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겨울 125호 - 3.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둘러싼 논쟁은 더 확장되어야 / 정창조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3.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둘러싼 논쟁은 더 확장되어야
: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란 무엇인가> 차담회를 마치며
정창조
1년에 한 번씩 맘 잡고 떠나는 여행의 날들이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인데, 2020년에는 한 번도 여행을 못 가서 우울하다. 2021년에는 코로나 재앙과 바쁜 일정에도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여행을 떠나고야 말겠다고 생 각하고 있다. 최근 고기 섭취를 줄이려 ‘아주 조금’ 노력하고 있는 터라, 마음속에서 그다지 치열하지 않은 갈등 을 종종 겪는다.
지난 11월 13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권위원회는 노들장애학궁리소와 함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란 무엇인가?〉라는 타이틀의 차담회(茶談會)를 열었다. 이 차담회에서 는 서울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맞춤형 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협업단의 정동 은 동지와 전장연 노동권위원회 간사인 내가 발제를 했고,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의 박하순 동 지,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김상현 교수(전장연 노동권위원회 위원장), 다른세상을향한연대 전 지윤 동지가 토론자로 참석했다.
모처럼 치열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나의 발제는 각기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세 토론자 로부터 비판도 많이 받았다. 이렇게 한 자리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까이는’ 건 사실 매우 낯선 경험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자리를 꾸린 이로서 뿌듯함 이 솟구쳤다. (최근에) 장애인 노동 관련 담론이 이렇게 풍성하게 다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아쉬운 점도 많았다. 토론자들과 더 많은 토론을 나누고 내 입장을 다시 한 번 정당화하고 싶었으나, 차담회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 날 내 발제에 가해진 각종 비판과 문제 제기에 대한 나름의 변명(?)으로 채워질 것이다. 글의 내 용도 문체도 재미있는 글로 가득 차 있는 『노들바람』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걱정이 많이 되지만, 그래도 그날 여러 모로 공격받은 나 역시 이 비판들에 대한 답변을 권리중심 공공일자 리의 메카 중 한 곳인 노들 구성원들에게 내놓아야만 하지 않겠는가!
권리중심공공일자리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가
먼저 이 날 내가 한 발제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보자.
1. 나는 발제문을 통해 세계를 ‘파괴’하거나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는 활동들조차 자 본의 이윤 창출만 가능케 한다면 ‘생산적 노동’으로 분류되는 현실의 기이함을 지적했다. 특히 금융투기 노동과 대자본의 대량 상품 생산 시스템 속 임금노동들은 ‘생산적’이라는 기준의 표 상으로 이야기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세계를 망가뜨리고 있는가? 한편 공공이 필요로 하는 가치, 인민 대중이 필요로 하는 가치, 이 세계가 지금 당장 필요로 하는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일지라도, 그것이 자본의 이윤 창출과 무관하다면 ‘비생산적 노동’으로 규정되고 있다. 그 렇다면 ‘생산적/비생산적’ 개념은 그 용어 자체에서부터 어딘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2. 그런데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노동자들은 이 세계가 필요로 하는 가치를 생산하 는 노동을 한다. 즉 「UN 장애인권리협약」의 실현을 목표로 두고서, 새로운 권리를 창발하고, 그 내용을 전 사회적으로 홍보하며, 그 권리가 실질적으로 이행되기 위한 ‘권리생산노동’을 수 행한다. 이 노동이 생산하는 가치는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즉 자본이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 획득 가능한 가치와 그 성격이 판이하다. 따라서 이 노동은 자본주의적 의미에서는 ‘생산적 노동’이라 할 수 없지만, 분명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생산’하는 노동이다. 그러나 자본 주의적, 기존 주류 경제학적 통념에서는 여전히 이 노동을 ‘생산적’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의 개념 자체를 뒤흔들고 패러다임을 바꾸는 담론이 필요하다.
