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봄 126호 - [노들아 안녕]새로운 세상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습니다 / 조은솔
[노들아 안녕]
새로운 세상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조은솔
노들야학 신입교사입니다. 이번에는 영화반을 맡았습니다.
평소에는 영화를 만들고 또 공부합니다.
노들야학 수업계획서 양식을 컴퓨터에 띄워놓고,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이 많은 빈칸을 어떻게 채워야할까, 어떤 영화를 볼까, 어떤 이야기를 할까... 여러 생각이 떠오르고 사라졌습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습니다. 소통이 활발한 수업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었습니다. 지난 가을 여러 수업을 참관했습니다. 노들야학의 선생님들은 저마다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의견을 물었습니다. 좋아보였습니다. 저도 그런 시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한국 영화가 장애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함께 봐보자.’
그렇게 주제를 찾았습니다. 매주 한 편씩 영화를 골라 하이라이트를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 주제라면 나보다 학생들이 더 많이 이야기하는 수업이 되지 않을까? 기대도 잠시,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저는 아직 노들야학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은 더욱이 알지 못했지요. 비장애인인 제가, 게다가 장애인권운동을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감히 이런 주제를 이야기해도 될까요? 괜히 아픈 데를 들추는 건 아닐까요?
“난 장애인 나오는 영화 보기 싫더라.”
첫 수업 시간, 걱정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맨발의 기봉이>를 보는 날이었습니다. 극화된 기봉이 아저씨 캐릭터를 보며, 학생 한 분이 화를 내셨습니다. 오버스럽게 장애인을 묘사하는 게 싫다고 하셨습니다. 평소 장애인 나오는 영화는 보지 않는다면서요. 마음이 내려앉았습니다. 보기 싫은 영화를 억지로 보는 것은 고역입니다. 제가 괜히 고통을 안겨드리는 것은 아닐까요?
걱정이 해소된 것은 네 번째 수업에서였습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을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피아노 연주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서번트 증후군 동생과, 그를 이용해 돈을 벌어보려는 형이 가까워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2018년에 개봉했는데, 당시 장애인을 희화화한다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주로 서번트 증후군 동생의 돌발행동을 이용해 코미디를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동생이 갑자기 길에서 대변을 보는 장면입니다. 노들야학 수업에서도 이 장면을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장애인을 희화화하고 있는 이 장면, 어떻게 보셨는지요.
“근데 비장애인도 급할 때가 있잖아요.”
뜻밖에 학생들은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을 보며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고요. 비장애인도 급하면 그럴 수도 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말씀들이었습니다. 수업에 참여한 분들이 다 비슷한 생각이었습니다. 극중 주인공은 수풀을 찾아가 팬티를 내리고 용변을 보는데, 그 정도면 양반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지요. 일리가 있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서도 고민은 이어졌습니다. 이 장면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것일까, 혹은 아닐까?
아직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고심하면서 두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학생들이 고통을 넘어서 비평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감히 이 주제를 다뤄도 될까’ 당초의 걱정은 제가 혼자 수업을 끌어간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는데요. 이러한 우려가 무색하게도 제 존재감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주도적으로 영화를 비평하고 있지요. 제 비평에 설득력이 없다면 의문을 제기하고 다른 비평을 제시합니다. 때로는 유명 평론가보다 날카로운 인사이트를 노들야학 학생들이 던지십니다.
또 하나의 발견은 한국 사회의 변화입니다. <맨발의 기봉이>가 개봉한 2006년, 당시 이 영화가 장애인을 희화화한다는 담론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의 명대사 ‘하나 올리고~ 하나 더 올려!’는 온갖 예능 프로그램에서 더욱 오버스럽게 재연되곤 했죠. 반면에 2018년 개봉한 <그것만이 내 세상>은 <맨발이 기봉이>보다야 문제가 희미한데도 장애인을 비하한다는 질타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 배우 신현준 씨가 예능프로그램에서 <맨발의 기봉이> 콘셉트로 인사를 했다가 해당 방송사가 인권위에서 주의 의견을 받은 사건도 의미심장합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희망이었습니다. 프로불편러로 가득한 세상은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일테니까요. 이번 학기 영화반 주제 잘 잡았다, 주제 넘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다같이 프로불편러가 되어 영화 속 장애 묘사를 불평하다보면 영화 속 세상, 그리고 진짜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요. 노들야학을 만난 지 불과 반 년이지만 새로운 세상에 걸어들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