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가을 124호 - [공공일자리 1] 일을 할 수 없는 자란 없다 / 박경석
특집기획
공공일자리
[공공일자리 1] 일을 할 수 없는 자란 없다 박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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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일자리 1 ]
일을 할 수 없는 자란 없다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나도 할 수 있다.
83년 24살의 시퍼런 젊은 날 장애를 입고, 나는 절망했다. 절망의 집구석에서 5년의 시간을 보내고 장애를 수용하고 살아남기 위해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컴퓨터 훈련을 받았다. ‘나도 할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직업재활의 꿈을 꾸며 1년 동안 매우 열심히 했지만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내 탓이다’라고 생각했다. 장애인이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시대였기에 별을 따기 위해 더 노력을 했어야만 했다. 89년이었다.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다.
91년, 별따기 위한 노력으로 대학을 갔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직장을 얻지 못했다. 몇 번의 면접에서 장애와 나이를 이유로 미역국을 먹었다. 노력이 부족하다는 성찰과 함께 빛나는 ‘석사’라도 되면 그래도 유리할 것이라는 정세분석에서 시간도 때울 겸 해서 대학원을 진학했다.
94년, 35살에 93년 개교한 노들야학 자원활동교사로 장판에 본격적으로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거의 상근활동가처럼 열심히 했지만 교사회비만 내고 버는 것은 없었다. 97년 각고의 노력 끝에 ‘교장’이 되었다. 내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활동이었지만 먹고 살기 위한 일터는 되지 못했다. 상근활동가 1명을 두기도 힘든 노들야학이었기 때문이다.
2020년. 노들야학은 27주년이 지났다. 시작에 비해 많이 성장했다. 무엇보다 일터로 상근활동가를 남기기 힘들었던 공간에 함께하는 상근활동가들이 14명이나 되고 배우는 학생들은 휴학생 빼고 재학생만 70명이 넘는다.
노들야학이 함께한 장애인운동조직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통해 세상은 많이 변했다. 노들장애인야학 교사들과 학생들이 열심히 함께해서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거의 설치되었고, 저상버스와 특별교통수단이 도입되어 확대되었다. 활동지원서비스가 제도화되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다. 장애인연금이 만들어지고, 장애인거주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로 완전한 통합과 참여를 외치며 탈시설운동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90년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정되고, 2000년 장애인고용촉진및직업재활법으로 전면개정된 후에 시행된 지 30년을 지나고 있다.
30년 투쟁에도 내게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무거운 차별과 절벽이 여전히 남아있다. ‘노동’이었다. 야학에서 수업을 한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와 관계가 있다. 누군가에는 학습욕구를 채우고 싶어서, 만날 사람이 없어 사람이 보고 싶어서, 검정고시 통과를 하고 싶어서, 가족들에게 부담을 덜기 위해, 가야할 곳이 없어서 야학에 나온다. 나도 그 이유 중에 하나로 야학에서 교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학생이나 교사활동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해결하지 못한 ‘허전함’에 녹아있는 ‘절벽과 절망’은 ‘노동’이었다. ‘일자리’이었다.
세상에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일을 할 수 없으면 복지수준이라도 높여야 했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투쟁을 했다. 그래서 장애인이동권, 교육권 투쟁 그리고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등 시민의 기본권리 쟁취와 복지확대를 위한 투쟁이었다. 그 투쟁에 몰입하면 할 수록 ‘일을 할 수 없다면’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녹아들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세상에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다만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가 있을 뿐이다.’ (고병권, 《묵묵》)
중증장애인에게 노동할 권리가 없단 말인가. 노들야학에서 만나는 학생들을 보며 나는많은 세월 포기했다. 노들야학에서 사회적기업 노란들판을 만들어 그나마 중증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야학 학생들이 취업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공간은 마음만큼 그렇게 쉽게 노들야학 학생 수준의 중증장애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공간이었고,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구조였다. 그래서 장애인 중에 그나마 일할 능력이 조금이라도 평가 받을 수 있는 중증장애인이 취업되었다. 야학 학생 출신의 중증장애인들은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다. 현재의 야학 학생들에게는 그 공간마저도 넘어갈 수 없는 곳이다. 처음부터 설계가 그랬다.
무엇이 그들을 ‘노동’하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했던 노동에 대한 기본 전제를 바꾸지 않으면 노들야학에 다니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일자리’는 살아서 만나지도 가질 수도 없는 ‘남의 것’일 뿐이었다. ‘남의 것’이 내것도 되고, 노들의 것이 되고, 우리의 것이 되는 투쟁이 필요했다. 그래서 서울시청 뒤편에서 20일을 머물렀다. 그리고 드디어 ‘남의 것’이었던 노동이, 일자리가 나에게, 노들에게, 학생들에게 찾아왔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일자리였다. 직업재활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노동능력이 가장 없는 사람이 가장 먼저 취업이 되는 일자리가 꿈처럼 현실이 되었다.
이것도 노동이다.
올해 7월부터 서울시에서 ‘서울형권리중심의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가 시작되었다. 노들야학 학생 26명이 참여하는 이 일자리는 ‘이것도 노동이다’이다. 참여하는 학생 중에는 도봉구 끝자락에 있는 인강원이라는 거주시설에 사는 중증발달장애인이 다수 있다. 우리는 과연 그들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이 일자리를 통해 이들이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꿈이 실현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서울형 일자리에 이런 마음을 담았다. “이것도 노동인데, 당신들 눈에는 아닌 것 같아요?”
“무슨 일 하는데?”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을 그려요!”
“그래서 무엇을 만들고 파는데?”, “장애인권리를 만들고 홍보하고 나누어 드립니다. 장애인권리협약에 근거해서 UN장애인권리위원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그렇게 안하면 다음에 혼난다고 권고했던 일이랍니다”
“도대체 그것을 왜 해야 하는데? 무슨 효과가 있는데?”
“지역사회 변화시키려고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변화시키려고요. 그래서 누구도 장애인거주시설과 같은 격리되고 배제된 감옥 같은 곳을 만들어 ‘보호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사기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 노들 근처 지역사회에서 나 같은, 장애 정도가 최고로 심한 중증장애인이 가장 먼저 일자리를 얻어서 함께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이고 가능한 일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요.”
이것도 노동입니다. 한번 봐주실래요. 30년 동안 풀지 못한 숙제가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이다.
“지역사회 변화시키려고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변화시키려고요.
그래서 누구도 장애인거주시설과 같은 격리되고 배제된 감옥 같은 곳을 만들어
‘보호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사기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
노들 근처 지역사회에서 나 같은, 장애 정도가 최고로 심한 중증장애인이
가장 먼저 일자리를 얻어서 함께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이고 가능한 일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요.”