3. 비경제활동인구 비중이 비장애인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장애인 같은 경우, 사회 에서 기생적 소비계층 쯤으로 취급당하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한 번도 임금노동 활동에 참 여해본 적 없는 장애인 당사자들 같은 경우에는, 자신을 그저 수동적 존재로, 즉 다른 이들이 생산한 것들을 그저 복지를 통해 소비하는 존재쯤으로 평가 절하하는 것을 종종 마주한다. 그 러나 만약 ‘생산적 노동’의 개념이 변화한다면 ‘권리생산노동’에 참여하는 장애인 노동자들은 더 이상 기생적 소비계층이 아니라, 세계 구성의 한 참여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러한 맥락에서 이 일자리 명칭의 핵심적 부분이라 할 수 있는 ‘권리중심’도 (종종 ‘각종 노동권 을 상실해 온 자에게 노동권을 보장해준다’는 의미로 사용되곤 하지만) 실은 ‘권리를 생산한 다’는 의미가 더 주요하게 부각되어야 한다.
4. 기존의 장애인 노동 정책은 재활 이념에 맞춰 ‘비정상적 노동력’을 ‘정상적 노동 력’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즉 노동력 상품이 될 수 없어 ‘착취당할 자격조차 없는’ 이들을 자 본이 고용하여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 상품으로 ‘정상화’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 는 장애인 개개인에게 장애의 책임을 부과하는 것으로,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 장애인 개개인 들을 ‘불구화’한다. 그러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노동자 자신의 신체를 자본이 원하는 노동 력 상품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노동자를 둘러싼 노동 환경의 변화와 사회적 관계 전체의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을 추구한다. 장애인이 노동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현존하는 생산 조건이 장애인이 노동하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 라서 생산 과정과 조건이 변화한다면 최중증장애인도 노동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아니 실은 최중증장애인 상당수는 이미 노동을 해 왔다). 이런 차원에서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기존의 ‘재활’ 이념, ‘민간 시장으로의 전이’의 목표를 전복하려 한다고도 볼 수 있다.
5.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이러한 취지는 비단 그동안 노동으로부터 배제되어 온 장애인에게만 긍정적 효과를 가져 오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은 소외된 형태로 이 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돈을 벌어 먹고살기 위한’ 목적에서 주로 이루어지다보니, 자신의 노동 이나 생산물이 세계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노동 과정에서 생각하지 못하게 되곤 하기 때 문이다. 그러나 권리중심 일자리의 경우, 세계가 필요로 하는 가치를, 장애인 당사자가 당장 절 실히 필요로 하는 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이러한 ‘소외된 노동’과 거리가 먼 노동이다. 따라 서 권리생산노동의 기본 정신은 단순히 장애인 노동에 국한된 실험에 그쳐서는 안 되고, 비장 애인의 노동 세계에까지 확장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한 비장애인들도 자본에 맞춰 자신의 노동력을 ‘정상화’하기 위해 일생을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틀로 노동과 생산 개념을 바라보게 된다면, 이러한 틀 자체를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그러나 아직까지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6.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실험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확장되기 위해서는, 그리 고 이 일자리가 가진 본 취지가 퇴색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는, 장애인운동 진영, 노동운동 진영, 시민운동 진영을 주축으로 이 사회 구성원들이 직접 참여하여 공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 는 가치에 대한 수요를 논의하고, 그에 맞는 일자리를 구성할 수 있는 민주적 절차가 마련되 어야 한다. 이는 (너무 거창한 꿈일지는 모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자본에 의한 생산 과정의 통제를 끝장내고, 인민에 의한 생산 과정의 통제가 가능한 시대를 점차 만들어 가는 것을 지 향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장애인 노동과 만날 수 있나?
