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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비마이너

죄 없는 시민은

죄가 없는가

 

 

고병권 

맑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철학,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써왔다.

인간학을 둘러싼 전투의 최전선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으며, 읽기의집 집사이기도 하다.

앞으로 국가의 한계, 자본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고병권_2.jpg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50일 넘게 장애인들의 출근길 시위가 있었다. 휠체어 장애인들 여럿이 승강장 한 곳에서 줄지어 타기를 반복했다. 이로 인해 지하철의 운행이 역마다 몇 분씩, 전체로는 몇십 분씩 늦어졌다. 대선 후보 TV토론회에서도 언급되었지만 SNS상에서는 시위 시작 때부터 난리가 났고 장애인 단체에는 항의와 협박 전화가 빗발쳤다.

 

   사정은 이렇다. 지난 1월 국회에서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버스를 대차하거나 폐차할 때 저상버스 도입을 의무화하고 국가가 운영비를 지원할 수 있게 했다. 2001년 ‘버스를 타자’며 장애인들이 뛰쳐나온 지 21년 만에 통과된 법이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은 그렇게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문구와 실행 사이에 그놈의 문턱이 또 있었던 것이다. “지원할 수 있다”는 규정은 “지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규정임을 기획재정부가 일깨워주었다. 예산을 아끼려는 마음이 차별에 대한 무지와 결합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기본권에 대한 심각한 박탈인 이동권 문제를 예산에 여유가 있을 때 제공하는 서비스 같은 걸로 생각한 것이다. 지난 50일의 출근길 시위는 21년을 이어온 이동권 투쟁이 무력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투쟁은 50일의 투쟁이 아니라, ‘21년 하고도 50일’이 된 투쟁이다.

 

   출근 시간을 건드릴 생각을 하다니 장애인들도 보통의 각오는 아니었을 것이다. 평상시 장애인들은 출근 시위는커녕 이 시간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것조차 피하고 싶어 한다.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만원 버스나 지하철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만장일치로 유죄를 선고하는 그 원망 어린 시선을 어떤 장애인이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번에는 기어 나오는 것만으로도 유죄인 시간에 시위까지 하고 말았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는 게 이런 말인가 보다. “출근길에 왜 이러세요? 하지 마세요!” “왜 죄 없는 시민들의 발목을 잡아요? 우리가 무슨 죄에요?” 이 정도면 양반이다. “병신 새끼, 죽고 싶냐?” “아예 팔까지 장애인으로 만들어 줘?” 지인들이 전하는 말도, 영상에서 확인하는 말들도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국민청원까지 올라왔다. “‘사회적 약자’라는 타이틀을 빙자하여 소수의 이익을 챙기려는 행위를 방치할 수 없”다며, “거대한 사회적 폐단을 저지르는” 장애인 단체를 처벌해달라고 했다.

 

고병권_1.jpg

 

 

   나는 선량한 시민들로부터 욕설을 뒤집어쓴 이들을 오랫동안 존경해왔다. 이들이 착한 장애인이어서가 아니다. 이들 중에는 ‘나쁜 장애인’을 자처하는 사람도 있고 전과자도 있다. 특히 이번 시위 주도자 중 한 사람은 무려 전과 27범이다. 그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중에도 점거 농성을 벌였다. 그곳 화장실에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시위가 금지된 경찰서에서 농성을 벌인 이 나쁜 장애인 덕분에 해당 경찰서는 수십 년간 문제를 인식하지도 못했던 화장실을 수리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 장애인 학생은 내게 “착한 장애인으로 살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착한 장애인으로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에서 그는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성깔’은 배움과 각성의 표시였다.

 

   이번 일을 장애시민과 비장애시민의 ‘불행 배틀’로 보지 말아야 하며, 문제는 장애인 이동권 제약을 해결하지 않는 정부에 있다는 지적에 공감한다. 그럼에도 선량한 시민들이 쏟아내는 참혹한 욕설들을 듣고 있노라면 내 안에서 오래된 질문 하나가 뛰쳐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죄 없는 시민은 죄가 없는가. 선량한 시민은 전과 27범의 장애인 앞에서 저렇게 당당해도 좋은가. 과연 장애인들이 죄 없는 시민의 발목을 잡았는가. 오히려 시민들이야말로 장애인들의 발목을 잡아온 건 아닌가.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을 지칭하면서 쓴 표현이다. 그런데 아렌트는 악이란 누구에게나 있다는 식으로 이 말이 오해되는 걸 우려했다. 그는 오히려 아이히만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인간인지를 말하고 싶어 했다. 흔하디흔한 편견에 놀아나면서 무리에 동조하는 인간. 소수자들의 처지를 조금만 생각해보았다면 “그런 입장에 서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는데도 도무지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평범성의 악’에 가깝다. 시인 레너드 코헨도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에 이렇게 적었다. “눈: 보통/ 머리: 보통/ 체중: 보통/ 특징: 없음/ 손가락 수: 10개/ 발가락 수: 10개/ 지능: 보통….” 요컨대 장애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남의 인권을 함부로 침해한 존재는.

 

*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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