정말 노들과 노들 사람들을 사랑했었다는 것이다. 노들, 그 곳에서
우리는 마음껏 마시고 웃고 울며 사랑했다. 참 많이도 쏟아 붓고 참 많이도 쏟아냈다.
아, 징글징글한 눈물.
그런데 살아가다가 어느 날 깨달았다. 아아~ '내가' 살려고 아차산 골짜기로 스스로
기어 올라간 거였구나. 거창한 무엇 아니었고 그저 나를 위한 몸부림이었구나. 술과
야학을 빙자하여 나는 나를 쏟아내고 풀어냈구나. 노들은 그런 나를 안아주고 다독여 주고
감싸 줬다. 나는 아차산 그 푸른 골짜기와 따사롭고 풍요로웠던 노란 들판에서
치유되고 성장하였다. 그러므로 노들에서 베린 몸 따위는 용서해줘야 한다. ^^
며칠에 걸쳐 이 글을 쓰면서 자자 울컥거렸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그립고 그
시절의 사람들이 그립고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웠다. 돌아온 용팔이 오빠의 '어느 날 귀로에서'
를 낮게 흥얼 거리며 그저 마음 다독인다.
....... 빛나는 기억들 울렁이던 젊음 그곳에 두고 떠나야 하네
이별에 익숙한 작은 내 가슴 속에 쌓이는 두려움 오오오오.
내 푸른 청춘에 골짜기에는 아직 꿈이 가득해 아쉬운데
귀로를 맴도는 못 다한 사랑 만날 수는 없지만......
화려했던 시간들 울고 웃던 친구들 그곳에 두고 떠나야 하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의 추억을 아파하지 마라 오오오오.....
노래를 부르다 보니 추억할 수 있는 뜨거웠던 날들이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러니 아파하지 마라. 빛나는 기억들. 울렁이던 젊음. 푸르던 청춘아.
마지막으로 뱀다리
#장면4
"이십년 후에도 노들은 존재하고 있을까?"
최 교장님이 묻는다.
"당연하죠"
우린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야학은 없어지기 위해 존재한단다. 이것들아."
그 시절 뒤풀이에서 했던 말이다. 그 때는 이십 년이 참 멀게 느껴졌는데 벌써 그 이십 년이 돼버리고 말았다.
없어져야 할 노들이 스무 살이 되었단다. 태어나서 걸음마 떼고 아장아장 걷던 서너 살 무렵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키도 훌쩍 커버렸고 여기 저기 막 뛰어다니는 혈기 방자한 이십 대 청년이 되었다. 어느 새 훌쩍 커버린 내 아이를 보는 듯 흐뭇하고 고맙고
기특하고 대견하다.
하지만 노들야학은 언젠가 없어져야만 한다. 제도권이건 제도 밖이건 장애인도 똑 같이 교육을 받는 세상이 반드시 와야 하므로. 장애니 야학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언젠가는 없어져야만 하므로. 한 시절 들불처럼 생겨났던 노동야학이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젊은 노들이 좀 더 그 푸르름을 발산하기를. 좀 더 낭창낭찬 푸르렀다가 실하고 굵은 열매로 가득한 황금빛 들판을 이룬 다음 멋지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를. 그리고 역사가 필요로 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스무 살을 맞이한 사랑하는 노들에게 보내는 축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