박하순 동지는 이 주장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비판적 입장을 개진했다. 박하순 동지는 먼저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의 개념을 ‘윤리학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언급했다. 또한 박하순 동지는 비생산적 노동이 생산적 노동에 의존적이라 할지라도 자본주의 운영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실제로도 필수적이라고 강 조했다. 그런데 비생산적 노동 역시 여전히 생산적 노동에서 일반적으로 부과되는 노동 강도 나 규율을 부과 받고 있다. 그리고 중증장애인의 공공 노동 역시 생산적 노동이건 비생산적 노 동이건 결국에는 이러한 기존의 노동 강도와 규율을 부과 받을 것이기 때문에(박하순 동지는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도 결국 이렇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는 듯 보인다), 장애인운동 진영도 이 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능력에 따른 노동, 필요에 따른 분배”를 향한 운동으로, 즉 공산주의를 향한 과도기적 사회 구성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기본적인 지향에서는 박하순 동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장애인운동 진 영 내부에서조차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 않겠지만, 장애인운동이나 진보적 장애인 노동 담론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전복의 지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장애인 억압과 차별을 낳는 근본 문 제를 계속 건드리지 않은 채 놔둘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하순 동지의 주장은 다음의 차원에서 더 비판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1. 박하순 동지는 생산적/비생산적 노동 개념 쌍을 앞서 말했듯 가치 판단이 배제 된 ‘과학적 용어’로 설정하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분명 정치경제학과 정치경제학비 판에 천착하고 있는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고, 나 역시 이러한 방식의 개념 활용은 이 사회의 생산 시스템을 읽어내는 데 굉장히 유용한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박하순 동지는 금 융투기 노동은 애초에 ‘비생산적 노동’이기에 장애인 노동과 비교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례라고 말했는데, 나 역시 이 노동이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회는 이미 그러지 않고 있 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과거에는 GDP 산정에서조차 배제되어 왔던 금융투기 노동 의 ‘생산’은 ‘가장 생산적’인 활동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된 지도 이미 오래되었고 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생산적/비생산적 노동’ 개념 쌍을 사용할 때, 적극 참조한 것은 애덤 스미스의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이었다(물론 마르크스에게서 이 개념 쌍 에 대한 규정의 내용은 변화했고, 더 엄밀해 지긴 했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가 규정한 (심지어 마르크스에게서도) 생산적 노동, 비생산적 노동 개념에는 정말로 ‘윤리적 가치 판단’이 전적으 로 배제되어 있을까? 애덤 스미스가 비생산적 노동에 많은 노동력이 투여되는 것을 ‘낭비’라 보았으며, 생산적 노동에 더 많은 노동력이 투여되어야 국부가 더 잘 축적될 수 있다고 보았는 데도?
단순히 경제학적 논쟁 문제를 떠나서, 현실 세계에서 ‘생산적/비생산적’ 개념 쌍이 자유주의의 통치와 맞물린 권력 관계 구성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 본다면, 이 개념 쌍에 대한 ‘윤리적 판단’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생산적/비생산적 노동 개념 쌍은 현재의 생산 양식 및 현실의 권력 관계를 만나 ‘정상적 노동력’에 대한 통념으로 이어졌고, 이로써 ‘건 강한 비장애인 남성’만을 기만적으로 생산의 주체로 둔갑시키는 데에, 그리고 다른 ‘불인정 노 동’들의 가치를 절하하는 데에 실제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히려 철저히 자본의 입장만을 반영하고 있지만, ‘과학’의 탈을 쓰고서 중립 적인 채 하는 ‘생산적/비생산적 노동 구분’의 배후에 감춰진, 즉 각종 노동에 대한 ‘자본 중심 으로 구성된 윤리적 판단 기준’의 기만성을 폭로할 때이고, 이로써 현실 사회에서 구성되어 온 각종 권력 관계의 메커니즘의 실상을 폭로할 때이다. 아울러 노동자-장애인-여성 등 그간 이 개념 쌍과 함께 억압받아 온 이들의 입장에서 ‘생산’ 개념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기준을 설정 해 갈 때이다.
한편 이러한 나의 제안 역시 충분히 마르크스주의적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마르크 스 역시 자본주의에서의 ‘생산적 노동’, ‘비생산적 노동’의 개념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 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적 조건에 따라, 그리고 현재의 물적 조건을 넘어서기 위한 인간들의 실천 과정에서 충분히 변형될 수 있다. 기존 자본주의적 ‘생산적 노동’의 개념 자체에 대해 문 제를 제기하는 ‘권리생산노동’의 실험은 그러한 실천의 과정이 왜 될 수 없단 말인가?
2. 비슷한 맥락에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실험은 박하순 동지가 지적한 지향과 사 실 다른 지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궁극적으로 그 지향을 단번에 성취하려 하지 않을 뿐, 이 일자리는 기존의 자본주의적 노동 규율과 노동 강도에 대한 지양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 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를 단번에 성취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심지어 공산주의 사회의 ‘과도기적 단계’조차 단번에 성취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장애인운동이 어떻게 마냥 공산주의 사회의 요구만을 단번에 주장할 수 있을까? 심지어 현실적으로는 가 장 좌파적인 노동운동들조차 그런 지향을 구체적 투쟁들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 이다. 요컨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기존 자본주의적 노동 강도와 노동 규율을, 따라서 평균 적 노동력과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거해 측정가능한 자본주의적 ‘가치 측정 기준’ 자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는 박하순 동지의 지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국가가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굳이 추진해야 하는가?
그것도 왜 최중증장애인에게만 일자리를?
김상현 위원장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에 대하여 마구 쏟아지 고 있는 ‘정말로 이것이 노동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권리생산노동’은 결 국 특정한 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노동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더 나아가 이 일자리의 정당성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질문들을 많이 던졌다. 특히 이날 김상현 위원장이 던진 질문 중 ‘국가가 왜 굳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추진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권리중심 공공일자 리를 둘러싼 담론장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다. 김상현 위원장은 이러한 맥락에 서 권리생산노동을 통해 장애인 권리를 실현하는 것, 즉 「UN 장애인권리협약」의 내용이 실현 되는 것에 대한 이 사회 구성원들의 수요가 있긴 한 건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 수요가 충분하지 않다면, 혹은 사회 구성원들이 이 협약 자체의 내용 실현을 원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이 협약의 의의와 내용을 세금을 투여해 누군가를 고용하면서까지 사회 구성원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가? 그러나 김상현 위원장의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고려해 다시 생 각해 봐야 한다.
1. 근대 국가(실은 모든 정치체)는 이데올로기 등을 통해 특정 가치를 사회 구성원들 에게 부과한다. 실제로 자유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근대 국가들은 보통 자본의 입장을 중점적 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본주의적 성장은 지속 가능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 사회 구성원들 자신의 요구로까지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특정 계급에게 유리한 것을 전 사회 구 성원들에게 유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끔 만들어 내지 못했다면,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미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국가가 이미 특정한 가치를 구성원들 본인의 요구인 것 처럼 왜곡하여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편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며, 그 목적 차원에서 공화국의 존립 이유를 생각해 본다 면, 국가는 ‘공공적 가치’를 사회에서 실현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장애인의 권리 실현은 이 ‘공 공적 가치 실현’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UN 장애인권리협약」은 심지어 대한 민국이라는 공화국이 직접 비준한 것이며, 따라서 대한민국은 공화국으로서 이 내용을 이 사 회에 실현할 의무가 있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 본인이 직접적으로 ‘장애인 권리 실현’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국가가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사회 구성원들에게 설득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 과도 분명히 연결된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취지 중 하나는 공적으로 장애인들의 권리 실 현이 왜 중요한 것인지를 전 사회적으로 홍보하는 것이며, 이는 자본이 요구하는 수요에 대한 공급이 아니라, 인민 대중이 ‘공적으로’ 원하는 수요에 대한 공급이 이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만드는 데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수요란 결코 소비자 개인의 능동적 의지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수 요란 언제나 외부적 조건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형성된다고 생각되곤 하는 수요의 내용은 실제로는 대부분 자본의 요구에 의해 구성된 경우가 많다. 실제로 상품에 대한 대부분의 수요들은 대부분 그렇게 구성되지 않는가?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 소비자이자 구매자인가? 그런데 만약 외부적 조건이, 역사적 조건이 바뀐다면 어떠할까? 그렇다면 인민 대중이 원하는 수요의 내용도 변화할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장애인 권리 실현이라는 수요가 왜 필요한지를 전 사회적으로 홍보하며, 이로써 사회적 조건 자체에 대한 변혁을 추구한다. 이 변혁의 요구를 단지 ‘구성원들이 당장 원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에서 비판한다면, 그것은 현재 구성원들의 욕구에 국가와 자본이 어떻게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이 영향력이 심지어 세계를 파괴하고 인류 종의 존속까지 위협하는 데까지 분명 기여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2. 김상현 위원장은 이에 덧붙여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왜 중증장애인에게만 보장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던졌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기본 취지대로라면 경증장애인 이나 비장애인 활동가들에게도 비슷한 일자리를 줘야 하는데, 그렇다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는 최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잃을 것 같다는 우려에서 나온 질문으 로 보인다.
타당한 질문이다. 나는 공적으로 필요한 가치들을 창출하는 여러 노동이 공공 차원 의 노동으로 널리 인정받고, 또 공공에 의해 이 일자리들의 노동자들에게 안정적으로 노동의 대가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민 대중이, 공공이 원하는 가치에 대한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창구, 생산과정 전반에 대한 인민의 통제력 확보가 중요하며,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내 용과 참여자의 범위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고 내가 발제에서 강조한 이 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는 현재로서는 ‘가치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일지라도, 실질적으로는 먼 미래에나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최중증장애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본주의 역사에서 노동시장으로부터 철저 히 배제되어 왔으며, 지금도 민간 시장이나, 다른 여러 공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자리에 투여될 수 있는 조건이 안정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김상현 위 원장이 말한 것처럼 비장애인, 경증장애인 활동가들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을 추구할 수는 있더라도 우선적으로는 노동 영역에서 배제되어 온 최중증장애인을 우선 고려 대상으로 삼아야 한 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이 일자리 참여자 자격에 경증장애인과 비장애인 활동가들까지 포섭 한다면, 아마 사업 위탁기관들은 최중증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이나 경증장애인 고용을 더 선호 할 것이다. 그러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취지 중 하나는 ‘노동자 개인의 높은 생산 능력’을 중심으로 참여자를 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오히려 권리를 생산하며 공공적인 가치를 실현 하는 ‘과정’ 자체가 공공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과정 자체의 중요성, 즉 ‘세상에서 가장 일 못하는 최중증장애인’과 각종 조력자들 간의 관계를 새로 구성해 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이 일자리는 최중증장애인을 권리생산노동자로서 우선 고려해야 한다.
권리중심일자리의 직무를 더 확장할 수는 없을까?
장애인들은 왜 생산성을 증명해야 하는가?
전지윤 동지는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 대한 나의 발제에 대해 토론자들 중 가장 우 호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특히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의 자본주의적 개념 쌍에 대한 나의 비판 에 대하여, 전지윤 동지는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인류학적 가치이론에 따라 동의의 입장을 내 비쳤으며,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 의거해 나와 마찬가지로 그동안 이 사회의 불인정노동에 대 한 가치 절하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아울러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통하여 권리중심 공공일자 리가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의미를 매우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1. 그러나 전지윤 동지 역시 몇 가지 우려를 드러냈다. 나는 발제에서 ‘권리생산노동’ 을 가사노동, 돌봄노동과 개념적으로 다른 노동임을 강조했는데, 이에 대해 전지윤 동지는 “권 리생산노동도 가사 및 돌봄 노동처럼 인간의 삶과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더 가치 있게 만드 는 사회적 재생산 노동의 일부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은가”라는 물음을 제기했다.
이 문제제기는 매우 중요하다. 또한 권리생산노동 역시 이 노동의 개념을 어떻게 정 의하느냐에 따라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재생산 노동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전지윤 동지의 말이 특히나 의미가 큰 것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내용을 ‘권리생 산노동’으로만 계속 한정하려는 시도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가 더 큰 틀에서 고려하고 있는 취지인 ‘불인정 노동 일반에 대한 인식의 전면적 전환’과 상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 칫 잘못할 경우, 이 일자리의 기본 취지와 맞닿아 있는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김도현 이 제시한 ‘공공시민노동’과도 이 노동은 배치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권리생산노동을 굳이 다른 불인정노동들과 구분한 것은 이 노동을 엄밀 히 개념화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또한 지금 당장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진행하면서, 이 노 동의 내용을 불인정노동 일반으로 확장할 경우, 이 일자리의 직무에 ‘인간 활동 일반’ 모두가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이 사업을 진행하는 데 현실적으로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으며, 자칫 잘못하면 ‘권리생산노동’의 의미가 퇴색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사업 수행기관이나 이 일 자리의 노동자, 담당 공무원조차 ‘권리생산노동’ 개념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 임금노동에 포함되지 못했으나 분명 가치를 생산하는 인 간 활동 상당수를 포함시키게 될 경우, 「UN 장애인권리협약」의 실질적 실현이라는 이 일자리 사업의 목적 자체를 망각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UN 장애인권리협약」과 전혀 상 관없는 노동들이 이 일자리 직무들을 차지하게 될 경우, 과연 기존 재생산노동으로 ‘흔히’ 규 정되어 온 활동들과 분명 직무 자체가 다른 ‘권리생산노동’의 독특성이 부각될 수 있을까?
이와 연관하여 한 가지 더 지적해야 하는 것은 토론 과정에서 전지윤 동지가 다른 재 생산 노동이 생산하는 가치를 ‘수치화’했다는 점이다. 이 수치화란 결국 전지윤 동지의 본 의 도와 상관없이, 혹자들에게는 기존 자본주의적 생산성의 기준에서 그것이 생산하는 가치를 측 정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물론 재생산노동의 가치를 폄하해서는 절대로 안 되며, 재생산노 동 개념을 기존보다 더 확장해야 하고, 또 공공에 의해 그러한 노동이 ‘노동’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과정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권리생산노동’은 그 활동이 생산하는 가치에 대한 수치화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노동은 특정 활동 이나 특정 활동이 생산한 가치에 대한 수치화가 불가능한 것임을 폭로한다. 이 수치화의 거부 는 결국 그간의 불인정 노동에 대한 임금노동으로의 편입이 아니라, 임금노동 체계 자체를 뒤 흔들기 위한 시도이며, 사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권리생산노동 외 다른 재생산 노동들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 역시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2. 한편 전지윤 동지는 이 일자리가 향후 제도화되고 담론화 되는 과정에서 ‘장애인 본인들이 자신을 생산적인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방식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 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제기다. 나의 발제는 물론, 권리중심 공공일자 리 관련 실무를 담당하고 있거나 관련 담론장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하는 부분이다. 나 역시 당장 이 일자리를 홍보하고 안착화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더군다나 이 일자리 역시 많은 이들에게서 기존 공공일자리들처럼 ‘시혜적 일자리’로 여겨지고 있고, 이 로써 이 일자리 참여 장애인을 계속 ‘기생적 복지 수혜자’로 보려는 시각이 많기 때문에, 굳이 ‘권리생산노동’이 어떻게 세계를 구성하는데 기여하는지만을 강조한 부분이 있다. 물론 나는 ‘생산적 노동’의 기준 자체를 전복해야 한다는 전제와 함께 이러한 주장을 펼쳤지만, 기존 ‘생 산적 노동’의 기준이 이미 상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전지윤 동지의 이 문제제기 는 매우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권리생산노동’이란 중증장애인 노동자와 조력자와의 관계, 노동 중 마주하는 동료 시민들과의 관계, 이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새로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가 중심이 되어야 하며, 그 과정 자체가 갖는 의미와 그 과정에서 창출되는 가치란 결코 그 어떤 생산성의 기준으 로도 측정할 수 없다. 전지윤 동지의 지적을 염두에 두면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이 사실 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나가야 한다.
사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가 처음 만들어질 때만 해도, 더 나아가 2017년 장애인고 용공단 서울지사 점거 투쟁에서 장애인 공공일자리를 요구할 때만 해도, 이와 관련된 담론이 이렇게 다양한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실험 은 다양한 방식으로 담론화될 수 있는 숱한 가능성을 품고 있음이 차담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증명된 것 같다. 그래서 전장연노동권위원회 간사로서 매우 뿌듯뿌듯하다.
이 일자리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과 실천만이 이 일자리의 의미를 더 확장해 갈 수 있 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와 더불어, 우리 다 같이 장애해방-노동해방을 위한 본격적인 논쟁을 시작해보았으면 좋겠다. 이 가능성을 몸소 보여준 당일 차담회의 토론자 분들과 당일 행사에 참여한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